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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란 Mar 22. 2024

이모셔널 팝

퇴고 없이 단번에 쓰는 글

팔지 못한 책이 베란다에 쌓여 있다

천장이 막혀 있는데 바닥에 물이 고여 있다

새로운 세대의 아이돌 그룹이 오늘 데뷔를 했다

헐렁한 반바지를 입은 남자들의 다리가 이쑤시개처럼 가늘다

찡그렸다 눈꼬리를 길게 늘였다 웃는다 온몸으로 춤을 춘다 눈은 쉬지 않고 카메라를 쫓는다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른다 박수는 치지 않고

박자를 맞추면 한 명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무슨 얘기를 해도 환호성이 된다

무대 아래로 남자들의 땀방울이 튀었다

창문 틈 사이로 빗물이 들이닥칠 것만 같다


연수는 모르는 것을 만지지 않는다

커피를 마시는 오 분 일주일을 브리핑하는 십 분

저마다 싫어하는 동물의 이름을 댔다

매미, 개구리, 꼽등이, 비둘기, 사슴벌레

연수의 표정이 서서히 굳는다 술집 쓰레기통에서 마주친 쥐의 생김새를 설명하자

주머니에서 직접 그린 태극기와 베트남 과자를 꺼낸다

주말 내내 춤을 추었다 세로로 긴 직사각형 거울 앞에서

마스크를 끼고 눈만 뚫어져라 본 채

지하에는 창문이 없었고 밖으로 나와 보니 해가 떨어져 있어서

집으로 돌아가 구석구석 몸을 씻고 맥주를 마시고 다시 춤을 추었다

연수는 도망을 모른다

박수도 치지 않고 이야기를 듣는다 컵의 얼음이 다 녹아 물이 되었다


이사를 온 첫날 화장실에서 바퀴벌레와 마주쳤다

변기물을 내리고 돌아서는데 문턱에 지렁이 두 마리가 반대 방향으로

기어가는 중이었다 물은 이미 내려갔는데

아래층에는 아이들이 자고 있어 뛰지도 못하고

숨을 크게 들이쉬어보아도 코끝이 간지럽지 않다 연수는 마스크를 벗어서 변기에 던져 넣는다


책장 밑에서 책 한 권을 발견한다

먼지를 털어내니 재채기를 일곱 번이나 연속으로 했다

첫 장을 펼치니 돈벌레가 몸을 동그랗게 만 채로 죽어 있었다

책을 기울여 변기 속으로 떨어뜨린다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모양이 밥에서 골라낸 콩 같다고 생각한다

웃음이 나와서 피식 웃었다 이 이야기는 다음 주에 들려줘야지

연수가 모르는 것이 하나 줄었다


거울은 세로로 긴 직사각형이고 한 손으로 쥘 수 있다

책에서 꺼낸 빗으로 머리를 빗으며 거울을 본다

이름만 알고 실제로 본 적 없는 동물을 상상한다

번화가 골목을 지나는데 모자를 눌러쓴 사람이 다가온다

앞은 막다른 벽이고 벽은 키보다 높다

뒤를 돌아본다 길바닥에는 수많은 동물들이


연수는 찡그린 표정을 지은 얼굴을 발견한다

빗을 내려놓고 손으로 얼굴을 구석구석 만진다 그곳에 잘 있는지 확인이라도 하듯

화장실을 향하는 발걸음마다 축축하다 방바닥에 물이 흥건하다

연수는 위를 올려다본다 천장과 가까운 창문을 향해 손을 높이 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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