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
책을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하겠지만 사랑하느냐는 물음에는 답을 망설이게 된다.
많은 이들이 그렇듯이 취업 이후 업무에 치중한다는 그럴싸한 핑계로 책을 멀리하고 살았다. 책은 책장에 가만히 꽂혀 있고 나도 내 방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 멀어진 걸 보면 아무래도 시공간이 늘어난 게 분명하다.
독서가 취미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라면 휴식 시간을 책에 파묻혀 지낼 텐데 음악 감상, 관성적으로 하는 카드 게임, 그리고 연극 모임 다음 4순위로 밀린 걸 보니 취미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다. 친구 H는 얼른 일을 끝내고 집에 가서 마음 편히 책을 읽고 싶다고 말했다. 휴식으로써 책을 읽는 게 과연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직장인에게 가능한 일이었나. 불충한 마음이 드는 걸 보면 나에게 독서는 취미라기보다 아직은 과업에 가까운 듯하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 느낄 수 있어야 사랑일 텐데 증명하려고 애를 쓰는 걸 보면 일방적인 마음인 듯하다. 한쪽으로 기운 관계는 불안하니 빈 책장을 채우며 균형을 맞추는 데만 급급하다.
...'지금 읽고 싶은 책'과 '당분간은 읽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언젠가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책'과 '읽을 마음은 없지만 내가 읽었다고 사람들이 생각해 주길 바라는 책'은 같습니다. (p. 125)
책장에는 읽은 책보다 읽지 않은 책이 더 많다. 취미가 아니라지만, 완독한 책을 헤아려보면 분명 이것보다는 더 많은 글을 읽었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적다. 아마도 대학 시절 단편적으로 읽은 출력물 속 문학 작품들과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읽었지만 도통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서 읽었다고 해야 하나 읽은 경험이 있다고 해야 하나 애매한 경우가 많다. 기억을 타고 올라가면 <신기한 스쿨버스>나 <Why?> 같은 책도 완독 목록에 넣어야 하는지 헷갈린다. 이런 것 하나하나에 목매는 걸 보면 영락없이 '책 안 읽는 직장인'이다.
책장 한구석에는 두꺼운 장서들이 버티고 있다. 언제 사 두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묵직한 양장본들. 대부분은 인문학이나 미학 서적이다. 양장본은 없지만 수로 따지자면 소설이 가장 많다. 물론 이들 중에서도 완독한 책은 손에 꼽는다. 안 읽은 책보다 읽은 책을 찾는 게 더 빠르다.
프로이트를 논하기 위해 <꿈의 해석>을 샀고 페미니즘을 말하기 위해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를 샀다. 전자는 심리학에 한창 빠져 있던 고등학생 시절 이 책만큼은 기본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들었기에 샀지만 밑줄만 줄곧 긋다가 절반을 채 읽지 못한 채 덮어 두었고, 후자는 당시 뜨거운 감자였던 페미니즘을 내 안에서 조금이라도 이해해 보고자 도서관에서 빌려 읽다가 서점에서 구매하기에 이르렀지만 어째서인지 그 이후로는 펼쳐본 적이 없다. 책장의 무게에 비해 말할 수 있는 건 한없이 적다.
물론 우리 집 책장의 터줏대감인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 동물원>과 테드 창의 <숨>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다. 곧 죽어도 유튜브 20분 요약 영상은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기에 <위대한 개츠비>와 <오만과 편견>에 대해 함부로 언급했다가는 망신만 당할 것이 뻔하다.
읽지도 못할 책들을 어깨에 잔뜩 짊어진 채 쩔쩔매고 있는 내 꼴이, 마치 감당도 못할 책장의 무게에 깔려 고통받는 시시포스와 다를 바가 없다. 단전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으로 가득한 독서만이 애독자의 필수조건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정작 다른 이의 시선이나 신경 쓰면서 책을 사 모으고 있다니. 불순하고 무엄하기 짝이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내가 정말 책을 읽는 행위를 좋아하는 것인지 스스로 의심이 들 때가 많아졌다. 사실 나는 심오하고 어려운 책을 완독한 지적인 캐릭터를 만들어 놓고 그 사람을 흉내 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무도 내 책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나는 읽고 쓰는 일을 그만두고 말 것인가?
도서관의 가장 큰 교육적 기능은 무지의 가시화 (p.61)
도서관을 일종의 종교적인 체험이 이루어지는 성스러운 공간으로 묘사하며 자기 자신의 '무지'를 마주하는 공간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한 권의 책에도 이전까지 몰랐던 지식들이 가득 담겨 있는데, 책들의 보고寶庫에 들어서면 내가 아직 모르는 지식의 양을 시각적으로 마주하게 되며 한없이 겸손해지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도서관에 가는 행위는 수많은 스승들에게 혼나는 것과 같다. 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꾸짖음. 교회나 성당, 혹은 절에 가서 한 주간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마주하는 행위와 근본적으로 같다고 볼 수 있다.
신도의 수와 공간이 주는 성스러움의 깊이가 비례하지 않듯, 이용객이 많다고 해서 도서관의 무게감이 늘어나지는 않는다. 따라서 인기 있는 책들만 비치해 사람들로 바글바글한 도서관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다양한 지식들로 채운 도서관이 더 좋다는 것이 이 책의 골자이다. 사람이 거의 없어서 공허한 느낌을 줄지언정 그것이 오히려 도서관이 지향해야 하는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도서관이 읽는 자가 주인인 공간이라면 출판사는 쓰는 자, 서점은 파는 자가 주인인 공간일 것이다. 출판사는 교황청, 서점은 성당쯤 되려나.
그렇다면 나는 성당에서 일한 적이 있지만 교황청 입성의 문턱에서 미끄러진 뒤 변절한 환속인還俗人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배움에서 가장 좋지 않은 것은 머릿속에 불량한 지식과 정보가 가득해 더는 새로운 지식과 정보가 들어갈 여지가 없는 상태입니다. (중략) '주저앉는 것'이 '무지'입니다. (p.100-101)
출판사 면접에 떨어진 후 다른 취업 길을 모색할 무렵, 책 역시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냉소를 짓고 다녔었다.
이제 와 돌이켜 보면 오만하기 짝이 없었지만 당시에는 지금 내가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세상의 풍토를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자신했다. 병에 담긴 몇 방울의 액체는 명품 향수로 둔갑하고, 몇 글자의 글씨가 박음질 된 옷은 고가의 의류로 재탄생하는 세상이니 책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것이다. 적당히 무게감 있는 텍스트와 함께 그럴싸한 디자인과 마케팅을 곁들이면 종이 묶음은 예쁘고 힙한 굿즈로 태어난다. 부정해도 소용없다. 이미 많은 책들이 비슷한 노선을 따랐고 그중 몇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니 말이다.
읽기 대신 평가를 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초반부에는 흥미진진했지만 중반부부터는 저자 스스로도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갈피를 못 잡는 것 같았어. 이 책은 서문만 괜찮았어. 이 책은 종이에서 쿰쿰한 냄새가 나더라. 표지 디자인은 저 책이랑 너무 똑같은데?
책을 읽는 것보다 어떻게 만드는지가 중요했고, 어떻게 만드는지보다 어떻게 팔지가 중요했다. 그게 당시의 내게는 알파이자 오메가였다. 사회라는 이름의 뗏목 위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라고 믿었으니까. 이윽고 나는 세상의 비밀을 파헤쳤다. 살아남는 법을 깨달아버리고 말았다. 정말 그때는 그런 줄로만 알았다.
책을 상품으로만 대하다 보니 이전과 같은 유대감을 느끼는 일이 적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느덧 내게 책은 게임 패키지처럼 전락해 버려, 읽기 위한 매체라기보다는 모으기 위한 수집품이 되어갔다. 책장의 무게는 늘어갔지만 어쩐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기분이었다.
다음은 무얼 읽지.
다음 단계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지금 이 순간을 스킵했다. 배가 가득 찬 줄도 모르고 먹이를 보면 입부터 쩍 벌리고 드는 뱀이 된 것처럼 책을 사냥했다. 이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집어삼킬 수 있을 것처럼 얼른 다음 순간을 재촉했다. 하지만 게임에는 끝이 없다. 책은 지식의 총량만큼 무한히 존재하므로 모든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설사 가능하다 하더라도 소화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욕심에 눈이 먼 뱀은 결국 배가 터져 죽을 운명에 놓여 있었다.
시간이 흐른 뒤 참회를 하는 심정으로 독서를 재개했지만 이미 속세의 냄새가 온몸에 배어 있는 듯했다. 내 몸과 정신을 구성하고 있는 원료가 대부분 책에서 나왔음에도 그 뿌리를 한 번 베어낸 이상 다시 이전처럼 태연히 책을 읽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읽지 않을 책들로 책장의 빈 곳부터 채우고 보는 불경스러운 태도 역시 여전히 고쳐지지 않았기에 나는 더 이상 진정성을 이야기할 수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기 바빴다.
이런 나와 달리 저자는 자신을 전도사에 빗대며, 읽고 쓰는 성스러운 책무를 다하기 위해 그 누구도 그 아무것도 주지 않더라도 책과 글을 써 나갈 것이라고 말한다. 주변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오로지 책 자체만으로 충만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 이 사람도 나와는 다른 성스러운 부류의 인간이구나, 하는 생각으로 거리를 두려고 했다.
...왜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을 책장에 꽂아 두는 '쓸데없는 일'을 하는 것일까요? (중략) 자신이 읽지 않은 책은 '가시화된 자신의 무지'이기 때문이죠. (p.150)
하지만 그는 풀이 죽은 내 어깨 위로 가만히 손을 얹었다.
다른 이에게 어떠한 사람으로 비치고 싶다는 오만과 욕망으로 가득 들어찬 책장을 함부로 폄하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무지를 상징하는 존재로 인정해 주는 온화함에 솔직히 조금 놀랐다. 스스로를 꾸짖고 비우는 겸손한 의식은 도서관만이 아니라 내 방 책장 앞에서도 가능한 것이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나조차도 모르게 틈틈이 콤플렉스를 책장에 한 권 두 권 꽂아 왔다. 정신분석학과 페미니즘 도서, 문학과 미학 개론서, 헌책방에서 산 수많은 시집과 작가 이름만 보고 산 해외 소설책들. 무지로 가득 찬 책장은 곧 거울이었고 나는 한동안 이목구비 구석구석을 살폈다. 사람은 평생 자신의 진짜 얼굴을 모르고 산다던데 책장 앞에는 되고 싶은 나와 되어 버린 내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같은 손을 내밀기에 평생 악수는 할 수 없겠지만 앞으로도 서로의 손바닥을 맞댈 수는 있을 것이다.
정보의 홍수라는 단어를 들어본 지도 이십 년은 더 되었다. 홍수는 육지를 휩쓸다 못해 지워버렸고 우리는 이미 해수면 아래에 살고 있다. 중요한 정보를 재빠르게 파악해 바다를 탈출하는 게 미덕이라고들 하지만 사람들은 각자의 손발만 허우적거릴 뿐 정작 탈출한 사람은 없다. '나는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을 알고 있다'고 입을 뻐끔거리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나 역시 수면 위를 올려다보며 강박과 공포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빨리 나가지 않으면 숨이 막혀 죽을지도 모르니 마음은 더 조급해졌다.
하지만 수면 위로 탈출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우리는 모두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죽을 운명에 놓여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책을 탑처럼 쌓아도 바닷물의 깊이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니, 앞으로도 나는 영원히 모르고 모르는 만큼 참회하고 참회한 만큼 작아지고 작아진 만큼 겸손하게 살아갈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겸손은 앎과 가까우므로, 다 읽은 책들과 읽을 책들과 영원히 읽지 않는 책들로 책장은 앞으로 계속 무거워지겠지.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고, 해류에 휩쓸려 나갈 걱정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라도 내 방 책장에는 아무래도 책이 많은 편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