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게 빛나는』
맛있는 영화였어. S는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재밌다’도 아니고 ‘맛있다’라니. 피가 튀고 살점이 널브러진 공포 영화를 본 뒤 할 말인가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심장을 조여 오는 쫄깃한 서스펜스를 몇 차례 겪고 나면 희한하게도, 자극적이지만 맛있는 음식을 해치운 것처럼 속이 든든했다. 이런 맛을 또 언제 먹어봤었더라.
공포 콘텐츠가 붐을 일으켰던 적이 있다. 문구점에서는 으스스 한 그림을 표지로 만든 손바닥 크기의 작은 서적을 팔았고, 〈빨간마스크〉나 〈무서운 게 딱 좋아!〉 같은 어린이 대상의 공포 시리즈 도서는 어느 서점을 가더라도 베스트셀러 서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심지어 동네의 공립 어린이 도서관에도 공포 만화책들이 꽂혀 있을 정도였으니 그 파급력은 남다른 수준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이들은 불량식품처럼 책들을 돌려봤다. 빨간마스크를 만나면 무슨 단어를 몇 초 안에 이야기해야 한다는 둥, 파란마스크는 빨간마스크와 연인 관계라는 둥, 엘리베이터 버튼을 이렇게 저렇게 누르면 다른 차원으로 가게 된다는 둥, 교실은 친구의 친구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로 가득했다. 실제로 만난 적은 없지만 직접 겪은 일이라고 하니 아이들은 친구의 친구 말이라면 항상 진실로 받아들였다.
당시 유행했던 공포물은 대부분 옆 나라 일본에서 건너온 도시괴담에서 파생된 것들이었는데, (친구의 친구가 일본 사람이었나 보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일상적인 사물을 낯설게 묘사하는 특징이 있다 보니 문학의 ‘낯설게 하기’ 기법과 본질적으로 같은 방식의 접근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겁 많은 내가 너덜너덜한 책장을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넘기며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건 문학적인 ‘맛’이 그 안에 녹아 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마치 생선의 눈처럼 왼쪽과 오른쪽을 동시에 응시하는 남자의 검은 눈동자 한 개씩과 마주쳤다. (p.17-18,〈열린 문〉中)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공포물을 점점 멀리하게 되었다. 고기반찬보다 나물 반찬이 끌리면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라고 누가 그랬었던 것 같은데, 어느덧 나도 무해한 맛이 나는 책만 찾고 있었다.
입맛은 둘째 치더라도 소화 기관도 약해지는 걸 느낀다. 일주일 내내 술을 마시고도 멀쩡하던 시절은, 이제는 정말이지 도시 전설처럼 낯설게 들린다. 술은 고사하고 조금만 맵거나 기름진 음식이 들어와도 다음날까지 더부룩함이 이어진다.
비단 음식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삶의 모든 부분에서 소화 능력이 떨어지고 있다. 글도 일도 관계도. 조금만 얹힌다 싶으면 곧바로 수저를 내려놓고 식탁을 박차고 나온다.
삶이 점점 매워지고 있다. 무턱대고 맵기만 하는 떡볶이는 아무도 찾지 않는데. 아니면 내 입맛이 너무 연약해져 버린 것일까.
맛있게 무서운 게 먹고 싶다. 둘이 먹다 셋이 죽어도 모를 맵기라고 호들갑을 떨지 않아도, 빨간 양념으로 온몸을 몇 겹씩 덧칠하지 않아도 계속 집어먹게 만드는 게 매력적인 떡볶이가 아닐까.
〈푸르게 빛나는〉은 한동안 잊고 지내던 그 매콤한 맛을 기억나게 해 준 맛있는 떡볶이였다. 텀블러에 담아서라도 출퇴근길 내내 조금씩 집어먹고 싶을 만큼. 덕분에 한동안 지하철 안에서 서 있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딱 한 손에 들어오는 책의 크기 덕분에 조금 큰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듯 익숙해서 ‘읽는다’라는 행위보다 ‘먹는다’라는 행위에 가깝게 느껴졌다. 이것이 바로 스낵컬처인가.
시뻘건 공포만을 내세우지도, 감동이나 스릴 같은 부재료로 공포의 농도를 희석하지도 않는다. 작품을 읽는 내내 항상 다음 페이지가 궁금했다. 심지어 책을 추천해 준 친구에게 스토리의 대부분을 이미 전해 들었음에도 바로 다음에 이어질 장면이 기다려졌다.
나는 그 촉수 같은 것에 바짝 코와 입을 맞대었다. 단내가 났다. (p.67, 〈우물〉 中)
〈열린 문〉 뒤의 괴생명체와 〈우물〉의 정체, 그리고 〈푸르게 빛나는〉 벌레가 결국 무엇이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속이 더부룩한 종류의 매운맛은 아니다. 알싸한 매콤함이 혀 가장자리를 타고 흐르며 한동안 침샘을 자극한다. 방금 그건 무엇이었을까. 내가 목구멍 속으로 씹어 삼킨 재료의 정체를 궁금하게 만들고 입맛을 쩝쩝 다시게 하는 맛의 비결은 미지에 대한 집착에서 우러나온다고 생각했다.
공포는 본질적으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대상에게 느끼는 감정이다. 영화 〈파묘〉가 관객들에게 호불호의 입방아에 오르게 된 것은 후반부에서 미지의 정체를 드러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지평좌표계로 고정된 귀신은 더 이상 무섭지 않으니 말이다.
공포 소설만이 가질 수 있는 상상하는 맛이라는 장점을 확실히 살린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시청각적 요소가 가져다주는 공포 요소를 하나도 활용할 수 없게 된 이상, 독자의 눈을 안대로 가려놓고 입을 벌려 숟가락을 집어넣는 것이다. 영문도 모른 채 당황스럽지만, 맛에 솔직한 혀와 입은 이미 ‘열일’ 중이다. 맛없을 수가 없는 맛이니까.
최근 독자들 사이에서 가장 ‘핫’한 출판사를 꼽으라고 한다면 〈안전가옥〉의 이름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좀비, 크리처, 귀신 같이, 소위 ‘순수 문학’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소재들을 재료로 자극적이지만 맛 좋은 음식을 만드는 곳이다 보니 그 매콤한 냄새를 맡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이제는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부디 앞으로도 계속해서 맛있게 매운 음식들을 많이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떡볶이만큼 흔하고 만들기 쉬운 음식도 없다지만, 떡볶이만큼 까다로운 음식도 없다. 같은 재료를 넣어도 불 조절과 물의 양, 들이는 시간과 만드는 이의 손길에 따라 맛은 천상과 지옥을 오간다. 손맛 좋은 김혜영 작가의 저서는 〈그분이 오신다〉를 제외하면 안전가옥의 앤솔로지 단편이 전부인데, 혹시 습작이라도 있다면 창고에서 몰래 꺼내 와 내 텀블러에 넣어두고 싶다.
내 안에 ***가 들어갔다고. (p.178, <푸르게 빛나는>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