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찰펴보다

엠과 술

배수아 -『뱀과 물』서평

by 찰란

여행자들은 서로의 기억을 훔친다. 내밀한 대화는 물방울로 응결되어 잔의 벽을 타고 흘러내린다. 서로 다른 세계의 말이 뒤섞인 칵테일을 마시면 직접 겪은 것처럼 말할 수 있다.


나는 필리핀 교도소에서 탈옥한 마약상이었는데,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고향 친구와 재회한다. 십수 년 만에 만나 알아보지 못할 뻔했지만 팔뚝에 수북하게 난 검은 털을 보고 나는 그 아이라고 확신한다. 그는 북쪽으로 향하는 중이라고 했다. 북쪽에 가면 무엇이 있는데. 나는 그의 입술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고 있다. 나의 진짜 아내가 기다리고 있어. 얼마 전 연인과 재회한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짓는 결연한 표정을 따라 해 본다.


밖으로 나와 우리는 열차를 기다린다. 북쪽으로 가는 열차의 철길은 눈 속에 파묻혀 있다. 군데군데 얼어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꽤 오랫동안 이곳을 지나가지 않은 듯했다. 구불구불하게 나 있는 철길을 따라 우리는 걷는다. 어쩌면 열차보다 먼저 북쪽에 도착할지도 모른다.


깨어나지 않으면 어쩌지. 아내를 걱정하는 아이의 손을 잡아준다. 털이 나 있지 않은 손바닥은 보드랍다. 나는 그것이 그의 배꼽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손끝으로 심장 박동이 느껴지거나 꼬르륵거리는 소리 따위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내 손을 뿌리치고 달아난 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아이의 배꼽과 검은 털이 수북이 난 팔뚝은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저 사진이 스키타이족의 무덤인가요?” 내가 키 큰 여자 심리학자에게 물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p.23,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 中)


배수아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대학생 시절 잠시 활동했던 문예 동호회에서였다.

국내 소설 중 좋은 문장을 골라 SNS에 공유하는 일을 했었는데, 학교 도서관에서 소설책을 찾던 중 배수아 작가의 작품을 우연히 집어 들었다. 당시의 기억으로는, 형용할 수는 없지만 알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사람을 홀리는 한 마리의 뱀을 만난 기분이었다.


평생 글을 써도 이 사람처럼 아름답게 쓸 수는 없겠다는 옅은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책날개에 적힌 작가 소개를 읽고 그녀가 화학과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희끄무레한 절망감의 농도가 안개처럼 짙어졌다.

논리의 세계에서 건너온 이의 손끝에서 이토록 앞뒤가 맞지 않는 아름다운 문장이 태어났다니. 보다 더 많이 읽고 쓴 뒤에 그녀의 글을 '각 잡고' 읽으리라 다짐했다. 뱀을 무서워하지 않는 날이 오면 제 발로 당당하게 그 검은 입속으로 걸어 들어가리라. 나는 표지를 덮고 원래 있던 자리에 책을 꽂아 넣은 채 자리를 떴다.

그 후로도 나는 읽고 쓰기를 계속했지만 배수아라는 이름은 다락방에 두고 온 빗자루처럼 한동안 잊고 지냈다. 머릿속에서 스러져 가던 그녀의 존재를 일깨워 준 것은 엠이었다.


“…혹시 사령관이 내 아버지이면서 네 아버지일 수도 있을까? 그가 나를 알아보면서 동시에 너를 알아볼 수도 있을까?” (p.143, 〈노인 울라에서〉 中)


엠은 내게 〈뱀과 물〉을 추천해 주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게'도' 추천해 주었다. 누군가 책을 추천해 달라고 물으면 지체 없이 건네줄 수 있는, 서가 가장 위에 놓인 책이 바로 이 작품이라고 했다. 소위 말하는 인생 책 중 한 권인 듯했다. 정작 작품을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었지만 배수아를 알고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 어쩐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군 복무 시절 만난 엠은 그 딱딱하기 그지없는 환경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 같았다. 온화한 미소와 조금씩 흐느적거리는 몸짓을 보고 있자면 곡선의 세계로 항해하다 직선의 세계로 불시착한 여행자처럼 보였다. 그 불시착마저도 여행으로 즐기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당장이라도 떠날 수 있지만 내키지 않는다면 움직이지 않는 여유로움이 부러웠다.

그에 반해 당시 나는 여기가 아닌 어디라도 가고 싶었지만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었다. 부풀어 있는 마음과 달리 현실적인 조건들을 고려하다 결국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발만 동동 구르는 스스로의 무기력함을 원망했었다.


군대 안에서 문예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하며 우리는 자연스레 서로의 글을 읽었다.

글은 흔히 작가가 나은 자식과 같은 존재라고들 하던데, 내가 읽은 엠의 글은 엠의 분신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엠의 글에게 육신이 생긴다면 엠의 모습일 것이고, 엠을 종이에 눌러 붙이면 엠의 글이 될 것만 같았다.

어느 한 대상을 묘사하다가 문득 떠오른 다른 기억으로 이어지고, 그 기억 속 세계를 거닐다가 그곳에서 만난 이방인을 관찰한다. 어느새 그와 악수를 하고 포옹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다 다시 문을 열고 현실로 돌아오지만 아까와는 어딘가 조금 달라진 낯선 현실을 마주한다.

엠의 글은 마치 곡선과 같다고 생각했다. 직선의 세계에서는 평행하거나 교차할지언정 끝과 끝이 만나지 않지만, 엠이 사는 곡선의 세계는 영원한 약속도 영원한 이별도 없이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다시 만나고 또 멀어지고 그러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하는 곳이었다.


엠 그리고 엠의 글과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곡선의 언어를 배워갔다.

한 권의 책을 읽고 나면 한동안 쓰는 모든 글에서 그 작가의 문체가 묻어 나오듯, 엠과 오래 교류하며 그의 말과 표정을 따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섣불리 결론짓지 않으면서도 울림을 주고, 함부로 뜨거워지지도 냉소하지도 않으면서 일정량의 체온을 남기는 글을 조금씩 조금씩 연습해 왔다.

그 결과 꼿꼿한 대나무 같았던 예전에 비해 그래도 억새만큼은 휘어질 줄 알게 되었다. 지금의 나를 만든 건 물론 시간이었겠지만, 그 시간의 흐름을 곡류曲流로 바꾼 데는 엠의 몫이 컸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그의 마음속에도 흐르고 있을 곡류의 원류原流가 궁금했다. 이제 그 실마리를 뱀과 물에게 물어볼 차례였다.


“네 안에는 아주 늙은 네가 살고 있을지도 몰라. 늙은 그녀가 너무 이른 시기에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해라.” (p.206, 〈뱀과 물〉 中)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얼핏 보면 현실성이라는 직류直流만이 세차게 흐르고 있는 듯하다. 이곳을 사는 사람이 이 책을 읽는다면 터무니없는 동화라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잠들기 전 혹은 잠에서 깬 직후 떠오르는 생각을 옮겨 적은 낙서 같은 글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단편들 간 동어반복적인 이야기가 연결된 구조인 데다 인물들의 이름도 뒤섞이니 머릿속에 들어온 정보들은 금세 증발되고 만다.

당장 나조차도 엠의 권유가 아니었다면 과연 이 책을 직접 사서 읽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빗자루를 찾으러 다락방으로 올라갈 날은 영영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빗자루가 뱀으로 변한 사실도 모른 채 살다 죽었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에서 상상은 쓸데없고 터무니없는 것이 되어 눈 속에 파묻힌 지 오래다. 사람들은 〈노인 울라에서〉의 군인들처럼 고개를 숙인 채 교차하지 않고 곧은 강줄기를 따라 한쪽 방향으로만 걷는다.


과감히 휘어져 기댈 줄도, 어깨를 내어 줄 줄도 알아야 얼어 죽지 않을 텐데 사람들은 쉬이 휘어지지 않는다. 말이 되지 않는 말이라며 두려워하다 끝내 부러지고는 한다.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이지 못하면 분노하는 자들의 손길로 만들어진 세계에서, 〈뱀과 물〉 같은 작품들이 대중적인 인기를 끄는 모습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소설은 3줄 요약처럼 간결하지도 3단 논법처럼 정연하지도 3분 요리처럼 빠르지도 않으니 말이다.

쓸모라는 기준에서 바라본다면 무의미한 주절거림 혹은 잔혹한 동화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시류와 관계없이 묵묵히 서로에게 휘어진 채 걷는 사람에게 이 소설은 손바닥이 따뜻하고 보드라운 동반자처럼 느껴질 것이다.


최근 들어 나는, 직선으로만 이루어진 세계에서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다짐을 한다. 얼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추운 나라로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어쩌면 그곳에서 나와 닮은 '눈 아이'를 만나 '눈 언어'로 대화하고 '눈 상상'으로 연결될지도 모른다.

나는 이 책에서 선명한 온기를 느꼈다. 서로의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보지 못할지라도 나를 닮은 이가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구나. 비틀거리며 내 쪽으로 부딪히는 어깨를 부축하고 또 기대며 우리는 구불구불 기어가고 있구나. 그 무언의 온기만으로 나는 더 먼 길을 돌아갈 용기를 얻는다.


다시 돌아온 바 안의 공기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 바텐더는 다가와 내 입에 초콜릿을 넣어주며 묻는다. 북쪽에 가면 무엇이 있는데.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내 팔뚝에는 어느새 검은 털이 수북하다. 손바닥만 빼고.

문 앞에 서 있는 나를 쳐다보는 이는 아무도 없지만 저들 중 누군가는 이미 나의 기억을 훔쳐 갔을 것이다. 홀로 바에 앉아 서로 다른 세 잔의 칵테일을 마시며 헐벗은 여인이 표지에 그려진 〈뱀과 물〉을 읽는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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