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 매큐언, 『견딜 수 없는 사랑』
『견딜 수 없는 사랑』의 결말부와 부록, 작가의 말까지 다 읽고 나서도 나는 한참이나 책을 덮을 수 없었다. 감동이나 희열이라기 보다는 '이게 도대체 뭐지?' 하는 의아함 때문에 전체적인 스토리와 인물들의 관계를 되짚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찬찬히 다시 읽으며 내 마음 속에 한 단어가 떠올랐다. 책의 제목에 쓰인 사랑도, 작품 내내 전개되는 집착도 아닌 '용서'였다.
용서의 사전적 정의는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 줌.'이다. 여기엔 생략된 주어가 있다. (누군가의)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해 (다른 사람이)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 줌. 용서를 위해선 잘못한 사람이 필요하고, 그 죄를 사해줄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스스로를 용서하는 강한 멘탈(?)을 가진 치도 있겠지만, 대개는 타인의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로 내면의 불편함(죄의식)을 씻어내고 싶어하기 마련이다.
인간은 신처럼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에 살면서 한 번은 실수, 배신, 폭력, 범죄, 배덕과 같은 상황에 처하고, 이런 불편함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지금의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붙잡는다. 애인, 친구, 지인, 모르는 사람, 과거의 괜찮았던 나의 모습까지도 말이다. 그렇게 '나'의 바깥에서 찾는 구원은 정말로 과거의 모든 허물을 사해줄 수 있을까. 글쎄. 당장의 마음은 편안해 질 테다. 그렇다고 죄가 사라지진 않겠지만 말이다.
나는 『견딜 수 없는 사랑』은 충격적인 사건 앞에서 한 없이 유약해지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는 사람들의 분투기로 읽었다. 인간이기에 무너질 수밖엔 없고, 인간이기에 견디어 내는 마음에 대해서 과한 스포(?)와 더불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 이 글은 개인적인 감상이며, 내용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같이 읽은 콘텐츠 『견딜 수 없는 사랑』
『견딜 수 없는 사랑』은 이언 매큐언의 장편소설이다. 아이 하나를 태운 채로 하늘로 날아가려는 열기구를 구조하다가 벌어진 비극으로부터 시작한 이 이야기는 사고 이후 남은 사람들의 마음에 대해 집요하게 들여다본 이야기다. 사고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불완전하기에 너무나 인간다운 이야기.
* 개인적인 감상이며, 내용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소설의 일부만 선택해서 글을 씁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Ae08lJXAb4
조와 클래리사는 들판에서 피크닉을 즐기려는 참이었다. 클래리사의 출장으로 둘은 함께한 7년 중 가장 긴 시간 6주간 서로보지 못했고, 아주 오랜만에 둘만의 행복한 시간을 보내려 한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히 깨져버린다. 어디선가 한 남자의 비명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조는 본능적으로 소리를 따라 달리기 시작한다. 멀리서 하늘로 날아가려는 열기구가 어렴풋이 보였고, 그 안에는 어린 소년이, 땅에는 줄에 발이 묶여 끌려가는 한 남자가 위기에 놓여있었다. 비명을 들은 건 조뿐만은 아닌지 울타리를 고치던 인부들, 다른 방향에서 뛰어오는 젊은 남자, 반대편에서 차를 몰고 오는 이까지 다섯 명이 사고 현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날아가는 열기구의 줄을 잡고 간신히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그렇게 아이를 구출하고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좋았겠지만… 패닉에 빠진 아이는 바구니에 주저앉았고, 발목의 줄을 푼 남자는 손자를 구하겠다며 바구니로 달려들고, 하필이면 강풍까지 부는 엎친 데 덮친 격의 돌발상황이 겹치며 열기구는 아이를 태운 채로 하늘로 날아가기 시작한다.
다섯 남자와 아이의 할아버지는 줄을 잡아 다시 끌어내려보지만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 열기구는 점차 고도를 높인다. 땅에서 발이 뜨고,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리던 남자들은 하나 둘 줄을 놓치고… 타이밍을 놓친 것인지, 아이를 살리기 위해 포기하지 않은 것인지 끝까지 줄을 놓지 않던 로건이라는 남자는 기구가 한참이나 날아오른 후에야 추락하고 만다.
모두들 망연하게 그 장면을 바라보던 중에 조는 오지랖을 부리며 남자가 아직 살아있을지 모른다며 그가 떨어진 곳으로 달려간다. 명상을 하듯 앉아있는, 그러나 실상은 처참하에 뭉개진 시신을 보며 조는 좌절에 빠지고, 뒤따라온 젊은 남자 패리는 함께 기도하기를 권한다.
조는 그 사건 이후로도 한참이나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누가 제일 먼저 밧줄을 놓았는지 그때도 알지 못했고 그 이후에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 사람이 나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모두가 자신은 아니라고 주장한다.(29p)
일상으로 돌아온 조는 사고의 충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선의로 시작한 일이 비극으로 끝날 줄은 상상도 못했기에, 지지 않아도 될 책임과 죄책감을 뒤집어 쓸 줄은 몰랐기에, 로건이 의미 없이 죽어간 것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고 괴로워한다. 의연하게 현실로 돌아온 쪽은 클래리사였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어." (…) "걱정하지 마, 조. 이 일로 당신을 괴롭히진 않을 테니까. 내 말은, 이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거야.(클래리사의 말)"
내가(조) 말했다. "우리는 도우려고 했지만 실패한 거야."(55p)
어쩌면 조는 클래리사가 온전히 자신의 편이 되어서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끝내 그 말만은 듣지 못하고, 이 일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사랑을 권하는 그녀를 안는다. 두 사람은 모두 현장에 있었지만 사고에 개입한 정도는 다르다. 줄을 잡고 '내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죄스러운 마음을 품어본 사람과 그 모습을 지켜본 사람의 사건을 '이해'하는 감도의 차이는 분명히 달랐을 테니 말이다.
조는 로건의 죽음에 대해 용서를 받고 싶었던 것 같다. 어쩔 수 없었다고, 손 쓸 방법이 없었다고 과거를 합리화하고, 재평가하면서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복기한다.
이런 죄책감은 조만 겪은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시 클래리사와의 일상을 회복해가는 중, 야밤에 걸려 온 전화 한 통이 조의 삶을 완전히 흐트러놓는다.
"조. 당신이에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이미 알아차렸다. 그가 말했다. "그냥 당신 감정을 이해한다고 말하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나도 같은 감정이니까요. 사랑해요."(61-62p)
목소리의 주인은 사고 현장의 젊은 남자, 개드 패리였다. 그는 너가 먼저 자신을 꼬셨다는(?) 해괴망측한 논리와 함께 조를 스토킹하기 시작한다. 패리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새아버지와 재혼한 어머니도 몇년 전 암투병을 하다가 떠나며 막대한 유산을 상속 받고 저택에 사는 젊은 한량이었다. 돈이 생기기 전 그는 이렇다할 교우관계도 맺지 못하고, 단순직 일자리를 전전하며 사회적 성취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상속을 받은 후엔 저택으로 이사해 고립된 곳에서 하느님의 영광에 대해 묵상하며 신앙에 심취했다.
패리는 왜 하필이면 조에 꽂혔을까. 그건 아마도 오랜만에 만난 '함께'라는 감각 때문은 아니었을까. 오랜시간 혼자였던 그는 열기구 사고 때 함께 구조를 도울 때 좋았을 것이다. 와중에 로건의 시신 앞에서 신께 함께 기도하는 순간도 그에겐 잊지 못할 기억이었을 게다. 비단 그의 사랑의 방식이, 상대방이 나를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드클레랑보 증후군(도끼병)으로 나타났고, 스토킹을 통해 애정을 전한게 문제라지만 그게 그에겐 최상의 경험이 되었을 게다. 왜? 나는 그 역시도 조처럼 누군가 자신을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고 용서하며 품어주길 바라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겠다는 것은 명분일 뿐, 그는 타인을 통해 '구원'받고 싶었던 건 아닐까.
당연하게도 일방적인 사랑은 모두가 행복할 수가 없다. 패리의 열렬한 마음은 상대의 일상을 침범하는 감시, 전화와 편지 세례로 나타났고, 조는 거의 미치는 지경으로 치닫는다. 가뜩에 기구 사건의 죄책감으로부터 온전히 빠져나오지 못한데다 스토킹까지 당하며 그는 궁지에 몰린다.
자신의 위기를 구해줄 타인, 클래리사에게 자신의 힘듦을 토로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그냥 미친 인간이 벌이는 일에 왜 이렇게 집착하느냐는 이성적인 반응에 조는 상처를 받는다. 온전히 나를 받아주기를, 나를 용서해주고 품어주기를, 사랑으로 불완전한 나를 끌어안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해소할 수가 없었다. 애석하게도 그는 이런 고통을 스스로 견딜 수 없는 존재였고, 구원자를 찾아 자신의 삶을 헤집고 결국에는 '과거의 나'를 소환한다.
과학자로서 커리어를 이어갈 줄 알았던 인생이, 잠시 사업에 발을 담근 사이에 멀어져버렸고 클래리사와의 안정을 택하며 결국은 꿈을 포기했던 과거를 되돌아본다. 빛나던 순간의 나, 가장 나다운 순간의 나, 내가 되고 싶어하던 나의 모습을 간직한 과거로 돌아간다면 지금의 망하고 스토킹 당하고 죄책감에 쩌든 내가 구원받지 않을까, 내 앞의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진 않을까 하는 삿된 희망을 품은 것이다. 하지만 이 생각은 클래리사와의 관계에 악영향을 끼친다. 종국에 클래리사는 편지를 통해 숨겨왔던 마음을 꺼낸다.
패리 문제가 커지면서 나는 당신이 자기 세계로 점점 더 깊이 침잠해 들어가고 나에게서는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어. 당신은 미쳐 있었고 외골수였고 굉장히 외로워했어. 사건을, 임무를 맡은 사람 같았지. 어쩌면 그것은 당신이 하고 싶었던 과학의 대용품이 된 건지도 몰라. 당신은 연구했고, 논리적 추론을 했고 많은 일을 이해했지만, 그러는 과정에서 나와 함께 가는 것을 잊었고, 자기 마음을 터놓는 방법을 잊었지. (325p)
클래리사는 사랑하기에 연인에게 부치지 않았던 존 키츠의 편지를 찾아다닌다. 말하지 않음으로서 사랑을 전하는 마음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조의 마음만은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그의 위기를, 공포를, 아픔을 한 발 떨어져 객관화했기에 마지막의 그 사건(읽어보길 바란다)으로 치닫게 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조의 표현을 빌려 '객관성에서 사적인 구원은 있을 수 없기에' 말이다. 다만 이해는 된다. 직장에서의 힘든 일상을 공유하고도 싶고, 내 마음을 상대가 헤아려주기를 바라며 관계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싶은데, 조는 열기구 사고 이후로 뜬금 없이 스토킹이니 과학을 다시 하겠다느니 헛소리를 늘어놓고, 자신의 서재를 뒤지며 의심까지 하는데 대화가 통했겠는가. 조는 클래리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의 견딜 수 없음을 토해냈고, 그 방식은 클래리사를 견딜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사랑을 갈구하는 패리, 용서받지 못함을 견디기 위해 사랑으로 견뎌보려 하나 실패한 조, 그로 인해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된 클래리사까지(책에 나온 다양한 형태의 사랑들까지도). 『견딜 수 없는 사랑』를 읽다보면 누군가를 견디게 하는 것도,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도 사랑이라는 생각이 든다.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서로의 부족함을 함께 채워가는 것. 파트너가 자신을 구원해줄 존재라는 기대를 품기보단 마음을 터놓고 같이 견뎌갈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 용서 받길 바라지 않고, 용서하며 이해해주는 것. 이언 매큐언은 그렇게 종국엔 원제인 Enduring Love. 지속하고, 견뎌내는 사랑으로 나아가는 마음에 대해 쓰고 싶었던 건 아닐까.
시간을 두고 이 책을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지금은 이해를 해보려 애썼지만 조의 마음으로, 클래리사의 마음으로, 또 패리의 마음으로 관찰자의 벽을 허물고 읽는다면 또 느낌이 다를 것 같다.
흥미 유발을 위해서 열기구 사고를 좀 더 드러내고,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용서와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내세울 것 같다. 또한 조와 클래리사를 어긋나게한 객관성에 대한 이야기를 발췌하여 스포가 안되는 선에서 내용의 힌트를 주는 한편, 이 소설의 읽기 힘든 부분인 패리의 스토킹을 '이 다음은 어떻게 될까' 기대감과 함께 넘어갈 수 있도록 '구원'이라는 포인트를 잡았다.
아이를 태운 채 날아가는 열기구를 구하기 위해 모인 다섯 남자
돌발 상황이 겹치며 기구는 하늘로 떠오르고 뜻밖의 비극을 마주한다
'그때 나는 가장 먼저 밧줄을 놓았을까?'
현대 영문학의 거장 이언 매큐언이 던지는 용서와 사랑에 대한 질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