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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예지 Mar 24. 2023

퇴근할 때마다 눈치 보는 중

어제 쓴 한 장짜리 보고서의 '추진'이라는 문구는 보고 과정에서 '추진하고 있음'이 되었다가 다시 '추진'이 되었다가 최종적으로 '추진 중'으로 결정되었다. 의식적으로 수동형 표현을 쓰지 않으려 노력하는 편이지만 여기서는 '결정했다'가 아니라 '결정되었다'가 맞는 표현이다. 회사 보고서에 들어가는 문구 하나에도 여러 사람의 의견이 더해'지'는 곳.




30분이면 끝낼 수 있을 것 같던 보고서를 2시간에 걸쳐 마무리하고 막 제출하려는 순간 누군가 찾아왔다. 입사동기 J군. 지금은 우리 둘째와 같은 반 쌍둥이 친구들의 아빠이기도 하다. J군이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 내게 건넸다.

"뭐예요?"

초코바와 젤리에 이어 주머니에서 나온 투명하고 네모난 플라스틱 케이스를 받아 들며 내가 물었다.

"사원증 케이스. 인터넷에서 샀지. 하나에 800원."

"뭐야. 배송비가 더 들겠네."

"그래서 대량으로 샀지. 커피 한잔 할래?"

아직은 외로운 섬 같은 사무실로 찾아와 준 동기. 진심으로 고마웠다. 오랜만에 커피 한잔하고 싶은 마음도 당연히 있었다. 근데 내가 지금 그럴 상황이 아니야. 당장 제출할 보고서가 있직 업무도 손에 안 익어서 허둥대고 있거든. 게다가 우리 애들 나 기다리는 거 알지? 일찍 퇴근하려면 딴짓할 시간 없다? 그래서 말인데,

"커피 말고 점심 먹을까? 옆 부서 C동기랑 같이?"


여기까지만 보면 J군과 내가 각별해 보일 텐데, 절반만 맞다. 나와 정말 친한 사람은 엄밀히 말하자면 J군이 아니라 의 아내 Y언니니까. 결혼 전에는 마주쳐도 인사만 하는 게 전부였던 J군과 사적인 대화를 나눌 만큼 가까워진  다 Y언니 덕분이다.

J군과 둘이서 어색할 것 같아 C동기를 부르려던 건데 오늘 하필 선약이 있단다. 결국 J군과 단둘이 밥을 먹게 되었다. 입사 13년 만에 처음으로.

먹고 싶은 메뉴를 묻자 J군이 주저 없이 답했다.

"두끼 어때?"

오? 즉석떡볶이 전문점이다. 내가 떡볶이 좋아하는 건 또 어찌 알고. 고마운 마음이 들려던 찰나, J군이 이유를 덧붙인다.

"거기는 애들이랑 같이 있으면 못 가는 데거든."




"회사는? 적응은 좀 되고?"

산처럼 쌓아 올린 떡과 야채를 사이에 두고 J군이 묻는다.

"그럭저럭. 근데 적응 안 되는 게 하나 있네."

"뭐?"

"눈치 보이는 거."

J군이 격하게 공감하는 표정을 지었다.

"야, 그건 나도 적응 안 돼. 아직도 적응 안 돼."

"아니, 난 진짜 집중해서 일하거든요? 화장실도 참아가며 일해. 근데도 퇴근할 때면 눈치가 보여."

"나도 그렇다니까? 어쩔 수 없어."

"아침에 샤워하면서 맨날 생각한다고요. 회사 가면 뭐부터 하고 다음에 뭐 하고 빈 시간에 회의자료 내야지. 이런 생각. 그렇게 시간 쪼개서 아등바등 일하고도 나올 때면 눈치가 보인다니까?"

"예전에 같이 일하던 선배는 아침에 시간 일찍 나와서 저녁 7시까지 기계처럼 일만 했거든? 옆에서 잡담하고 밥 시켜 먹고 어수선할 때도 고개도 안 들고? 그래도 퇴근할 때는 눈치 보더라. 한잔 더 할래?"

맥주였다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사이다다. 떡볶이는 절반 이상 남았는데 사이다는 한 잔씩 둘 다 비웠다.


"근데 또 야근을 하잖아? 그럼 집에서 눈치가 보인다?"

"그렇지. 많이 보이지. Y 눈치 보이지. 애들 눈치도 보이고."

J군이 이렇게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나. 단둘이라 어색할까 했던 걱정이 무색해졌다.

"근데 있잖아. J군 주변에는 눈치 주는 사람 있어요?"

J군이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한다.

"아니? 없는 것 같은데?"

"생각해 보면 내 주변에도 딱히 눈치를 주는 사람은 없거든. 근데 왜 우리는 눈치가 보일까?"

"그건 아마도 우리나라 회사원의 숙명이 아닐까."

"야근이? 아니면 눈치 보는 게?"

"둘 다."

갑자기 슬퍼져서 떡볶이를 더 이상 먹기가 싫어졌다. (사실은 몇 점 남기고 다 먹은 후였다. 거의 3인분 양이었는데.)

"일어나요. 늦으면 눈치 보여."


점심은 내가 계산했다. 지금 당장은 돈이 없지만 며칠 후면 복직 후 첫 월급을 받을 예정이니까. 야근과 눈치보기가 회사원의 숙명이라면 월급에는 그 대가도 얼마간 포함된 걸까.

J군이 점심을 먹고는 컵 하나 들고 들어가는 게 직장인의 로망 아니냐며 음료는 자기가 사겠단다. 과일에이드를 한잔씩 받아 사무실로 향했다.




눈치를 보는 건 어떤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일까. 내가 내린 답은 이거다.


좋은 사람이고 싶은 마음.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든 개의치 않는 사람이라면 눈치를 볼 이유가 없을 테니까.

대부분의 직장인이 그러하듯 함께 일하고 싶은 동료이고 싶 마음, 내게도 있다. 엄마라면 누구나 가질 상처 주지 않고 빈틈없이 채워주고 싶은 마음, 당연히 있다. 일과 육아에 양다리를 걸친 상황 때문에 혹 아이에게는 엄마로서, 동료에게는 동료로서 부족하다는 느낌을 줄까 봐 전보다 예민하게 옆 사람의 시선을 살피는 거다.


좋은 엄마이고 싶고 동시에 좋은 동료이고 싶은 난 당분간 계속 눈치를 볼 것 같다. 최선을 다하고 싶은 소중한 것이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있어서 생기는 불가피한 마음이라고 여길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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