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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예지 Aug 17. 2021

펼치면 다른 세상이 펼쳐져

탈출구가 필요한 너에게

어제는 네 아빠와 조금 다퉜어. 퇴근 후 쌓여있는 집안일을 처리하다가 둘 다 지쳤거든. 하지만 네 아빠는 모를 거야 우리가 다퉜다는 걸. 엄마 혼자서, 마음속에서만 다퉜거든.


너를 만나고 엄마는 혼자서 다투는 날이 종종 있었단다.

네가 한 시간째 목이 쉬도록 우는 이유를 몰라 쩔쩔매면서, 방금 트림을 시켰는데 금세 돌아온 네 밥시간에 맞춰 가슴을 열고 수유를 하면서, 출산 후 마디마디가 저릿해진 손으로 네 기저귀를 갈면서, 실은 조금 힘들었거든. 매일 직장에 다니며 사람들과 소통하던 일상이 집안에만 머물며 그 누구와 말 한마디 섞지 않는 삶으로 바뀌었고, 엄마의 욕구를 따르기보다 네 필요를 채우는데 급급해서 바쁘게 움직이다 보면 문득 엄마 자신을 잃어버린 기분이 들기도 했지. 출산 후에는 호르몬이 급격하게 변하기도 해. 여러 변화가 한 번에 찾아오면서 몸과 마음이 동시에 힘들다고 느낀 거야.


어리고 한없이 약한 네게는 늘 웃는 모습만 보여줘야 했고, 그 무렵 힘든 업무를 맡아 매일 늦게까지 일하는 네 아빠에게는 짐을 더 얹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혼자 눌러 삼키다 보니 엄마 안에서 겹겹이 쌓인 감정들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상태가 되었지. 어느 날 밤 남편과 아이를 두고 집을 나왔다던 친구의 이야기가 절실하게 공감됐어.

혼자였다면 어디로든 훌쩍 떠났을 거야. 제주행 비행기표를 끊어 공항에 내려서는 택시를 잡아타고 "가까운 바다로 가주세요!" 외쳤을지도. 에메랄드빛 바다를 향해 앉아 편의점 냉장고에서 막 꺼낸 시원한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켰다면, 캬~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갑갑함이 한 번에 쏴~ 하고 내려갔겠지?

하지만 그럴 수야 있었겠니? 엄마는 혼자가 아닌데. 24시간 옆에 딱 붙어 보살펴줘야 하는 네가 있는데.


그래도 포기할 엄마가 아니지. 엄마는 제주행 비행기표 대신 다른 탈출구를 찾는데 성공했어. 네가 잠이 들 때마다 훌쩍 떠났다가 네가 깨면 금방 다시 네 옆으로 돌아올 수 있는 엄마의 탈출구. 그건 바로 '책'이었어.

너는 매일 오후 두 시간씩 규칙적으로 낮잠을 잤어. 네가 깊이 잠든 걸 확인한 엄마는 간단히 점심을 먹고, 네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잠든 네 옆에서 책을 펼쳤어. 책은 엄마를 매일 반복되는 갑갑한 현실에서 가볍게 들어 올려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살포시 내려주었단다.


오랜만에 그때의 독서기록을 살펴보니 분야도 다양해.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역사), 숨 하나 잘 쉬었을 뿐인데(건강, 의학),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소설), 걷는 사람 하정우(에세이), 판사유감(사회), 시를 잊은 그대에게(에세이), 대통령의 글쓰기(인문)......

뭐든 배워보겠다는 욕심에 인문이나 사회, 경제 분야의 책을 의식적으로 골라 읽기도 지만, 그 못지않게 에세이나 소설도 꽤 많이 읽었어. 에세이는 한 사람의 삶과 생각이 밀도 있게 담겨있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을 깊이 알아온 것 같은 착각이 들곤 해. 다른 사람들이 겪는 문제에 생각을 담갔다 현실로 돌아오면 조금 전까지 심각했던 내 문제가 별것 아닌 것이 되어있기도 하지.

소설은 말해 뭐하겠니. 그야말로 여행이지. 진짜 재미있는 소설은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도 오래 남아 메마른 감정을 촉촉하게 적셔준단다. 시간이 없고 머리가 복잡해 글을 읽는 것조차 부담된다면 청소년 소설을 추천해. 비교적 짧은 분량과 읽기 쉬운 언어로 쓰였지만 속도감 있고 흥미진진한 작품이 정말 많거든.


가까이에 도움 청할 사람 하나 없이 1년 365일을 의사소통이 되지 않던 너와 단둘이 집안에 머물면서도 산후우울증을 피해 갈 수 있었던 건, 네가 정말 귀엽고 사랑스러웠던 덕분이고, 네 아빠가 최선을 다해준 덕분이기도 하지만, 매주 한 권씩 엄마에게 다른 세상을 선물해준 '책'도 한몫을 한건 분명해.

엄마가 그 1년간 읽은 책이 약 오십 권이니 매주 한 권씩 읽은 셈이거든. 매주 새로운 세상을 여행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메시지가 엄마를 자극했겠니. 그 자극들 덕분에 무료함을 느끼지 않고 매일 조금씩 자라는 너와 함께 엄마도 성장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꼈어.


육아휴직이 끝나고 직장에 복귀한 후에는 몸이 바빠 고립감에 빠질 틈도 없지만, 여전히 잠깐의 여유가 생기면 책을 펼쳐 들어. 지난밤 네 아빠에게 서운했던 마음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준 것도 책이었단다. 책이 엄마 마음의 평화뿐 아니라 가정의 평화에도 한몫을 하고 있는 거지.(^^)

이제 엄마의 몸은 다 성장했고 학교에 다니며 새로운 걸 배울 시기도 지났지만, 책을 통해 새로운 메시지를 꾸준히 수혈받으면서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엄마는 믿어.


끝이 없을 것 같은 반복된 현실이 갑갑하다면, 책을 한번 펼쳐보렴. 그럴 여유가 생기기를 기다리지 말고, 속는 셈 치고 일단 한번 열어봐. 네 숨 쉴 틈이 되어줄 거야. 책을 통해 짧은 여행을 하고 돌아오면 현실이 달라져 있을 거야. 현실을 대하는 네 생각과 마음이 달라졌을 거거든. 한권의 책은 네 오늘을 바꾸고, 그게 쌓이면 네 인생을 바꿔줄 거야.

때로는 네가 하는 일과 전혀 상관없는 분야의 책을 읽어봐. 완전히 다른 감각들이 살아나 지금 네가 하는 일에 도움을 줄지도 몰라.


너는 매일 밤 침대에 누워 책을 읽어달라고 조른단다. 아기호랑이가 주인공인 책을 너는 좋아해. 같은 책을 읽고 또 읽으면서도 지루해하지도 않더라. 세 살의 너는 밥을 먹으면서도 책, 새벽에 갑자기 깨서도 책을 찾아.

지금처럼 앞으로도 즐거움과 깨달음, 때로는 네가 직면한 문제의 해결책을 얻는 도구로 책을 가까이 두고 지냈으면 좋겠다.






I've never known any trouble that an hour's reading didn't assuage.

한 시간 독서로 누그러지지 않은 걱정은 결코 없다.

- 프랑스 사상가 샤를 드 스공다(Charles De Second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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