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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예지 Aug 27. 2021

아무 일도 없는 날의 가치

보통날을 살아가는 너에게

사흘 전 엄마는 지옥을 맛보았어. 다른 건 몰라도 멘탈 하나는 강하다는 말을 듣는 엄마인데, 그날은 사원증에다 가방까지 잃어버릴 정도로 멘탈이 완전히 나가버렸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어린이집에서 너를 데리고 건물을 빠져나오는 길이었어. 기분이 좋은 너는 혼자 저만치 앞서 나가고 임신 8개월을 앞둔 엄마는 뒤뚱거리며 너를 따르는데, 양옆으로 열리는 미닫이형 출입문 앞에서 갑자기 네가 악 소리를 지르며 울기 시작한 거야. 네 손가락 두 개가 문과 문설주 사이에 끼여버린 거였어. 너는 울면서 손을 빼내려고 마구 흔들어대고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네 손을 붙들고 "괜찮아, 괜찮아"만 연발하고 주변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어.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뾰족한 해결책을 가진 사람은 없었고, 119를 부를까 불러도 올 때까지 어떻게 기다리나 막막해하는 사이 다행히도 손가락이 빠졌어. 아, 그 순간을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엄마는 표정이 일그러진다.

살갗이 벗겨져 피가 흥건하게 묻어 나온 너를 안고 네 아빠를 불러 응급실로 갔어. 우리는 네 손가락 뼈가 다쳤을까 봐 애가 타 죽겠는데 별일 아닌 듯 태연하게 굴던 응급실 직원들이 얼마나 밉던지. (잠시 후 구급차에 실려오는 환자들을 보고는 그들이 태연해 보였던 이유가 이해되더구나.) 엑스레이 촬영 결과 다행히 뼈에는 이상이 없었어. 악을 쓰며 우는 너를 붙들고 간신히 소독을 마친 후에 집으로 왔단다.


뼈에는 이상이 없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날 밤 엄마는 쉽사리 잠들 수가 없었어. 의사가 제대로 본  맞는지, 행여나 성장판이라도 다친 건 아닌지, 걱정이 끊이질 않는 거야. 출입문을 통과할 때 네 손을 꼭 붙잡고 있었어야 했는데, 네 손이 낀 걸 알았을 때 너만 붙들고 있을게 아니라 문을 부숴서라도 더 빨리 꺼냈어야 했는데,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거야. 다음날까지 붓기가 없고 네가 다친 손으로 과자를 집어먹을 정도로 통증을 잊은 걸 보고서야 마음이 놓였어.

그날 이후 엄마와 아빠는 번갈아 휴가를 내고 너와 함께 집에 머물고 있어. 어린이집에 못 갈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어서는 아냐. 단지 네가 많이 놀랐고 무엇보다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우리가 다친 네게 평소보다 더 관심을 쏟자 너무 신나 하는 걸 보니 짠한 마음도 들고.

너와 함께 시작한 오늘 아침, 우리 둘은 아홉 시쯤 기분 좋게 일어났어. 시리얼을 한 그릇씩 비우고 햇빛이 절반쯤 들어앉은 네 놀이방에 마주 앉았지. 거미와 사과가 나오는 책을 보고, 동물 인형들에게 네가 만든 요리를 먹여주고,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며 놀았어. 점심으로는 칼국수를 만들었는데 네가 보채서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면이 까맣게 타버린 거야.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끓였는데, 엄청 맛이 없었어. 네 아빠 말대로 그냥 시켜먹을 걸 그랬나 봐. 조금 전 너는 낮잠이 들었고 나는 컴퓨터를 켰어. 집은 엉망이고 칼국수도 최악이었지만, 엄마는 지금 이 순간이 정말 행복하단다. 매일이 오늘 같기를 기도해.



아무 일 없는 보통날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엄마는 매번 어떤 일이 일어난 후에야 깨달아. 아프고 나서야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고, 잃고 나서야 그것의 필요성을 깨닫지. 아무 일이 없는 똑같은 일상 가운데 던져진 불행 하나가 경계석이 되어 그 전이 얼마나 행복했었는지를 뒤늦게서야 는 거야. 그게 행복인 줄 모르고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느라 욕심을 부린 지난 시간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이번에도 그랬어. 사고를 겪고, 그 사고가 빚어낼 최악의 상황까지 상상한 후에야 비로소 당연한 줄로만 알았던 일상에 새삼 감사하게 된 거야. 너와 마주 앉아 별것 아닌 일에 소리 내어 웃고 자두 한 접시를 서로 경쟁하듯 나눠 먹고 주말에는 뭘 할지 고민하는 이 시간이야말로 진짜 행복이라는 걸 알게 된 거야.

우리 일생 중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날이 얼마나 되겠니? 평범한 사람이라면 아마 대부분의 날이 특별히 좋은 일도 특별히 나쁜 일도 없는 보통날일 거야. 그렇다면 우리 일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보통날의 행복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긴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 아닐까?

우리 행복하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오늘, 지금, 여기에서 행복해지자.


37세의 젊은 나이에 뇌졸중을 겪고 8년 만에 회복한 '질 볼트 테일러'라는 뇌과학자가 있어. 그녀가 뇌졸중을 겪고 회복한 일련의 과정과 통찰을 다룬 책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삶 가운데서도 행복에 접속하는 방법이 소개된단다.

그녀에 따르면 깊은 평화와 행복은 오른쪽 뇌의 신경회로에 존재하는데,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접속할 수 있대. 방법도 간단해. '지금 이 순간'에 기꺼이 몰입하면 된대. 먹고 있는 음식의 맛에 집중하고, 주위의 냄새에 의식적으로 주목하고, 넓게 펼쳐진 풍경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거야. 귀 기울여 먼 곳의 소리까지 유심히 들어보고 피부에 느껴지는 자극에 몰입하다 보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고 해.

그녀의 주장에서 과학적인 근거를 배제하더라도 매 순간의 감각에 집중하다 보면 다른 날과 똑같은 하루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평범하게 흘러가는 보통날에도 저마다 다른 맛과 색깔과 소리가 있지 않겠니. 그 특별한 선물들을 흘려보내지 않고 충분히 누리며 감사한다면 우리 인생에 의미 없이 흐르는 날은 하루도 없을 거야.


수많은 날들 중 평범한 하루 같은 보통 사람에 불과한 엄마는, 시간이 흐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오늘이 얼마나 행복한 날이었는지를 잊고 또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겠다고 욕심을 부릴지 몰라. 하지만 이미 지나버린 시간에서 발견하는 행복은 무의미하고 오늘의 행복을 가장 밀도 있게 느낄 수 있는 건 바로 오늘이니까, 훗날은 훗날의 일로 미뤄두더라도 일단 오늘만큼은 너와의 매 순간을 흠뻑 음미해보려 해.

너도 그러길 바라. 오늘이 행복하다는 걸 깨닫는 때가 시간이 흐른 어느 날이 아니라 바로 오늘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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