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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예지 Sep 30. 2021

이제 그만 그를 내쫓자

누군가가 죽도록 미운 너에게

몇 년 전 'OO의 뇌구조'라는 이름이 붙은 그림이 유행이었어. 머릿속 뇌 모양을 마치 여러 개의 방으로 구분된 것처럼 나누고 관심사를 하나씩 그려 넣은 그림이야. 가장 많이 생각하고 마음을 쏟는 대상이 가장 커다란 영역으로 그려지지. 누군가와 막 사랑을 시작한 사람의 뇌구조에서는 단연 사랑의 상대방이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해. 막 사랑에 빠진 사람은 다른 무엇보다 상대방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할 테니까.

그런데 실제로 생각과 마음의 상당 부분을 앗아가는 것에 꼭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만 있지는 않더라. 때때로 우리는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필요 이상으로 생각과 마음을 쏟지. 사랑과 마찬가지로 미움도 꽤 집요한 감정이라 뇌구조의 다른 영역까지 침범할 만큼 통제하기 어려울 때도 있어.


모든 일이 마음먹은 대로만 된다면 좋겠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잖아.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야. 내가 좋아하고 나와 맞는 사람들만 만나며 살 수는 없지. 마음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며 달라지는 사람도 있고, 서로 도저히 맞춰질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안 보고 살 수 없는 관계도 있어.

가족도 그래. 평행선을 걷고 있는 것처럼 서로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평생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가족은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관계잖아. 직장동료나 오랜 친구도 마찬가지. 우리 선택으로 시작된 것이 아닌 관계에서는 힘들다고 뾰족한 해결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지. 그게 또한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 이유이고.


이렇듯 피할 수 없는 관계망 속에서 '미움'은 당연히 생길 수 있는 감정이야. 미움에 대해 다룬 책 '사람을 미워한다는 것'의 저자인 일본의 철학자 나카지마 요시미치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당연하듯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감정이라고 이야기해. 사람을 좋아해야 하고 결코 미워해서 안 된다고 하는 건, 먹는 건 좋지만 절대 배설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일이라면서.

우리가 관계 맺는 인간인 이상, 누군가를 미워하는 건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일이지.


'미움'이라는 감정을 두고 어느 목사님께 들은 설교말씀이 기억 나. 태어날 때부터 나쁜 사람은 없으니 그 사람이 왜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를 상상하며 이해하고, 또 모든 사람에게는 끝이 있으니 그 끝을 생각하며 안쓰러운 마음을 품고 사랑으로 감싸주라는 내용이었어.

좋은 말씀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엄마는 네게 미워하는 사람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권하고 싶지는 않구나. 네가 누구를 미워하게 됐다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거든. 미움이라는 감정을 그 반대편에 존재하는 이해와 사랑, 용서로 바꾸기까지 네가 쓰게 될 마음이 엄마는 너무 안쓰러워.


하지만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크다는 건, 그 사람이 네 마음에서 차지하는 공간이 많다는 거겠지.

한번 물어보자. 네 공간을 그만큼 내어줄 정도로 그는 네게 중요한 사람이니?

누군가를 미워하는 건 너를 너무 힘들게 하는 일이야. 그 사람이 네게 한 말과 행동을 떠올리며 이를 가는 순간에도 그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을 거거든. 너만 손해야.

마음을 방이라고 생각해봐. 소중한 것만 들이고 싶은 네 방에 불청객이 들어왔어. 그 불청객이 시종일관 날카로운 소음을 만들어내면서 자꾸 네 심기를 건드리는 거야. 너는 불청객의 행동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되지. 그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화가 나고, 그 사람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예민해지고, 떠올리면 속이 상해.

좋은 것만 들이기에도 아까운 네 방에 그 사람을 계속 머무르게 할 필요가 있을까?


이제 그만 그를 내보내자.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선을 긋고 그 사람이 더 이상 네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네 머리와 마음에서 그 사람을 내쫓자.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자.

그 사람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대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하라는 말이 아니야. 그냥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내봐. 감정을 걷어내고 서로의 용건에만 충실하는 거지. 상대방이 네게 미움의 원인을 제공할 기회를 더 이상 주지 말고 너 또한 상대방에게 아까운 네 마음을 내어주지 않는 거야.

잠자리에 누워서도 문득 그 사람이 떠올라 괴롭다면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된 이유를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도 좋아. 그 이유가 상대방에게 있다면 분명 너 아닌 누군가로부터도 그는 미움을 받고 있을 거야. 미움이라는 감정이 상대방을 힘들게 할 수 있다면 네가 미워하지 않아도 그는 충분히 힘들 거고. 미움에 그럴 힘조차 없다면 얼른 털어내는 편이 좋겠지.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


미움에 대한 글을 쓰면서 엄마가 누군가를 미워했던 기억들을 떠올려봤어. 너도 한번 해볼래? 지금껏 살면서 네가 미워했던 사람들을 기억 속에서 불러내 봐. 어떠니? 엄마는 말이지. 살아오는 동안 누군가가 미워서 잠 못 들고 이를 갈던 순간들이 있었던 게 분명한데도 지금에 와서는 그 대상이 누구였는지, 혹은 어떤 이유로 미워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나는 거야. 미움이라는 감정이 시간이 지나며 이렇게 옅어지는 것인 줄 당시에도 알았다면 그만큼 마음을 쓰지도 않았을 거야.

사라질 감정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지 말자. 좋은 생각만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만 담으며 살기에도 벅찬 우리 삶이잖니.






다른 인간을 증오하는 대가는 자신을 더 적게 사랑하는 것이다

- 앨드리지 클리버(Eldridge Cleaver, 흑인운동단체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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