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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예지 Oct 07. 2021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면

기다림에 지쳐가는 너에게

네 동생이 태어나기까지 이제 40여 일이 남았어. 엄마는 2주에 한 번씩 병원에 다니고 있단다. 2주에 한 번이 1주에 한 번으로 바뀌고, 그러다 어느 날 진통이 오고, 네 동생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겠지.

이제는 누가 보더라도 만삭의 임산부지만, 임신 초기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변화가 없어 말하지 않으면 남들은 임신 사실을 알 수 없었어. 그 무렵 산부인과 정기검진을 가서 대기실에 머무를 때면 엄마는 가방 속에서 산모수첩을 꺼내기가 주저되더구나. 널 갖기 전, 널 애타게 기다리던 엄마가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는 것만 같았거든.


아이를 갖기로 마음먹고도 한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아 마음 졸이던 우리는 시에서 지원하는 난임진단검진을 받으러 병원을 찾았어. 뉴스에서는 매해 출산율이 최저치를 갱신했다고 하는데 세상에나, 산부인과 대기실에는 어쩜 그리 사람이 많던지. 아무렇지 않은 척 앉아있었지만 눈은 계속 진료실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쫓고 있었어. 이제 와 생각해보면 엄마와 같은 입장인 사람들도 있었을 텐데, 그때는 모두가 임산부처럼 보였거든. 그녀들의 배에 자꾸만 눈이 갔어. 그 공간의 모든 여자들이 품은 아이가 내게만 없다고 생각하자 주눅이 들기도 했지.

그중 가장 부러운 사람은 막 임신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보이는 부부였어. 한 손에는 아기집이 담긴 초음파 사진을, 다른 한 손에는 따끈따끈한 이름이 갓 적힌 산모수첩을 받아 든 여자의 설레는 표정은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지.


우리는 노력만큼 결과가 따라주는 것에 익숙했거든. 공부를 열심히 하면 더 좋은 학교에 갈 수 있고, 운동을 열심히 하면 건강해질 수 있고, 정성과 진심을 다하면 상대방과 가까워질 수 있는 것처럼 말이야. 임신이라는 것도 처음에는 쉽게 생각했어. 결혼을 하고 관계를 맺으면 당연히 되는 것인 줄 알았지. 그런데 아이를 갖는 건 당연히 되는 게 아닐뿐더러 노력을 더한다고 거기에 비례해 결과가 따라주는 게 아니더라구.

임신을 준비하며 엄마는 술도 끊고 난생처음 요가학원에 등록해 운동도 시작했단 말이야. 인터넷에서 수집한 각종 '임신 잘 되는 법'을 끌어다 적용해보기도 했어. 한 달에 한번, 임신 여부를 확인하는 그날이 가까워지면 조바심에 사로잡혀있다가 그 조바심이 실망으로 변하는 경험을 반복했지. 그러다 마침내 찾아간 병원에서는 두 사람 모두 임신을 하는데 문제가 없다는 진단을 받았어. 다행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막막했어. 문제가 있다면 고치기라도 할 텐데 문제도 없다면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하고 말이야.


그 후로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네가 와 주었어. 테스트기의 빨간 두줄로 우리 인생에 문을 두드린 첫 순간부터 너는 어마어마한 행운이었지. 네가 우리에게 안겨줄 무한한 기쁨을 미처 몰랐던 그때도 우리는 네 존재에 '행운'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었어. 수차례 실패를 경험하고 마침내 한 번의 희박한 확률로 찾아온 너였으니까. 너만은 우리가 가진 다른 것들처럼 노력이나 수고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정말이지 엄청난 행운과 축복이 따라주어 얻은 선물이었으니까.

세상에는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있잖니. 생명을 얻는 것도 거기에 속한 일이라고 생각해. 의술이 꾸준히 발달하고 있음에도 아이를 가지는 것이 여전히 축복이고 행운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사람의 힘을 넘어선 영역이기 때문이지.


그걸 몰랐던 엄마는, 임신이 되지 않는 이유를 스스로에게서 찾으려 했어. 더 빨리 결혼하지 않아서, 잦은 피임을 해서, 콜라를 많이 마셔서,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아서, 운동이 부족해서 임신이 되지 않는 것 같았지. 어쩌면 엄마가 모르는 타고난 건강상의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남들에게 임신이 별로 간절하지 않은 사람처럼 굴었던 것도, 바우처를 받기 위해 찾아간 시청에서 주눅 들어 보이지 않으려 한 것도, 따지고 보면 엄마 자신에게서 이유를 찾으려 했기 때문이었어. 기다림이 지속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자존감이 조금씩 고갈되고 있었던 거야.

사실은 그게 아니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임신이 되는 게 아니듯 특별한 이유가 없이도 임신이 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이었는데 말이야.


아이를 기다리며 지쳐가던 과거의 엄마를 마주한다면, 잘 될 거라는 막연한 희망을 주는 대신 이런 말을 주고 싶어. 게서 이유를 찾으려 하지 말라고. 그건 네 탓이 아니라고. 결과가 네 노력 여하에 달려있다는 부담을 조금만 내려놓으라고.

그리고 또 하나. 머지않은 미래에 기다림의 끝이 있다면 좋겠지만, 혹 그렇지 않더라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고. 그러니 마음을 편하게 먹으라고.


혹시 네가 애타는 기다림의 주인공이라면, 너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엄마는 이뤘잖아. 엄마에게 따라준 행운이 왜 내게는 없는데? 내 탓도 아니라면서 너무 불공평하잖아.

하지만 사람 일은 몰라. 우리 앞에 놓일 수많은 일들이 지금까지 흘러왔던 것과 같은 방향으로만 흘러갈 거라고 어느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나이를 먹을수록 엄마는 노력에 비례하지 않는 일, 원인이 없는 결과를 더 자주 경험해. 긴 기다림 끝에 아이를 가졌지만 아이의 건강상태나 발달 문제로 다시 한없는 기다림을 경험하는 사람도 있고, 어려움 없이 아이를 낳았지만 그와는 전혀 다른 문제에 봉착해 긴 시간을 기다림에 소비하는 사람도 있어. 그러니 억울해말고 마음에 여유를 갖자.


만약 네가 우리 부부에게 끝내 와주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가끔 상상해본단다. 더 큰 병원을 찾아다니며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을 수도 있겠고, 어쩌면 방향을 틀어 플랜 B의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이와 함께하는 삶이 행복인 건 분명하지만, 아이가 없는 삶이 행복하지 않은 건 또 아니니까. 가고자 했던 그 길의 반대편에서 행복해질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았거나 혹은 여전히 찾고 있지 않을까.


네가 간절히 기다리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네게 오기를 기도해.

하지만 긴 기다림의 결과가 어떻든 네가 변함없이 행복하기를,

엄마는  간절히 기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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