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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맠크나 Sep 15. 2020

흐릿한 사진 한 장

30살의 영국, 흐릿한 사진과 사사로운 풍경, 나를 행복하게 할 이야기


나만 알아보는 흐릿한 사진


"2020년 8월 10일 밤, 지난 일 년 가장 가깝게 지냈던 베트남, 일본, 중국 세 친구들과 함께 한 첫 여행이었다.

우리는 리버풀 여행에 신나 온종일 비틀즈 노래를 예습했지만, 코로나 19 때문에 정작 그 어떤 리버풀의 라이브 뮤직바도 가볼 수 없었다.

그렇게 길거리에서 한 시간을 허비하고, 결국 비틀즈 동상 주변 머지 강 강변에 걸터앉아 캔맥주를 마셨다. 낯선 도시의 어두운 강변이 조금은 무서웠지만, 친구들과 건배하며 지난 일 년을 곱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우리는 재빠르게 내달렸고, 골목 가게들 처마 사이로 비를 피해 숙소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마주한 낯선 도시, 리버풀에서의 밤. 특별할 것 없던 머지 강 풍경과 친구들과 함께하며 들떴던 그 마음이 기억난다."


리버풀 머지 강(Mersey)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게 서울 한강변인지, 리버풀 머지 강변이지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친구의 흐릿한 사진이 맘에 들어 보내달라고 졸랐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사진 한 장이건만, 그 안에는 아주 개인적이고 사소한 이야기들이 이렇게나 많이 담겨있다. 그리고 글에 담기지 않는 온도와 습도 그리고 내음까지도. 그러나 흐릿한 사진 한 장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꺼내어 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일 것이다. 


내 영국 유학생활 또한 이렇게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모두에게 내보일 수 있는 전리품을 가져올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결국 남들에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흐릿한 사진 한 장이 되어버릴까 두려운 마음이다.

 



나만의 사사로운 풍경


논문을 쓰느라 종일 바라본 모니터 불빛에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문을 나선다. 해 질 녘 갈매기 울음소리, 뺨을 스치는 강바람, 살랑이는 나뭇잎, 발밑으로 느껴지는 단단한 돌길.


1930년에 태어나 2013년에 돌아가셨다는 던컨(Duncan)씨의 이름이 새겨진 벤치에 앉아 캔맥주를 연다. 나도 이렇게 이 세상 어딘가에 흔적을 남길 수 있을까.



일요일 저녁 홀로 문을 연 자그마한 펍에서는 잔잔한 포크 음악이 흘러나온다. 낡았지만 따뜻한 전구색 가로등 불빛에 기대어 고개를 천천히 돌려 풍경을 눈에 담는다. 아주 오랫동안 그리워할 사사로운 풍경을 눈에 담는다.


아. 나는 아직 브리스톨에 있지만. 벌써 이 곳이 그립다. 디 고운 단어만을 골라 이 곳을 기록하고 싶다.


외할머니가 사주신 과자 속 야광스티커로 빛나던 해방촌 다락방 천장처럼.


갓 전역한 치기 어린 열정에 반바지와 운동화 차림으로 올라선 안나푸르나 산맥에서 바라본 일출처럼.


이제는 폐선이 돼버렸지만, 수많은 시간을 오가며 함께 했던 8407번 버스의 김서린 차창처럼.




나를 행복하게  줄 이야기들


퇴사 후 영국 유학을 떠나던 나는 다짐했다.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이야기가 많은 사람이 되자. 유학의 끝에 어떤 결말이 있을지언정, 나는 일 년 사이에 수많은 이야기를 가졌으리라. 그렇게 훗날 자식이 유학을 가기를 바라는 아버지가 아니라, 유학시절을 멋지게 이야기할 수 있는 아버지가 되리라.


그리고 지금, 유학생활의 끄트머리에서 남들이 알아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나를 잡아 이끈다. 멋지게 다짐하며 떠났것만, 다시 돌아온 방 안에는 커다란 부담과 불안감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글을 썼다. 나만 알아볼 수 있는 흐릿한 사진과 나만 알고 있는 사사로운 풍경들에 대해서.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 불안했지만, 한편으로 나만 알고 있어 소중한 이야기들에 대해서.


나를 오래오래 행복하게 해 줄 이야기가 다른 사람에게도 울림 있는 글이 되리라 믿는다. 그렇게 이야기의 힘을 빌어 두려움에서 한 발짝 나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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