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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Nov 21. 2024

綢繆

綢繆


拙詩不調則 (졸시부조칙) 내 시가 법칙에 어울리지 않아도,

不絶吾無慙 (부절오무참) 나는 뻔뻔하여 멈추지 않으리.

縱浪娑婆中*(종랑사파중) 세상 험한 파도 속에서,

彼葉彰跌蕩 (피엽창질탕) 저 잎 거리낌 없이 드러내듯이.


2024년 11월 21일. 점심을 먹고 오늘은 학교 주변 가을 풍경을 천천히 둘러보며 생각을 정리해 본다. 며칠 전 나의 졸 시를 두고 ‘운보’와 ‘평측’을 논하시던 분이 있었다. 한문을 잘하시는 분이니 엉터리 나의 한시가 한눈에 들어왔고 몹시 거슬렸을 것이다. 본인 스스로는 ‘누견陋見’이라 낮추셨지만 나는 ‘고견高見’으로 엎드려 수용하였다. 거듭 그 어른께 고개 숙인다.


하지만 ‘운보’와 ‘평측’을 맞춰 시를 쓰려면 예사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즉흥을 방해하는 요소가 틀림없다. 나의 졸시는 거의 즉흥이다. 그것을 ‘운보’와 ‘평측’에 맞추기 위해 노력하면 그 순간의 생각이 상당 부분 날아가 버린다. 그래서 최소한에 해당하는 각운만 맞춘다. 물론 내가 ‘운보’와 ‘평측’을 완전히 달통하여 즉흥시를 지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 경지는 이번 생에서는 어렵고 또 다가갈 생각도 없다. 결정적으로 내 시는 내가 남기는 지극히 사적 기록이니 시적 의경이 없어도 그만이다. 해마다 나의 시를 드리는 분들은 내가 딱 이 정도인 줄 모두 잘 알고 계신다. 뿐만 아니라 내 시를 드러내어 타인에게 나의 생각을 강요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물론 공식적인 책으로 펴 낼 생각은 언감생심이다. 그러니 ‘운보’나 ‘평측’을 맞추는 것을 소홀하게 생각한다. 구차한 변명이다.


학교 주변은 이미 가을이 마지막이다. 단풍잎이 참 예쁘다. 각각의 색이 저리 오묘할 수 있을까? 제목으로 쓴 ‘주무綢繆’는 글자 그대로 하면 ‘이리저리 얽혀 있는 모양’을 말한다. 하지만 『장자』에서는 ‘일체를 두루 다함’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좀 더 의역하면 ‘세상의 이치’를 말한다. 『장자』 則陽에 있는 “聖人 達綢繆”에서 그런 의미로 쓰인다.


* 도잠의 시에서 차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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