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감 학교 방문과 교직원 명찰 패용
1. 권위주의
권위주의(Authoritarianism)에서 권위(權威, 영어: Authority)는 일반적으로 국가가 가지는 공인된 능력이나 신뢰를 가리키거나 또는 특정 분야의 학문이나 명성에 대한 신뢰와 그에 따르는 힘을 의미한다. 한편으로 권위는 대상의 가치 우위성을 공인할 뿐만 아니라 그 영향력의 행사에 있어 담보되는 능력이나 위신을 뜻하기도 한다.
이러한 권위에 기초한 권위주의는 그 권위로부터 나오는 신뢰와 능력에 어떤 의혹도 가지지 않으며 동시에 그 힘에 대하여 반항 또는 저항하는 모든 행위를 권위에 대한 모독이나 범죄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 또는 행동양식을 말한다. 이러한 사고의 바탕에는 권위에 맹목적으로 의지하여 해결하려는 생각이 있고 자신보다 상위의 권위에는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반면, 하위의 것에 대해서는 더욱 강압적 폭압적으로 행동하려는 심리적 태도나 사상을 기초로 한다.
이 땅에서 권위주의라는 말이 떠돌기 시작한 것은 정치적으로 국한하여 본다면 아마도 3당 합당 이후의 일일 것이다. 당시 노태우와 김종필, 그리고 김영삼에 이루어진 3당 합당으로 우리 민주주의 역사는 엄청난 혼돈에 빠지고 만다. 민주를 위해 싸워왔던 사람들이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 세력과 손을 잡았으니 이들에게 다가온 것은 심각한 정체성 혼란이었다.
같이 합당한 군사독재 세력을 있는 그대로 군사독재 세력이라고 부를 수는 없고 도대체 부를 말이 없으니 당시의 친 정부 언론들이 끌어온 단어가 ‘과거 권위주의 정부’라는 단어였다. 어쨌거나 그 후 이 용어는 정치 경제 교육 전 분야에 넓게 활용되면서 국민들의 머릿속에서 ‘군부 독재’ 혹은 ‘군사 독재’라는 말을 희석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2. 명찰, 명패
내가 존경하는 교장 선생님이 한 분 계신다. 그 분과 나는 교장 발령을 같이 받았다. 발령 당시 내가 그분께 교장실 명패 이야기를 했더니 그 교장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교장실에 있는 사람이 교장이다. 학교 누리집, 그리고 개인적인 명함에 내 이름 석자가 딱 나와 있는데 교장실 책상에 거창한 명패가 왜 필요한가?” 감동적인 말씀이었다. 물론 나는 4년 임기가 제한되어 있는 공모교장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명패 따위는 생각도 없었지만, 이 교장 선생님은 퇴직 시까지 7년이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씀이 감동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70년 대에 중학교에 입학했다. 당시는 검은색 교복에 모자, 그리고 각종의 부착물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명찰, 학교 배지, 학년 배지, 학교 마크가 있는 금장 단추 등을 규정에 맞춰 달고 학교에 등교를 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우리는 교복에 더하여 교련복을 입었고 마치 군인들처럼 온갖 부착물을 달아야 했고 그중 하나라도 없으면 등교 시에 학교 정문에서부터 엄청난 폭력에 시달렸다. 그렇게 중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 시절이 바로 박정희 군부 독재 시절이었다. 전두환 독재 시절에 군대를 다녀왔으니 군부 독재는 나의 10대와 20대를 관통하는 정치체제였다.
명찰은 그 용도가 매우 분명하다. 즉 상급자가 하급자의 이름을 확인하려는 것이 가장 기초적인 역할이다. 즉 물어보지 않아도 하급자의 이름을 알 수 있는 편리한 물건이 명찰이다. 사실 교장실에 명패가 있는 것도 학교에 찾아오는 민원인의 편리를 위해 출발하였을 것인데 어쩌다 보니 그것을 장식하여 이상하게 변질되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명찰을 패용하는 것도 같은 원리인데 이제는 그 조차도 인권 보호의 측면에서 제한하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보다 민주주의가 정치 사회적 제도로 더 빨리 정착한 국가에서는 이미 학교에서 교복을 입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명찰은 교복이 없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교복이 건재하다. 일본의 군국주의가 남겨 놓은 강력한 유물이다. 한 때 교복 자율화를 시도한 적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아직도 교복은 특정 학교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대부분의 중고등학교가 유지하고 있다. 지금도 교복에 달리는 몇 되지 않는 패용물 중 하나가 명찰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명찰은 상하 관계에서 그리고 집단, 권위, 체제, 계열, 소속을 밝히는 중요한 매개체다. 그것을 패용한다는 것은 내가 누구임을, 그리고 어디 소속임을 통상 윗사람에게 자발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군복에서 명찰이 전형적이다.
각급 행정기관에서 명찰을 패용하는 것은 대민 업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교는 성격상 대민 기관이 아닌 아이들을 가르치는 장소다. 민원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학교에서 교사의 핵심 업무는 아이들을 향한 교육활동이다. 그래서 우리는 명찰을 패용하지 않는다. 한 때(군부 독재 시절 이후에도) 교사들에게 교사복을 강요한 적도 있고 명찰을 패용하라고 공문으로 지시한 적도 있다. 그 권위주의의 유산을 몰아내고 우리는 진보적 색채의 혁신 교육을 시작한 지 10년이 지났다. 경남 교육감은 그 진보적 정책을 확산하겠다며 3선의 고지를 이미 넘겼다.
어제 우리 학교에 오시는 교육감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시는 선생님들(교감 포함, 교장은 확인하지 못했음)의 가슴에는 평소 전혀 볼 수 없었던 명찰이 달려 있었다. 진보적 교육정책을 펴면서 진보 교육감이라고 표방하는 우리 교육감을 위해 학교에서 그저 과잉 충성을 한 것인지 아니면 암묵적으로 명찰을 달아야 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명찰을 다는 순간 위계 관계와 상명하복의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 그리고 진보적 교육관과는 거리가 먼, 지독한 권위주의의 산물이라는 것을 간과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