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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시간(마지막)

by 김준식

존재와 시간(마지막)


* 드디어 마지막에 왔지만 황망하기만 하다. 존재와 시간은 더욱 아득하기만 하다.


2) 세계-내-존재의 시간성과 세계의 초월


지금까지 서술을 통해 우리는 세계-내-존재의 시간성을 확인하였다. 마침내 우리는 세계의 시간성을 살펴보아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세계의 시간성 고찰을 위해서는 현존재가 만나는 가용적 존재자와 ‘둘러 보면서 관계 맺는’[1]시간성에 대해 검토해 보아야 한다. 하이데거는 이 지점에서 그 ‘둘러 보면서 관계 맺음’을 학문적 탐구의 가능성으로 탐색하려 한다.


탐색의 과정에서 생겨난 하이데거의 의문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된다. 세계와 같은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세계는 어떤 의미로 있는가? 세계는 무엇을 어떻게 초월하는가? 세계내부의 존재자가 어떻게 초월하는 세계와 함께 연관되는가?[2]그 대안으로 하이데거는 다음 세 가지를 고찰하려 한다.


(1) 둘러보는 배려의 시간성


여기서는 적소성[3]의 문제를 다루는데 적소케 함에서 ‘어디에’는 ‘무엇을 위해’ 라는 성격을 가진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을 위해’인데 이것은 ‘어디에’를 위한 장래의 시간적 구조를 가지게 된다. 이를테면(망치를 예로 들어) ‘무엇을 위해’를 ‘못을 박기 위해’로 본다면 ‘어디에’는 그 못이 필요한 곳이 되는데 ‘무엇을 위해’라는 단서는 ‘어디에’와 연결되어 장래를 향하는 시간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2) 둘러보는 배려가 세계내부적인 눈 앞의 것의 이론적인 인식으로 모습을 바꾸게 되는 시간적 의미


하이데거는 비현존재적 존재자를 전재자와 가용적 존재자로 구분한다. 현존재가 일차적으로 만나는 것은 가용적 존재자이다. 이 상황에서 이론적 인식, 즉 학문 연구는 현존재의 존재 방식의 하나이다. 이 때 학문 연구는 존재자를 가용적 존재자로 대하지 않고 주관성의 배제라는 태도 탓에 전재자로 취급한다. 여기에서 문제는 현존재가 이론적 인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실존론적 조건들은 (현존재의 인식의 틀 속에서)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세 가지로 구분되는데 첫째 가용적 존재자에 대한 둘러보는 배려의 연구와 그 시간성 문제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개념이 고찰과 전망이다. 고찰이란 ‘~이면 ~이다.’로 표현되는데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숙고하는 태도이며 이를 통해 장래를 전망하고 그것을 다시 현재화 시키는 것이다.


둘째 둘러보는 배려가 학문으로 변화할 수 있는가? 이다. 하이데거는 망치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4]예컨대 '

이 망치는 무겁다'는 말은 두 방면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망치는 가볍지 않다'. '이 망치를 쥐는 데는 힘이 든다', '조작하기가 어려우므로 다른 망치로 바꿔야겠다' 등 실존론적 (배려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다른 또 하나의 방면은 '이 망치는 중량이라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받침대에 압력을 가하고 있어서 받침대를 제거하면 낙하한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망치를 질량적 존재자로 보는 것은, 그것을 작업도구로서가 아니라 중량의 법칙 하에 있는 존재자로서 주목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용적 존재자(망치)를 전재자(환경세계)로 새로이 인식하는 것이다.


이때 존재이해에 전환이 일어난다. 망치를 가용적 존재자로 이해할 때의 적소성으로서의 '자리'(망치가 놓여 있는 자리)는 이제 '시공時空’상의 위치가 되고, 다른 점과 비교해서 아무런 특성도 없는 세계의 점(世界의 点, Weltpunkt)[5]이 된다. 이것은 가용적 존재자의 자리 다양성이 순수한 위치(전재자)의 다양성으로 바뀔 뿐 아니라, 환경세계의 존재자는 모조리 한계를 잃게 된다. 여기에서는 적소성의 의미는 사라지고 만다

.


셋째 전재자에 대한 학문 연구의 시간성 문제이다. 전재자의 연구를 선도하는 것은 특히 수학적 물리학이다. 이것은 자연을 수학적으로 기획 투사하는 것이다. 이 과학적 기투 행위의 전체, 즉 존재이해를 항목화하여 그로부터 인도되는 영역의 획정 및 존재자에 적합한 기투 행위를 ‘주제화’라 부르고 동시에 ‘객관화’라고 한다. 이 두 성질의 기초는 현재화에 있을 수 밖에 없다. 즉 과학의 발견작용은 현재 환경세계에 존재하는 전재자의 피발견성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3) 세계의 초월의 시간적 문제


⒜ 세계의 초월


가용적 존재자에 대한 현사실적 배려나 전재자에 대한 인식적 주제화 등은 이미 세계라는 개념을 를 전재하고 있다. 현존재는 선험적으로 존재이해를 가지고 있다. 즉 현존재는 세계에 대하여 열려 밝혀져 있다. ‘현존재에게는 세계가 열려 밝혀져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현존재가 본질적으로 세계-내-존재로서 실존한다면, 세계는 현존재의 현사실적 실존과 함께 열려 밝혀지는 것이다.[6]


‘현(Da)’의 열려 밝혀져 있음 속에는 세계도 함께 열려 밝혀져 있는 것이다. ‘세계 내부적 존재자가 세계를 근거로 해서 만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세계는 이미 탈자적[7]으로 열려 밝혀져 있지 않으면 안 된다.[8] 다시 말하면, 세계는 존재자를 만날 수 있기 위해 선행적으로 개시되어 있는 기반이다. 하여 세계는 초월적[9]이다. 즉 현존재가 없는 세계도 없고, 세계 없는 현존재도 없다.[10]


⒝ 세계의 시간성

현존재는 피투적 존재로서 현실적으로 자기 자신을 궁극목적으로 해서 실존한다. 현존재의 존재에는 염려가 핵심이다. 염려의 존재론적 의미는 시간성이다. 본래적이든 비본래적이든, 거기에서 '자기를 위해'라는 궁극목적성이다. 현존재가 던져진 자로서 처해 있음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 개시되는 그 도식을 우리는 피투성이 마주치는 그것 또는 내맡겨지는 '거기'로 파악한다.[11] 이것은 하이데거의 ‘지평적 구조(horizontale Schema)’[12]의 특징이다. 즉 현존재는, 던져진 자로서 자기 자신에게 맡겨진 채, 자기 자신을 궁극목적으로 해서 실존하고 현재에 있다.


12. 현존재, 현존재의 염려, 시간성, 및 현존재의 본래성과 비 본래성의 비교예시[13]


♣ 현존재의 구조계기는 근본적으로 기투이며 세계-내-존재에서는 피투적 현사실성을 지니며 퇴락하는 존재다.

♣ 현존재의 존재양식은 실존이며 역시 세계-내-존재에서는 피투적 현사실성을 지니며 퇴락하는 존재다.

♣ 현존재의 열려 밝혀져 있음은 이해에 기초를 두고 세계-내-존재적으로는 처해 있음이며 언어로 퇴락해 간다.

♣ 염려란 언제나 자신을 앞질러 있음이며 세계-내-존재적으로는 이미 안에 있음이며 동시에 존재자에 몰입해 있다.

♣ 현존재의 시간성이란 장래를 향하고 있으며 세계-내-존재적으로는 기존에 머물려 현재를 유지한다.

♣ 본래적 시간성이란 장래를 향하지만 세계-내-존재적으로는 기존의 뿌리를 두고 순간, 또는 현재에 머문다.

♣ 비 본래적 시간성이란 기대에 근거하며 세계-내-존재적으로는 보유와 망각을 동시에 겪게 된다. 그리고 언제나 현재에 있다.

♣ 현존재의 본래성과 비 본래성의 본질은 기투(기획투사)이자 죽음에로의 선구이며 세계-내-존재적으로는 양심에 의한 결단을 수반한다.(여기까지는 본래성) 하지만 동시에 현사실적으로 퇴락해간다.(이것은 비본래성)


[1] ‘des umsichtigen Besorgens’를 이기상은 ‘둘러보는 배려함’이라고 번역하고 소광희는 ‘배시의 배려함’

으로 번역하는데 그 의미는 ‘신중하게 천천히 살피며 (존재=가용적 존재자 혹은 전재자) 관계를 고민하는’ 정도로 번역될 수 있다.




[2] Sein und Zeit, M. Heidegger, 이기상 역, 까치, 1998. 463쪽



[3]적소성은 가용적 존재자가 있어야 하는 장소라는 의미로 통용된다

.



[4]SZ 11판, 1967. 360쪽.



[5]같은 책 362쪽, 세계에 존재하는 미세한 부분, 또는 점


[6]앞의 책 362쪽



[7]그 상태를 벗어나서



[8]같은 곳




[9]하이데거가 말하는 초월적이라는 말은 칸트가 사용한 초월(transcendental)개념과는 조금 다르다. 칸트의 초월은 ‘인간이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에 대한 탐구’를 의미한다. 즉, ‘경험과 인식이 성립할 수 있도록 하는 선험적 조건(a priori conditions)에 대한 탐구를 의미한다. 하이데거가 여기서 ‘초월적’이라고 하는 것은 세계가 단순한 사물들의 집합이 아니라, 현존재가 항상 그 안에서 의미를 형성하고 존재를 이해하는 장(場)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10]『존재와 시간 강의』 소광희 지음, 문예출판사, 2003. 225쪽




[11]SZ 11판, 1967. 364쪽.



[12]하이데거의 ‘지평적 구조’는 칸트의 비교적 단순한 인식론적 도식 개념을 확장하여, 존재가 시간 속에서 해석되는 방식을 설명하고 있다. 즉, 존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의미가 형성되고 변화하는 과정으로 파악해야 함을 단적으로 표시한 개념이다.




[13]『존재와 시간 강의』 소광희 지음, 문예출판사, 2003. 2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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