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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등어 Oct 04. 2019

개천절에는 비가 내리길 빈다

내 생애 다신 없을 비닐봉지




나에게 매년 개천절은 지옥 같은 날이다. 나와 연애 중, 만나던 놈이 결혼한 날이 개천절이었다. 개새끼. 그 사실을 두 달이나 지나서야 알게 됐을 때, 배신감과 모욕감에 온몸이 가루가 되어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았다. 동시에 그럴듯한 달콤한 말로 두 사람을 오가며 스릴감에 절정을 느꼈을 변태 같은 새끼를 생각하니 내 몸에는 벌레가 기어 다녔다. 그날 밤, 나는 집으로 가 곧장 실로 향했다. 평소보다 많은 거품을 내어 아랫도리를 벅벅 문질렀다. 그리고 엉엉 울었다.




사내 연애다. 그날은 홀로 야근하던 날이었다. 정리하고 퇴근하려던 찰나 그 새끼의 컴퓨터가 켜져 있는 걸 봤다. 컴퓨터를 끄려던 요량이었다. 모니터를 켜자 검색창이 보였다. 10102486이라는 숫자를 검색했더라. 지식인 답변은 이랬다. 당신을 열렬히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느낌이 싸했다. 그날 그런 메시지를 주고받은 적이 없었으니까.




열심히 컴퓨터를 뒤졌다. 바탕화면부터 휴지통까지. 그러다 외장하드에 있던 사진을 봤다.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웨딩 사진과 신혼여행으로 추정되는 사진들이었다. 그중에는 아기 초음파 사진도 있었다.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심장은 쿵쾅거렸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고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일도 아니었다. 네이트 판에 사연을 올렸다(이후 일주일 동안 베스트 사연 Top 3에 올랐고 자괴감에 삭제했다). 어떻게 만나는 사람이 결혼을 했는데 모를 수가 있었냐며 내가 더 수상하다고 비난받았다. 증거가 있는데도 해결 방법을 찾기 위해 사연을 올린 걸 보면 내가 아직 정신 덜 차린거라고도 했다. 그는 작정하고 속였고, 나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는데도. 하지만 어쩌면 맞는 말이기도 했다. 지금 나에게 벌어진 이 어마어마한 일이, 사실인 걸 알면서도 사실이 아니길 바라는 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쉽게 믿는 편이다. 나를 잘 아는 지인들은 사기 치기에 딱 좋은 스타일이라고도 말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곁에 있는 사람이 나를 헤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그것은 내가 타인을 대하는 태도다.  (사랑했다고 말하기도 치욕스러운) 그놈을 믿었을 뿐인데, 믿음에 대한 대가는 이렇게나 비참했다.




발견한 사진을 두고도 막장 드라마 한 편을 찍었다. 결혼은 결혼식만 올린 것이고, 아기는 자기의 아기가 아니라고 했다. 아내가 재혼인데 전남편이랑 어쩌다 하룻밤 실수에 갖게 된 거라나.

놈에겐 쓰레기라는 말도 아까웠다. 나는 쓰레기 대신, 넌 비닐봉지 보다도 못한 새끼라고 말했다. 일반 쓰레기는 시간이 지나면 썩기라도 하지, 비닐봉지는 천 년이 지나도 썩지 않을 정도로 지독한 쓰레기니까.




물론 나는 복수를 계획하기도 했다. 외장하드에는 꽤 많은 정보가 있었다. 그동안 주고받은 메시지와 사진을 담아 처갓집으로 보낼 수도, 여자를 직접 만나 비닐봉지의 만행을 폭로해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여러 시나리오를 써보고 나서야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비닐봉지는 결혼식에 직장 동료를 한 명도 부르지 않았을 정도로 치밀했다. 도둑 결혼을 할 만큼 지키고 싶었던 건 아슬아슬한 이중생활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에 다다랐다. 한쪽은 깨졌고, 또 다른 한쪽마저 깨진다면? 소중한 것을 잃은 사람은 무서울 것이 없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들면 더더욱. 비닐봉지가 일반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걸 고려한다면, 아찔했다.




반대로, 잃을 게 많은 사람은 두려울 것도 많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비닐봉지가 잃을 게 많은 사람이길 바란다. 들켜서는 안 될 비밀을 꼭꼭 안고 지내며 아주 조금이라도 초조하고 괴롭기를.




그래도 매년 개천절에는 여전히 마음이 분하다. 특히나 올해처럼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에는 더. 매년 개천절에 비라도 왕창 쏟아지길 저주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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