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 다시보기
나는 대학생때부터 보부상으로 유명하다. 항상 가방에 온갖 것을 다 넣고 다닌다. 그런 가방을 메고 힘겨워하는 나를 보며 친구들은 안타까워하며 항상 물었다. “도대체 뭘 그렇게 들고다녀?” 나의 힘듦에 대한 더 정확한 공감을 받기 위해, 기다렸다는 듯 나는 친구들에게 내가 멘 가방을 직접 들어보라 한다. 기대와 달리 가방을 들어본 친구들은 공감보다는 잔소리를 했다. 왜 그렇게 무겁게 다니냐고. 그러게나 말이다. 나는 뭘 그렇게 들고 다니는걸까?
‘혹시나’라는 가정이 내 가방을 항상 살 찌웠다. 혹시 책 읽을 일이 있지 않을까. 혹시 손이 심각하게 건조해져 핸드크림이 필요하지 않을까. 혹시나 지하철에서 음료를 쏟아서 옷에 커피가 흘렀는데 닦을 휴지가 없진 않을까. 혹시 대단한 영감이 떠올라서 노트에 아이디어를 적어놔야 할 상황이 오지 않을까. 이렇게 혹시나 있을 상황에 대비하다 보니 내 가방은 부풀고 또 부풀었다. 그런 가방을 메고 있노라면 어깨와 허리에 통증이 올 정도였다. 통증이 오면 메지 않아야하는데 그날 나는 인체공학적으로 설계된 한 아웃도어브랜드의 백팩을 구매하며 보부상이라는 정체성을 일관성있게 고수해 나갔다.
하지만 실상 내 가방에 있는 물건이 쓰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책을 읽을 시간이 나도 핸드폰을 할 때가 많고. 핸드크림은 성격상 있어도 귀찮아서 쓰지 않을때가 많다. 이 사실을 나도 잘 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있을 부재의 순간이 주는 짜증남과 아쉬움을 마주하고 싶진 않아 가방에 수 많은 물건을 넣는 것 같다. 사실 물건이 꼭 쓰일일이 없을지라도 가방에 없으면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괜히 없으니 더 생각나고, 쓰일일이 있을 것 같고 그런다.
이런 나와는 전혀 다른 가방의 무게를 가진 친구가 있다. 사실 무게도 없다. 왜냐면 가방을 아예 들고 다니지 않으니까. 그는 쿨하게 바지 뒷주머니에 카드지갑과 핸드폰만 들고 다닌다. 핸드크림이 필요한 순간이 와도,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유가 와도 그는 없는 물건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냥 쿨하게 핸드크림 없이 살고, 책 대신 핸드폰으로 신문 기사를 읽더라.
그를 보면서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가진 ‘보부상병’의 근본적인 원인은 그냥 예측불허한 상황을 버텨낼 내력이 없어서가아닐까. 한마디로 자신감의 부족일 수도 있겠다. 핸드크림이 없어도. 책이 없어도. 내가 원하는대로 하루가 안 풀려도 개의치 않고 쿨하게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그런 자신감 말이다.
사실 잠깐 손이 건조하다고 내 인생에 큰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책을 읽고 싶은데 책을 읽지 못했다고 병이 나는 것도 아닌데 핸드크림을 못 쓰고 책을 읽지 못해 약간의 짜증이 날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그대신 다른 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수도. 올리브영에 가서 핸드크림을 새로 구매했는데, 그 향기에 반할 수도 있는 것이고. 카페에서 시간이 남아 책을 읽으려고 하는데, 책이 없어 하는수 없이 창밖을 내다봤는데, 문득 보이는 가로수 풍경을 보며 힐링을 할수도 있은 법이다
돌이켜보면 어차피 인생은 워낙에 예측불허했다. 내가 가진 ‘혹시나 시뮬레이션’으로는 한계가 있을때가 많았다. 모든 혹시나라는 가정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나는 가방이 아니라 집 한채를 이고, 끌고 다녀야할지 모른다. 그 정도 되어야 조금은 안심하고 모든 상황에 적절한 물건으로 대처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고, 나의 어깨는 오늘도 으스러지고 있으니 어렵더라도 오늘부터 가방 다이어트를 시작해보려한다. 가방에 든 물건의 유무가 내 하루의 감정을 결정하는게 아니라, 어떤 당황스러운 상황에서도 개의치 않는 무적의 자신감을 갖길 바라며. 내일 가지고 나갈 가방의 물건을 덜어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