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마음'이 들게 하는 사람입니다.
회사생활 20년 차에 접어들었습니다. 와 10년 차도 징그러운데 20년이라니요. 세월 참 빠릅니다.
같이 회사생활을 시작한 동기들을 어쩌다 보는데 아저씨도 이런 아저씨들이 없습니다. 사람은 다 똑같습니다. 자기 얼굴은 자기 눈에 안 보이니 남들만 아저씨로 보입니다. 그러면서 만나서 서로 꼭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야 넌 어떻게 그렇게 안 늙냐 똑같다 똑같아"
"야 너도 마찬가지야 좋겠다 야~"
써 놓고 보니 슬퍼지네요. -_-;; 네, 저도 이러고 있습니다.
세월이 이리 흘렀으니 동기 대부분이 팀장이나 실장 같은 중간관리자를 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피해 다녔지만 저도 결국 그 대열에 합류(당)했습니다. 갑자기 왠 AI본부가 생기고 거기 팀장이 덜컥 되어서, 중간관리자의 고초를 겪고 있는 중입니다. 하루하루가 다이내믹한데요. 그 와중에 느끼는 바도 꽤 큽니다.
아 옛날에 내 팀장님이 이래서 이랬구나.. 랄까요. 조금씩은 다 이해가 갑니다. 역지사지는 역시 진리였습니다. 자리에 와 보니 이해가 가는 측면도 있더라고요.
지난 세월, 회사를 다니면서 몇 가지 마음속으로 목표를 세운 것이 있었습니다. 만약 내가 팀장이나 어떤 직책을 받게 된다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였습니다. 사실 생각만 하고 이런 날이 안 올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하게 되었으니 오늘은 좋은 팀장, 좋은 상무 같은 좋은 관리자란 무엇인가에 대해 써 보려 합니다.
보통 브런치 글을 쓸 때는 구분지어서 딱딱 써 주면 좋은데요. 최악의 관리자는 제가 20년간 너무 다양하게 많이 접해서 한두 개의 브런치 글로는 정리가 절대!로 안됩니다. 책으로... 아니지 양장본 전집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팔만대장경도 가능
술모임/골프모임 만들고 내 사람만 챙기는 팀장, 부하가 한 일 자기가 했다고 우기는 팀장, 고과 정상적으로 안주는 팀장, 사리사욕만 챙기는 팀장... 대한민국 악덕 팀장님들의 그 뭐랄까.. 이미지가 있죠.
이들은 너무 다양해서 공통점을 찾기 힘듭니다만 그래도 명확히 겹치는 지점이 있습니다.
바로 '직책을 큰 벼슬로 여긴다'는 겁니다. 회사느님이 권능을 주셨으니 짐이 곧 회사다, 내 말에 거역하는 것은 회사님을 모독하는 것이다.라는, 웬만한 종교 지도자 같은 포스를 뽐냅니다.
팀장이나 관리자 직책을 받았다는 것은 회사 내에서 뭔가 인정을 받은 것이지만 그게 늘 옳을 수 없습니다. 업무능력과 리더십은 또 별개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팀장이 되어선 안될 사람이 팀장이 되는 경우도 참 많죠. 이걸 막으려면 관리자가 스스로를 계속 돌아봐야 합니다. 스스로 돌아보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건 '겸손'입니다.
'내가 진짜로 잘나서 팀장이 된 건가? 나보다 훨씬 뛰어난 xxx, yyy 도 있는데 내가 왜?'
'난 xx 업무에 대해서 진짜 yy 과장보다 더 잘하나?'
'내가 저 사람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을까? 난 제대로 알고 말하는 걸까?'
이런 생각을 늘 하고 있어야 합니다. 겸손한 성격을 기본탑재하고 있지 않더라도 무조건 해야 합니다. 회사생활을 아무리 열심히 했다고 해도 모든 걸 혼자 다 알 순 없으니까요. 특정 업무 경험은 팀원 개개인마다 다르니 존중해야 합니다.
제가 이런 생각을 한 건 '좋은 팀장이 되야겠다!'는 욕심 이전에 두려움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팀원을 앞에서 윽박지르고 제 방식을 강요하는 게 뭐가 힘들겠습니까. (20년 동안 봐 온 것처럼) 찍어 누르면 됩니다. 그런데 그게 틀리면요? 팀원이 한 말이 맞았다면요? 물론 여기서도 뭉개고 갈 수 있습니다. 저도 팀원 때 이런 팀장님들 많이 봐서 그대로 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리더가 이렇게 하기 시작하면, 팀 전체의 생산성이 현저하게 떨어집니다. 팀원의 능력이 0~200까지 다양하게 있다고 칩시다. 산술적으로는 다 더하면 되겠지만 실제 팀 생산성은 그런 숫자가 나오지 않죠. 100인 사람 10명이 모였는데 1,000이 아니라 10이 되는 것도 저는 많이 봤습니다.
반면 팀장이 겸손하면 팀장이 팀원들의 말을 듣게 됩니다. (즉 겸손은 경청으로 이어집니다)
팀원들이 자유로이 말을 할 수 있어야 생산성이 올라갑니다. 다양한 의견에 대해 건설적인 토론이 시작될 수 있거든요. 물론 팀장입장에서 다 듣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경험이 부족한 팀원의 아는 척이나, 핀트가 안 맞는 이야기 등 적절한 선의 커트는 필요합니다.(회의가 길어지는 건 모두가 싫어하는 상황이죠)
맞는 말에 대해 경청을 해 주면, 팀원들이 말을 편하게 하게 되고요. 말을 하게 되면 자기 의견을 전달하게 됩니다. 자기 의견이 들어가면, 그게 자신의 일처럼 느껴지게 되죠. 전혀 관심 없고 지겨운 회의였는데 의견을 말하고 그게 논의되다 보면 회의에 몰입한 경험, 다들 있을 겁니다.
Top Down과 Bottom up의 가장 큰 차이가 여기서 나타납니다. 내 의견을 충분히 전달한 후에 시작하는 일은 어느 정도는 내 의도와 책임이 들어가니까요. 팀원들은 점점 자신의 일처럼 느끼고 하게 됩니다.
제가 입사 5년 차 되던 해 모셨던 팀장님이 있습니다. 그분은 자타가 인정하는 호인이셨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화내는 법이 없으셨고 부하직원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셨죠. 위에서 시키는 게 부당하면 팀원들을 대표해서 항의해 주시고 팀원들이 의지할 수 있는 팀장님이셨습니다.
사람이 좋은 분이다 보니 급한 일이 생겨도 본인 선에서 처리하려 노력하고, 팀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팀원들이 다 퇴근해도 오히려 본인이 남아서 일을 처리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당시 대리 나부랭이였던 저는 그런 게 불편했습니다. 뭐라도 더 내가 해 드려야 저분이 좀 편하지 않을까 싶었죠. 제대로 할 줄 아는 건 없지만 뭐라도 하려고 했었던 시절입니다.
입사 10년 차 때 모셨던 팀장님은, 저를 믿고 일을 많이 맡겨주셨습니다. 과장 나부랭이에게 꽤 많은 자유도를 주셨죠. 그 덕에 저도 이것저것 다양한 시도를 해 보고 성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대충 하려 해도 믿어주신다는 생각에 대충 할 수가 없더군요. (물론 사고도 많이 쳤지만 팀장님이 도와주셔서 어찌어찌 수습했더랬습니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돌이켜보면 저는 이때가 가장 일을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니 결론은 하나입니다. 측은지심이던, 자유도건, 고과에 대한 욕심이건 무엇이건 간에 리더가 부하직원에게 '할 마음'이 들게 만들었습니다. 중간관리자에게 다양한 재능이 필요하겠습니다만 저는 이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돌이켜 봐도 그렇습니다.
만약 너무 뛰어난 분이 팀장이라면 관리자보다는 혼자 일하는 게 더 좋다고 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분이 팀장이라면 (회사 오래 다니다 보면 꽤 많이 접할 수 있습니다) 팀원이 그분의 발목을 잡는 일이 많습니다. 팀원들이 본인 수준을 못 따라오면 답답하거든요. 불화가 생길 수밖에 없죠. 리더십과 업무능력은 또 다른 이야기거든요.
이 글을 읽으며 '나는 리더가 아니니 아직 먼 이야기다' 하시는 분도 분명 있으실 텐데요. '할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의 중요성은 육아, 동호회, 대학의 조별과제 등등 인간사 모든 곳에서 동일합니다. 결국 상대방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저도 아직 멀었지만 노력 중입니다. :)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