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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록, 누가 쓰나요?

사실은 막내에게 시킬 일이 아닌데


여러분은 회사에 막 입사했던 병아리 시절에 어떠셨나요? 저는 엄청나게 버벅거리고 헤맸더랬습니다. 지금도 그러고 있지만 그때는 좀 상태가 심각했습니다. 늘 그때만 생각하면 부끄러워지네요.


회사에 들어오면 팀 막내로서 자질구레한 일들부터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들어오자마자 굵직한 업무가 주어지기보다는 운영성 업무 위주로 하게 됩니다. 난이도가 낮고 하던 대로 하면 되는 일들이지요. 이른바 팀 서무 업무입니다. 주간보고 수합, 법인카드 전표관리, 각종 팀으로 떨어지는 자잘한 일들도 참 많습니다.


막내 때는 일을 배워야 한다고 선임들이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면서 회의 참석도 많이 하게 되는데요. 회의 전 후로 막내가 챙겨야 할 일도 참 많았습니다.


회의 전에는 회의 자료 출력, 빔프로젝터랑 파일 준비, 음료수 세팅, 동선 체크 등등이 있고

회의 이후에는 회의록을 작성해서 참석자 간 공유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다른 일이야 몸으로 하면 되니 어떻게 어떻게 하겠는데, 회의록 작성은 옛날부터 선임들에게 많이 혼난 단골 종목이었습니다. 일단 혼내면 왜 혼나는지도 모르고 잘못했다고 하기 바빴습니다. 좀 억울한 게 회의록 작성에 드는 시간이 정말 엄청났거든요. 녹음한 다음에 다시 한번 듣는 것도 시간이 엄청나게 들고, 그걸 요약해서 다시 회의록 양식에 맞춰 쓰는데 드는 시간도 오래 걸렸죠.

그렇다고 회의록을 이렇게 써라 라고 친절히 가르쳐주는 선배가 있던 것도 아니어서 제 회의록 스킬은 실로 오랫동안 제자리걸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저도 어느덧 짬이 차서, 제가 주도적으로 프로젝트를 해 보기도 하고, 남들이 쓴 회의록을 볼 일도 많아지면서 제가 뭐가 문제였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회사의 구조적 문제가 있다는 것도요. 회의록에 대한 단상입니다.



1. 잘 쓴 회의록은 업무 맥락을 꿰뚫고 있어야 가능하다.


회의록은 속기록이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속기록을 쓰고 있었습니다. 제 문제점은 이 한 줄로 요약되는 것 같습니다.

어릴 때는 회의에 참석해서 오고 가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중요하게 느껴졌습니다. 회의 참석자의 Role과 그간 업무 경과를 모르니 더욱 그렇습니다. 회의 목적이야 선임에게 들었다고 해도, 이를 위해 얻어내야 할 구체적인 부분들이 무엇인지 역시 보이지 않습니다.

잘 쓴 회의록은 위의 요소들을 모두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 쓸 때 가능합니다. 일단 문장에 군더더기가 없게 됩니다. 이 말은 글자로 남겨야 될 사항과 그렇지 못한 점들을 구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2. 회의록이 진짜로 필요한 상황은 꽤 위중한 경우다.


당연한 말인데 되새겨 볼까요? 회사 내부의 회의이든 외부의 회의이든 쟁점에 대해 잘 합의가 되었다면 굳이 회의록이 필요하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참석자들이 다 이해하고 합의하고 있다면, 이후에 회의록이 공유되어도 읽어보지 않는 경우도 많죠.


회의록을 회의 이후에 자꾸 열어보는 경우라면, 또 회의록 문장에 여러 사람이 이런저런 의견을 다는 경우라면 이는 위중한 상황(?!)이라는 뜻입니다. 나중에 다른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니 명확히 해야 하는 거죠.


회사 어린이 시절에는 이것 때문에 여러 장단에 춤을 춰야 했습니다. A부서와 회의 후 들은 대로 (정말 들은 대로) 회의록을 정리해서 배포하니 바로 A부서 선임의 전화가 옵니다. 한참 깨지고 수정하면 이번에는 B부서 선임의 전화가 옵니다. 서로 말이 막 다르죠. 한국말은 듣기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회의 석상의 분위기로는 "의견이 없었다 = 동의" 였는데 막상 회의록에 그런 뉘앙스로 기재하면 아니라고 하는 경우죠. 회의록 담당자는 집에 가고만 싶어 집니다.


3. 회의록 양식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것도 제가 빠졌던 큰 오류중에 하나인데요. 회사의 번쩍거리는 (뭔가 멋있어 보이는) 회의록 양식에 집착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내용보다는 보이는 형식에 집착한 거죠.

가능하면 한 장 안에서 주요 사항을 Summary 하고 꼭 필요한 내용을 뒤에 붙이고자 했는데, 한 장에 압축하다 보니 서술어의 주어가 이상하게 생략이 됩니다.

문장을 쓴 저는 '제가 뭘 쓰고자 했는지' 아니까 이 문장이 이상해 보이지 않는데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상하게 보입니다. 예를 들면..


원래 하고 싶었던 말 : X마케팅 비용은 A부서의 예산으로 사용하기로 하나 A부서의 Y 마케팅 비용이 과도할 경우 B부서의 Z 예산을 전용해서 사용하기로 A, B부서장 모두 합의함


회의록에 축약하는 말 :

  - A부서 예산을 사용하되 부족분 발생 시 B부서 예산을 사용키로 합의함.

(요정도에서 끊어야 문장이 다음 줄로 안 내려가기에)


문장은 줄일수록 깔끔해지긴 하지만 마구 잘라내면 안 줄임만 못합니다. 뭘 줄이고 뭘 넣어야 할지 알아야 하는데 그때는 그걸 몰랐습니다. 업무 전반을 알아야 보입니다.



4. 결론 : 중요한 회의록일수록 회의 참석자 중 최상급자가 쓴다면 어떨까


위에서 말씀드린 내용을 종합해서 제가 드리고 싶은 오늘의 결론입니다. 회의록은 막내에게 맡길 업무가 아니라는 거죠! (막내 시절 지난 다음에 이런 주장을 해 봐야.. 크흑)


회의 맥락에 맞추어 회의의 결과를 효과적으로 빠르게 축약할 수 있는 사람

회의 내용에 대해 참석자들의 이견을 빠른 시간 내에 조정하여 참석자 전체의 업무시간을 빼앗지 않을 수 있는 사람

회의록에 연연하지 않고 메일 본문에 붙여서 빠르게 공유할 수 있는 사람.


이를 종합할 때 적임자는 막내가 아니라 최상급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회의록은 잡일 같지만 경우에 따라 엄청나게 중요한 업무가 될 수 있습니다. 각 회사의 임원 간에 만나 회의를 했다면 어떨까요. 회의록으로 결정사항을 남기는 것은 일종의 조선시대 사관과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자, 임원 및 관리자 여러분 오늘부터 회의록을 직접 써 보시는 건 어떨까요?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이 '우리 회사는 안될 거야'라고 말하고 있는 게 들리는 듯합니다만...)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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