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꽤 재미있게 본 드라마가 있습니다. 혼술 남녀라고 보신 분도 많으실 겁니다. 노량진 현실을 잘 반영했다고 평이 좋았던 드라마입니다.
보다가 깜짝 놀랐던 장면이 있는데요. 주인공 동생의 친구인 고시생이 마음을 다잡고 책상 앞에 앉은 장면입니다. 공무원 수험서를 잠시 펴나 싶더니 갑자기 책상 정리를 막 합니다. 정리가 끝나자 갑자기 지저분한 방이 눈에 들어오면서 방을 청소하기 시작합니다.
공부는 안 하고 청소에 집중하는 주인공 (출처:혼술 남녀, 경기일보)
책상도 깨끗해지고, 방도 깨끗해졌습니다. 그는 이어서 공용 부엌까지 청소를 시작합니다. 얼굴은 만족한 얼굴입니다.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고 무언가 했으니까요.
제가 깜짝 놀란 이유는 40년 넘게 살면서 나만 저러는 게 아니라 남들도 저런 다는걸 드라마를 통해 처음 알게 되어서입니다. 학창 시절 제 모습이 정확히 저랬습니다. 시험이 내일이면 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해야 하는데 그건 괴롭고 재미가 없어서 하기 싫었습니다. 대신 공부를 하기 위한 준비를 했습니다. 괜히 연필도 깎아보고 책꽂이 정리도 하고 말이죠.
이러고 있으면 공부를 많이 한 것 같았거든요. 실제로는 공부는 한 글자도 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저는 그저 따분한 공부보다 편한 도피처를 찾고 있었던 것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제가 한창 취업준비를 하던 2천 년대 중반에는 자기 계발서가 서점을 강타하고 있었습니다. 그 유명한 시크릿을 필두로 많은 계발서들이 삶의 방향과 회사생활에 대해 좋은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었죠. 저는 어릴 때부터 시간 나면 서점에 틀어박혀 이런저런 책을 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돈이 없는데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취미였습니다 ㅜㅠ) 범람하는 계발서들을 고개를 끄덕이며 읽기를 몇 해가 지나자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생 공부의 중요성 ㄷㄷㄷ.. (출처: 뉴스웨이)
먼저, 너무 피곤했습니다. 아침형 인간이 되라고 주문하길래 열심히 새벽에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해 보려 했습니다만 야행성인 제 체질과는 맞지 않아 오래 하지 못했습니다. 회사형 인간이 되는 법을 논한 많은 책들을 보며 따라 하려고 노력했습니다만 이래서 임원이 아무나 안되는구나 하는 것만 느꼈죠. 개인별로 자기만의 방식이 다 있겠다는 걸 그때 느꼈습니다.
그리고, 자기 계발서를 읽는 행위가 예전에 시험 전날 책상 청소를 하던 제 행동과 일치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발서를 읽고 있으면 자신도 내공이 쌓이고 몰랐던 것을 깨닫는 느낌이 듭니다. 자신의 몰랐던 단점을 개선한 것만 같고 이렇게만 하면 내 인생도 변할 수 있다는 확신마저 듭니다. 아마 실제로 자기 계발서 때문에 인생이 달라지신 분도 있을 겁니다. 단 조건이 있죠. 바로 '꾸준히 실행'을 하신 분들이요.
저는 책을 보는 것이 제가 노력과 실행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책을 다 보고 나선 뿌듯한 안도감에 휩싸였습니다. "와 내가 이 두꺼운 책을 다 봤네! 내 인생은 이제 달라질 거야! 난 오늘 참 보람차게 보냈어" 이런 충만감입니다.
실행이 없이 이런 생각만 하고 끝나니 인생이 변할 리가 있나요. 책상 잘 치웠다고 시험 점수가 잘 나올 리 없습니다. 계발서 100권을 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한 권이라도 제대로 실행하는 게 훨씬 중요합니다.
가만있어도 미치겠는데 왜 이렇게들...-_-;;
어찌 보면 당연한 이 사실을 왜 그때는 몰랐을까요. 제가 지능이 낮아서였을까요? 현재 대형서점을 가면 '자기 계발'은 하나의 장르로 굳어진 상태입니다. 이렇게 많은 독자층이 형성되었는데 이들은 다들 잘 실행을 하고 있기 때문에 책을 사는 것일까요?
저는 계발서의 내용과 마케팅이 사람들에게 환상(나쁘게는 환각)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만병통치약 광고 같은 느낌인데요. "이 책만 읽으면 당신의 인생은 달라지고 회사에서 승승장구합니다~~ 그러니까 사세요"라는 마케팅에 일단 걸리는 거죠. 책을 사서 읽으면 책 속의 수많은 위인들(스티브 잡스 같은) 사례를 보며 자신도 그럴 수 있다는 착각 속에 빠집니다.
그래서 직장생활을 어느 정도 한 지금은 자기 계발서는 아예 사지 않습니다. 서점에 가면 어떤 트렌드의 책이 나오나 보는 정도만 합니다. 그 시간에 저보다 나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거나 브런치를 씁니다. 그리고 노력해야 할 포인트를 찾으면 그냥 노력을 합니다. 계발서 보는 것보다 그게 더 현실을 바꿔 줍니다.
글 쓰는 김에, 제 오만과 편견이 가득한 책 고르는 법을 공개합니다. 그냥 제 기준일 뿐이니 독자 여러분들께서는 골라서 취하시면 됩니다.
(1) 경영/경제, 자기 계발 분야에서 1년에 2권 이상 쓰는 작가의 책은 사지 않는다.
만화계에 김성모가 있다면 자기 계발 분야에는 ㅇㅇㅇ, ㅁㅁㅁ 등등 유명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아예 연구소와 보조 작가들을 팀으로 꾸려서 책을 찍어내는 분들입니다.
브런치 한편 글 쓸 때도 이렇게 시간과 노력이 드는데, 다작이라니요. 비추합니다.
(2) HR 출신으로 현재 강연이나 컨설팅을 하는 저자들의 책은 신중히 결정한다.
회사에서 인사업무 하던 분들이 독립해서 책을 내고 강연, 컨설팅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특히 인사업무 하던 분들중에 이런 분들이 유난히 많습니다. 좋은 콘텐츠로 좋은 강연을 하신다면야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만 책을 사기 전 고민을 해 봐야 합니다.
인사담당자들은 인사 전문가이지 업무 전문가가 아닌데 업무나 조직에 대해 전문가 행세를 하는 책이 많이 있습니다. 관리부서 관점에서의 접근은 원론적인 이야기가 많아 현업에 있는 분들께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또 이 분들이 책을 내는 데는 정말로 책의 콘텐츠가 자신이 있어서라기 보다 그냥 본인의 포트폴리오 구축 목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잘 보고 판단해야 합니다.
(3) 영미 번역서라면 번역자의 다른 책을 보고 판단한다.
경영경제, 자기 계발 책은 '국내 vs 미국 vs 일본' 구도라고 생각됩니다. 이중 미국 쪽 서적은 번역자의 역량이 매우 중요합니다. 번역자의 다른 역서를 보시고 판단해야 합니다. 일본 책은 그림 비중이 높고 한국어와 일본어의 어순이 비슷한 관계로 번역품질 차이가 크지 않아 괜찮습니다.
(4) 위인을 활용해 마케팅하는 책을 사지 않는다.
스티브 잡스, 마윈, 손정의를 타이틀에 걸어둔 책이 많습니다. '마윈으로 보는 ~~~ 에 대하여', '손정의, ~~~를 말하다' 하는 식의 책입니다. 그런 책은 무조건 저자 약력을 봅니다. 알리바바 창업멤버이거나 애플사에서 일한 경력 등 위인들과 연관점을 찾아봅니다. 많은 저자들이 위인들과 일면식도 없이 이런 책을 쓰고 있습니다. 연애를 책으로 배운 사람들이 연애지침서를 쓰면 신뢰가 갈까요? 사지 않길 권합니다.
(5) 서점의 매대에 나와 있는 책은 마케팅비 지출의 결과임을 기억한다.
저도 책을 쓰기 전엔 인지하지 못하던 부분입니다. 대형서점의 통로, 길목 잘 보이는 곳에 비치된 책들은 모두 출판사에서 마케팅비를 쓴 결과입니다. 책의 내용이 너무 좋아서 서점에서 알아서 잘 보이는 곳에 둔 것이 아닙니다.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순위별로 디스플레이하다 보니 고객들은 매대에도 많이 노출되는 것을 서점 추천으로 아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코 아닙니다.
좋은 책인지, 사야 할 책인지에 대한 판단은 잠시라도 서서 책을 읽어보며 결정하길 바랍니다.
언젠가 제가 자기 계발서라도 쓰는 날이면 오늘 글은 분명 부메랑으로 돌아오겠습니다만... ^^;; 많은 분들이 계발서 볼 시간에 하나라도 더 실행에 집중하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