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승진에 연연하는 그대에게

사실은 저한테 하는 소리입니다

2019년 연말, 그리고 2020년 초까지 아마 대부분의 회사는 승진인사, 조직개편 등을 할 겁니다. 여러분의 회사는 어떤가요? 지금 즈음이면 대부분 정리되고 새로운 마음으로 (뭐가 새로운지는 잘 모르겠지만) 채찍질을 하고 (또는 당하고) 있겠죠.


오랜만에 제 이야기를 할까요. 저는 작년 한 해 꽤나 큰 성과를 냈기에 많은 기대를 했더랬습니다. 그런데 주르륵 미끄러져버렸습니다. 아하핫! 웃음밖에 안 나오네요! 마음 졸이며 기다렸던 지난 몇 달이 순식간에 거품이 되어 버렸습니다.


집에 터벅터벅 걸어오면서 또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문득, 제가 살면서 겪었던 승진 에피소드를 풀어놓고 싶어 졌습니다. 승진이 얼마나 웃기고, 다이내믹하며, 당사자의 손을 떠나 있는지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아마 회사마다 다 다를 터이니, 아.. 어느 정도 체계가 잡힌 대기업도 저렇구나 하면서 봐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1. 입사 3년 차에 초고속 승진을 해 보다.


일전에 언급한 통신대기업에 들어와서 기업고객 영업을 2년 하고서는 신사업 추진본부로 오게 되었습니다. 회사 들어온 지 3년 된 놈이 알아봐야 뭘 얼마나 알겠습니까. 지금 생각해도 부끄러운 수준의 업무능력으로, 선배들에게 행여나 폐나 끼칠까 걱정하며 하루하루 열심히 다녔더랬습니다.


당시 회사는 피어그룹(Peer Group)이라고 해서 직급을 묶어서 승진 발령을 냈습니다. 직급체계가 5급(사원), 4급(대리), 3급(과장), 2급(부장), 1급(임원)의 형태였고 공채 신입사원으로 입사하면 5급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5급에서 4급으로 진급하는 것도 보통 4~5년이 걸렸습니다. 어느 회사나 그렇지만 여기도 '항아리 구조', '인사적체' 그런 단어들이 항상 따라다녔죠.

입사 3년 차인 저를 포함해서 제가 속한 부서는 5급 사원이 총 3명이었습니다. 같은 급이 평가를 같이 받기 때문에 고과는 이미 S, B, C로 정해진 상태였습니다. 제 아래 후배가 1명 있었고 제 위에 선배가 1명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주 특별한 일이 없는 한 B가 예상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10월쯤이었나.. 제 동기가 있던 부서가 갑자기 없어지며(?) 그 동기와 몇 명이 저희 부서로 떠내려오게 됩니다. 난파선을 타고 온 동기 덕에 5급 직원이 1명 더 생겼습니다. 고과도 SBC에서 SABC로 변했습니다. 제 선배야 원래 S지만, 저는 쓸려온 동기 덕에 B를 받을 걸 A를 받게 되었습니다. 회사에 이상한 암묵적 룰이 있어서, 난파선을 타고 온 동기가 일을 잘하더라도 원래 있던 자에게 우선권을 주더군요. 막내와 선배는 그대로인데 저는 한 칸이 올라 A가 되었습니다.


고마운 일이긴 한데, 이것만으로는 그렇게 다이내믹한 변화가 없습니다. 연말이 되고, 평가 철이 되자 약속이나 한 듯 SABC를 나눠주고 나서 승진 TO가 내려오고 승진자가 결정이 되었습니다. 그때 아주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하게, 승진 TO가 2개가 내려왔습니다. 원래 당연히 1개만 오는 것이었는데 내년 조직개편 때 현재의 조직이 없어진다고 해서 보살핌(?) 차원에서 TO가 하나 더 온 것이죠.


S를 받은 제 선배는 원래 승진 대상이지만 TO가 하나 더 오게 되어 본부 내에 한 명이 더 선발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5급이었던 다른 선배 몇과 제가 물망에 올랐습니다. 저는 당연히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도 몰랐는데, 직전 고과가 동점일 경우 다음으로 보는 게 '자격증 보유' 였다고 합니다. 그때는 이런 규정이 있는 것도 몰랐습니다. 저는 당시 정보처리기사, 오라클 DB 자격증 등을 가지고 있었는데 선배들은 자격증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승진인사 발표날은 12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납니다. 구내식당에 밥 먹으러 와 있었는데 핸드폰 문자가 빗발쳤습니다. 사내 메신저도 난리가 났습니다. 저도 몰랐고, 제 팀장님과 제 담당 임원도 몰랐습니다.


그렇게 저는, 특별한 성과도 없이 정말 순수한 운으로 승진하게 되었습니다. 동기들과 선후배들의 엄청난 부러움과 질투를 한 몸에 받으면서요.


초고속이란 말을 쓰는게 맞나 모르겠습니다. 이런 분도 있는 터라...-_-;;




2. 그리고 계속 승진에 밀리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승진이 되어 버리니, 우쭐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습니다. 왜 되었는지도 모른 체 나중에 따져보니 운이 엄청나게 좋아서 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납작 엎드려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누가 물어보면 "어휴 운이 좋아서 되었습니다"라고 겸손히 시선을 회피했습니다. (정말로 제가 한 것도 없고 운이 좋았던 것이기 때문에 메소드(Method) 연기가 가능했습니다... 매우 자연스러웠습니다...)


희한하게도 이런 게 개인의 평가는 더 좋게 만들어 줍니다. 빨리 승진을 했음에도 겸손히 있으니 주변 사람들이 참 좋아합니다. 정말로 부끄러워서 납작 엎드려 있었던 건데 말이죠.


그렇게 세월이 또 흘러, 대리에서 과장 승진할 때가 되었습니다. 빨리 승진을 해 버리니 대리 연차도 빨리 차 버렸습니다. 이때는 욕심도 생겨서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사원 대리 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 봐야 그렇게 엄청날 것은 없습니다. 돌이켜 보면..


일찍 오고 늦게 퇴근하기..

내 일 다 하면 남의 일도 해 주기..

주말에도 나오라면 열심히 나와서 일하기..


이런 식이었네요. 요즘 기준으로는 영락없는 옛날 사람에 꼰대겠습니다만, 저게 주니어인 제가 할 수 있는 최대치였습니다. 제가 스티브 잡스 같은 천재도 아니고, 일을 만들어 낼 재주도, 권한도 없었거든요. 그저 성실함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하니 윗분들의 평가는 늘 좋았습니다. 그런데, 승진이 안됩니다...?..

'고참이 있어서 이번에는 네가 넘어가자.. '

'너 열심히 하는 건 아는데 다음에 하자..' 한 3년을 그렇게 계속 밀립니다. 슬슬 자괴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최고는, 대리 5년 차가 되던 해였습니다. 주변보다 늦어진 터라 마음이 바싹 타들어가던 때였습니다. 괜스레 주변에서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엄청나게 의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쪽팔리고 부끄럽다는 생각에 움츠러들었죠. 다들 저만 쳐다보고 있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당시 제 임원은 꽤나 솔직한 분이셨습니다. 솔직 안 해도 되는데 솔직한 게 문제라면 문제였죠. 직원들이 다 있는데서 몇 번이고 '길대리~ 과장되면 뭐 쏠 거야? 아하핫(물론 본인만 웃음)'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가뜩이나 위축되어 있던 터라, 이런 말이 정말 싫었습니다.

그렇지만 자꾸 들으니까 '그래도 나 승진시켜줄 거니까 저러는 거겠지?'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습니다. 아무렴 임원인데 직원들 앞에서 자신 없이 저럴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연말까지 미친 듯이 일했습니다.


그해 승진인사는 이런저런 이유로 12월이 아니라 다음 해 4월 1일에 발표했습니다. 아직도 생생합니다.

추위도 풀린 4월 1일의 저녁, 평소처럼 여전히 야근을 하고 있었습니다. 늘 '뭐 사줄 거야?'를 묻던 임원이 황망한 표정으로 사무실에 들어오더니 술 마시러 가자고 합니다. 가서는 미안하다고 합니다.


거기서 저는 정말 밝게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습니다. 너무 밝게 웃으면서 말이죠. 왜냐고요?

4월 1일이었으니까요.

평소에도 장난을 많이 치던 분이셔서 만우절 짓궂은 장난이라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아마 임원은 저를 보며 정말 괜찮은 줄 알았을 겁니다.


술자리를 파하고 나오는 길에 지인이 보내준 발령 문서를 보고 저는 자리에 주저앉아버렸습니다. 만우절 거짓말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하늘이 무너지더군요. 날이 풀렸다곤 해도 밤에는 꽤나 쌀쌀했습니다. 추운데,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만우절에는 가급적 아무 말도 하지 맙시다..



도저히 다음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출근할 수가 없어서, 2일 휴가를 냈습니다.

첫날은, 한강에 가서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습니다.

강물이 흘러가고, 사람들은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현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데, 저만 빼고 모두가 괜찮더군요.

해가 질 때까지 그렇게 앉아 있다가 들어왔습니다. 쓰다 보니 그때가 생각나서 뭔가 짠해집니다..


둘째 날은, 제 인생을 다시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날 하루 했던 일로 인해 제 인생은 큰 변화를 맞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다른 글로 풀어보겠습니다.


이런 아픔이 있은 후, 저는 다음 해에 승진하게 됩니다. 사실 일을 더 많이 한 것도 아니고 성과가 더 컸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승진한 이유는 정말 간단했습니다. 높은 임원 한 분이 제가 승진에 떨어진 직후 , '어? 맨날 늦게 있는 니가 걔였어? 몰랐다.. 말을 하지 그랬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연말에 저를 승진시켜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전부였습니다.

허탈하게도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렇게 저는 인생에 두 번째 승진을 해 보게 됩니다.





지나고 보니 세월이 흘러가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이런저런 일을 겪고 나니, 저도 많이 강해졌습니다.

많은 점을 쓰고 싶지만 저처럼 승진에 연연했던 분들에게 꼭 이런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1. 승진 누락이 본인 인생의 실패는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학교를 다니면서, 주입식 교육 덕에 참 안 좋은 버릇이 생겼습니다. 승진을 시험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시험은 어려운 허들을 넘어 제가 원하던 목표를 이루는 것입니다만 승진은 다릅니다.


승진은 회사가, 이 사람을 더 중히 쓰겠다 말겠다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봐야 옳습니다. 능력이 뛰어나고 출중한 사람을 중요하게 쓰고 높은 자리로 올리는 게 동서고금 조직의 원칙이었습니다.

제 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조직이 이를 중요히 쓰지 못한다면 그만큼 조직이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제 능력이 뛰어나지 못해 승진이 되지 않는다면 이는 억울할 일도, 화낼 일도 아니겠지요. 이게 승진의 의미입니다.

저보다 못해 보이는 자가 승진했다고 해서 화낼 일이 아닙니다. 저보다 못했는지 아닌지는 조직이 결정하는 것이고, 결국 고용자의 권한이지요. 물론 이로 인한 손해도 고용자의 몫입니다.



2. 승진 변수 모두를 마음대로 조종할 순 없습니다.


앞서 제 사례처럼, 저도 모르는 사이에 얻어걸리는 승진도 있습니다. 반면, 하려고 용을 써도 안 되는 승진도 많습니다. 전지전능한 신처럼 모든 변수를 통제해서 승진할 수 있다면 최고겠지만 그런 사람은 직장 생활하며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게 당연한 겁니다.

그러니까, 자책하지 맙시다.



3. 조용히, 묵묵히 진짜 실력을 준비하기 바랍니다.


정치를 잘해서, 기회를 잘 잡아서 승진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것도 그 사람의 능력이라면 능력입니다. 하지만 정직하게 준비한 성과와 실력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인정받습니다. 회사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라도요. 정작 진짜 실력을 준비하지 못했을 때가 더 문제가 아닐까요.

회사에서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서 슬퍼할 필요도, 인정받았다고 해서 기뻐할 필요도 없습니다. 회사는 정당한 보수를 주고 우리를 사용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낸 성과만큼 인정받으면 됩니다. 인정받지 못한다면 당신의 시장 가격을 다시 확인하면 됩니다.



뭐라도 아는 것처럼 주저리주저리 적었습니다만, 사실 이 모든 말은 제가 제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도 속이 많이 쓰렸거든요. 요 며칠 술도 마시고, 자학(?)도 하면서 얻은 결론을 적으며 제가 저를 설득해 보고자 쓴 글입니다.

졸필입니다만 읽는 분들께 도움이 되길 바라며.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전 12화 우리 장표 푸르게 푸르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