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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빈 Aug 05. 2018

무관심의 변용이미지

예멘 관련된 기사를 봤다. 

최근 시립미술관에서 전시를 보다가 포스트 식민주의에 대한 키워드로 통해 나도 난민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동시대에 살면서 우리는 우리의 국지적 견해만을 갸날프게 인지하며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세계화라는 단어가 무성할 정도로 이미 세계는 통합되었다. 디지털 컨버전스인 핸드폰 하나로 무엇을 못하겠는가. 무서운 것은 CCTV가 아니라 디지털 시대에 존재하는 감시와 처벌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분열되기도 다시 합쳐지기도 한다. 그것은 이해관계의 아메바형태라고 볼 수도 있는데 예를 들어 성차에 따른 갈등이면서도 청년 복지제도에 따라 힘을 모으기도 하며, 프랜차이즈라는 다국적기업은 찬성하면서 낯선 외양(종교, 생김새 등 하지만 서양을 배제하고)의 종들은 또 다른 혐오로 점철시켜버린다. 


최근 차량에 갇혀 안타깝게 목숨을 거둔 아이들의 기사가 연일 한 나라를 안타까움과 분노로 물들였다. 앞전의 예멘인 배척과 관련되서도 매우 비슷한 현상이다. 우리는 무관심의 끝자락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만큼 인간은 지친것이다. 내 주변의 상황에 압도당하여 정작 인간이 뒷전으로 밀려난 그런 모습으로. 사실 그런 뒷전의 이미지들은 항상 변용을 거듭해왔다. 강자와 약자의 체계로 꾸준히. 


복직의 웃음을 되찾은 승무원들처럼 언젠가 우리 모두가 웃음을 지을 수 있을까는 잘 모르겠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는 너무 많은 공간에 침투하고 발화되는 진부한 단어일지라도 그것의 실현은 정말 까다롭고 이용되고, 배척와 갈등의 양상을 더욱 화려하게 주목시키는 단어로 도태되었다. 


세계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이 살인적인 더위또한 무관심의 변용이라면 참으로 서글프다

그러나 우리의 이마주는 다른 이미지들에 치중되어 있고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사람들이 느낄만한 감각들을 마비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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