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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빈 Aug 06. 2018

가상의 극사실주의가 풍겨내는 소격 효과

2018.7.14. 천안 아라리로 갤러리 이석주 개인전 <사유적 공간>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초고속, 편리함을 특징으로 한다. 그에 따라 인류사 중 가장 역동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TV와 핸드폰을 통해 또 다른 사회를 접하고 가상의 공간 속에서 넘쳐나는 텍스트와 이미지는 사람들을 자극으로 마비시킨다. 인터넷 강의를 통해 수업을 듣고 영화관에 가면 거대한 스크린의 시공간에 매료되어버리며 가상의 계좌를 넘나드는 가상의 화폐들은 이 세상에 진실된 무엇을 찾고자 애쓰는 인간들의 욕구를 부풀린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은 더 이상 돌도끼도, 조그마한 알약도 아니다. 새로운 시공간 그리고 그에 따른 의식의 변화일 뿐이다. 원본의 상실은 사람들에게 거짓을 진실로 느끼고 오히려 무감각한, 판단이 상실된 인간의 세계를 만들어내었다.

  극사실주의가 태동한 것은 아마 이러한 시뮬라시옹들이 넘쳐나는 지금의 현실을 그것이 모방일지라도 하이퍼 리얼리티에 대한 비판이 아닐까 싶다. 사진적 재현은 포착된 순간에 대한 경이가 아닌 회화적 프레임 안에 사진적 이미지의 화소를 통해 어떤 시공간에 대한 은유적 시선들을 보여준다. 그것은 낡은 책이기도 하며, 시침과 분침으로 이루어진 시계이기도 하며, 명화의 일부이기도 하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명화나 시계, 책들 모두는 인간이 편집하여 만든 인식의 창조물이기도 하다. 기차의 개발과 추동으로부터 생겨난 시간은 인간의 삶을 과거 현재 미래, 밤과 낯 등으로 인식하게 해주었으며 소설책의 시공간성은 작가가 만들어낸 갈등과 관계 속에 사람들의 유희를 책임졌다. 더구나 명화의 중심인 그리스 신화도 인간 양태와 군상들, 세계를 이루고 있는 현상을 비유한 창작물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석주는 이미 가상의 늪을 벗어나기에는 현실의 레이어들이 너무 많이 뭉쳐있다는 작금의 형태를 ‘가상의 사유적 공간’을 통해 비판적 자성을 넘어 비참한 현실에 대한 ‘허무’를 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작가의 시선이 더욱더 초점화되는 곳은 일상 연작이다. 극사실의 뚜렷한 상들과 또 다른 프레임을 덧씌워 희미한 일상들을 병치시키는 작업은 지나간 시간 속 존재의 불완전함을 보여준다. 특히 시각적으로 전경인 앞부분의 희미함 뒤에 후경 또는 특정 부분의 선명함은 시간과 존재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드러내는 동시에 일상이라는 시간의 낯섦을 보여준다. 사라진 얼굴과 클로즈업된 다리, 인물의 뒷모습은 명확하지 않은, 분절된 인간상을 넘어 도태되어버린 사람들의 모습인데 그것은 서론에서 언급했던, 진실된 무엇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주는 고독과 허무이기도 하다. 회화는 작품 안에 병치된 선명-희미를 벗어나 작품들 간의 연결선상으로서 일상-사유적 공간의 병치로까지 이어진다. 후경에 위치한 활자들의 면모와 책은 제대로 감각되지 않는데 그것은 0과 1로 이루어진 이진법의 사이버 세계를 보여주는듯 하며 응시하는 눈동자는 최종적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대상으로까지 이어지며 현실로 이행된다. contemplation은 사색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응시라는 개념도 포함한다. 이러한 응시는 감상자의 측면에서 실재의 생물임에도 불구하고 주객전도된 실재-가상의 병치로도 이어지며 그것들의 통합된 아이러니함을 보여준다. 더불어 전경에서 움직이는 눈동자와 말의 동태들은 생물성에 기반 한 인간성의 환기인가? 그렇지도 않다. 모나리자의 사진들이 형성하는 사이버틱 세계의 한 면처럼 실재 생물성도 회화라는 가상의 극사실 재현에 갇힌 그 무엇 이상 이하도 아닐 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일상 속에서 동물들 또는 인간들을 대한다면 그것은 면대면의 감각적 교류가 아닌 동물의 왕국, 카카오톡, 페이스북 온라인의 시각적 교류, 그 지점일 뿐이다. 

  일상 그리고 사유적 공간의 연작들이 풍겨내는 이미지는 초현실주의의 형태로 드러난다. 무의식의 자유 연상과 같이 작가의 그림 속 이미지들은 맥락적 순서나 분위기를 배제하고 부유한다. 그것은 시간, 존재, 자연물과 인공물이라는 작가의 내면 의식 속에서 범람하는 ‘허무’의 이미지들이 재탄생한 또 다른 가상일 뿐이다. 극사실주의의 유사로서 이탈리아 영화사에 태동했던 네오리얼리즘의 바탕은 ‘현실의 시궁창’이다. 거대 자본으로 이루어진 미국 영화, 정치선전 영화들이 현실을 압도할 때 그들은 스튜디오와 제작방식을 탈피하기 위한 거대 운동을 벌였었다. 이것은 현실의 일부, 단면이며 이전의 환상영화와 다르다는 일종의 소격 효과였을테지만 그 종적도 자취를 감췄다. 그것은 가상의 힘일까? 또한 현실적 이미지들이 무엇보다도 현실을 인식 불가능의 상태로 만들어버릴 때 사람들은 배신감을 느낄까? 아니다 그것은 주체성을 잃어버린 또 다시 형성된 초현실의 감정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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