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명사십리해수욕장을 전세 내다
어제 체크인하면서 예약해둔 조식시간이 되니 베이글과 크림치즈, 잼 그리고 내가 선택한 음료(난 우유를 선택)가 준비되었다. 이 게하에서 머물며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이 바삭바삭 따뜻했던 베이글이었던 걸 보면 정말 조촐해 보이는 이 조식은 무조건 챙겨 먹으라고 권하고 싶다.
창가 테이블에는 한 외국인 여자 분이 바깥을 응시하며 커피를 한 잔 하고 있었다. 보아 하니 외국인 근로자 같지는 않고 무엇이 그녀를 반도의 남쪽 끄트머리까지 오게 한 걸까.
어느 나라 사람인지, 완도에는 왜 왔는지 묻고 싶은 호기심이 발동했지만 아침에 부스스한 머리에 코로나로 민감한 지금 같은 시기에 말 걸어 보는 게 조심스럽다 (고 쓰고 용기가 없었거나 귀찮았거나 둘 중 하나 ㅎㅎ)
친구는 어제 밤 늦게 잔 탓에 아직도 잠을 자고 있어서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해서 가져다 주는 세심함(?)을 발휘해 본다.
박재범 노래 중에 '우리가 빠지면 파티가 아니지'라는 노래가 있는데 모름지기 '몸'을 다른 곳으로 움직이며 하는 게 여행의 중요한 부분이라면, 액티비티가 빠진 여행은 역시 뭔가 허전하다. 내가 살고 있던 곳에서 할 수 없는 무언가를 온몸으로 경험해야 여행이 완전해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II0ZL3CLQls
보통 나는 '여행할 때 무얼할까'에 대한 대략적인 시나리오, 즉 큰 그림을 대략 정해 놓고 여행을 떠난다. 내가 새롭게 도전해 보고 경험하고 싶은 '계기'가 나를 떠나게 만드는 게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즉흥여행을 하더라도 여행을 하는 도중에 그런 계기들을 찾으려고 하는 편이다. 하지만 세부 계획은 그 '큰 그림' 속에서 여행을 하는 과정에서 채운다. 내가 단순히 데스크 리서치했을 때 예상하지 못했던 것들이 튀어나오기 때문이고 그런 것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여유 공간을 비워둔다.
이번 여행의 '큰 그림'은
- 한반도의 최남단인 땅끝마을 밟아 보기
- '여름'을 느낄 수 있는 액티비티에 참가해 보기
- 남도 맛집 탐방하기
정도 였다.
그 중 첫번째를 달성했고 세번째는 목포에서의 아침밥상, 꽃게살 비빔밥, 완도에서의 전복 한정식 코스를 먹었지만 매끼 계속되는 진행형이고, 두번째인 액티비티가 남아있었다. 무얼 하면 좋을까~
물론 '큰 그림'을 세우는 성격대로 아무 생각 없이 이곳까지 오진 않았다 ㅎ
창밖의 날씨가 좋아 체크아웃 전에 창문을 열어 젖혔다. 오늘은 완도의 명물 해수욕장인 명사십리에서 SUP (Stand Up Paddlingboard) 즉 서핑보드 위에서 노를 저어 타는 일종의 서핑과 카누의 중간 정도 되는 아웃도어 액티비티를 하기로 했었던 터라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물론 목포에서 '킥보드'를 탔던 게 첫번째 액티비티였긴 했지만 뭔가 '여름'적인 요소가 살짝 아쉬웠던 터였다. 모름지기 여름 액티비티라면 바닷물에 한번 빠져 온몸을 시원하게 적셔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날 오전은 온전히 SUP에 쓰기로 했다.
게하 뒷편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어제 봤던 주도방앗간을 다른 각도에서 보니 벽에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어제 봤던 한쪽 면은 밋밋했었는데 이날 본 다른 면은 칼러풀한 벽화에 파란 하늘, 내려쬐는 햇볕 덕에 더 멋지게 다가왔다. 바닷가 마을 감성이 물씬.
지금은 그냥 버려진 공간이었지만 잘 개조해서 레트로 감성카페로 리노베이션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위에는 파라솔 테라스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소규모 지방 도시들이 공동화되는 경우가 제법 있는데 이런 식의 바닷가 마을만의 시골 감성을 잘 살리는 게 이들만의 관광자원을 재생산하는 포인트라는 걸 잘 알아서 무차별한 개발보다는 마을 특성을 잘 살렸으면 좋겠다.
완도읍에서 신지대교를 건너 20분 가량 운전을 하니 금새 명사십리해수욕장에 도착했다.
목포에서 코로나로 주요 명소에 방문객이 통제되었던 것처럼 명사십리해수욕장도 오늘부터 피서객을 받는다고 했다. 즉 이 날이 바로 개장 첫 날인 셈이었다.
SUP는 완도군에서 관광객 유치를 위해 무려 공짜(!)로 매 시간마다 운영하고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토요일이고 해수욕장 개장날이었음에도 사람이 그야말로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ㄷㄷㄷ
SUP 교관 몇 분이 천막을 치고 장비 대여 및 안전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래도 나름 다른 참가자들도 있어서 같이 놀 수 있을까 기대했었는데 쩝...
교관 아저씨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그야말로 토박이 완도 사람 같아 보였다. 설명이 다소 장황해서 땡볕에 교육 받으면서 '짧고 간결하게 좀 허재~'라고 궁시렁 댔던 기억이 난다ㅎㅎ
예전에 대만에서 한 번 해 본 경험이 있어서 내게는 그리 낯설지 않았다. 그래도 그게 벌써 3년 전인지라 보드를 바다에 띄우고 그 위에 올라서려니 기우뚱기우뚱 불안했지만 나름 타고난 운동신경 덕분에(?) 유유히 바다를 휘젓고 다니며 자유자재로 돌아다녔다.
친구는 균형을 잡기가 어려웠는지 일어났다가 곧장 '어~ 어어어~~' 하더니 물에 풍덩 빠지기를 반복한다.
처음에 차가운 물에 잠수하는 게 어렵지 한 번 빠지고 나면 물에 빠지는 건 일도 아니다. 시원한 바닷물에 여름이 내 곁에 있음을 온몸으로 실감한다.
우리 외에 교관으로 봉사활동을 하는 광주 청년 한 분이 있었는데, 그야말로 완도에 여름동안 SUP 인스트럭터로 근무하는 모양이었다. 2달간 완도에 있다가 해병대 입대를 한다고 했다. 이곳에서의 삶이 너무도 지겨워서 빨리 끝났으면 하면서도 막상 끝나버리면 군대에 가는 건 싫은 모양이었다.
나는 팍팍한 도시에서 벗어나 이런 곳에 2달간 있으면 여유 있게 책도 읽으면서 시골 생활을 만끽할 거 같은데, 이 광주 청년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나도 여기를 2달간 매일 오라고 하면 살짝 지겨울 거 같기도 하다 ㅎ)
여튼 각자 자기만의 입장이 있고 고충이 있음을 다시 한번 느낀다.
예전 대만에서 배웠던 고난도(?) 스킬 중에 하나를 여기서도 시연해 봤다. 보드의 뒷쪽 끄트머리에 서서 보드의 머리 부분이 들리게 한 뒤에 노를 저어서 한바퀴 돌리는 기술인데, 중심을 잘 잡아 보드가 뒤집히지 않게 하는 게 포인트다.
이렇게 막 노 젓고 돌아다니다가 지칠 때면 잠시 보드 위에 누운 뒤에 노의 머리를 햇볕 가리개 삼아 얼굴 위에 올려놓고 눈을 감으면 기분이 참 좋았다. 넘실대는 파도에 몸을 맡기고 들려오는 바다 소리가 참 좋다. 잠시뿐이지만 제대로 휴가를 즐기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다시 몸을 일으켜 주변을 돌아보니 아무도 없다. 아무리 아름다운 무인도에 있어도 사람이 없으면 심심할 거 같은 게 이런 기분일까? 사람이 많으면 많아서 불만인데 또 너무 없으니 사람이 그리워지는 이 간사함은 뭘까. 원래는 1시간짜리 프로그램인데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아주 여유 있게 1시간 반 정도를 바다 위에 있다가 뭍으로 왔다.
장비를 반납하고 씻기 위해 샤워장을 찾았는데, 오늘 개장을 앞둔 해수욕장임에도 불구하고 샤워장이 다 닫혀 있다! 해수욕장 관리센터에 묻고 물어 겨우 빈 샤워장을 찾을 수 있었다. 찬물만 나왔지만 아쉬운대로 공짜 샤워할 수 있다는 게 어딘가!
샤워장 찾아 걷는데 해수욕장이 너무도 고요하다...
차를 타고 완도 읍내로 돌아오는 길에 오후에는 뭘 할까 고민을 해봤는데 완도읍내에는 딱히 볼거리가 많지 않아서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있는 섬 한 군데를 골라서 가보기로 하고 여객선터미널로 다짜고짜 향했다.
여러 후보가 있었는데 영화 '서편제'의 배경이 되었다는 청산도가 그나마 좀 볼거리가 있을 거 같아서 여기로 낙점! 이때가 오후1시쯤이었는데 배가 막 떠나서 일단 티켓만 사두고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티켓을 사려고 하는데 신분증이 또 필요하단다... 친구가 마침 신분증을 차에 두고 내려서 이 더운 날에 셔틀로 차에 가서 신분증을 챙긴 뒤 티켓을 사려고 하는데 차를 가지고 들어가려면 그냥 차 타고 승선할 때 티켓을 사면 된다고 하신다...ㅠ (에잇 그러면 그 얘기 진작 좀 알려주시지...!! 그러나 이 아저씨의 답답한 안내엔 또다른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ㅠㅠㅠ)
결국 배 출발 시간만 확인하고 티켓은 승선하기 전에 사기로 하고 점심을 먼저 먹기로 했다.
완도에서 뭘 먹으려면 갈 곳은 완도음식문화거리 밖에 없다. 어제 갔던 대성회식당이 있는 거리로 갔다.
이곳저곳에 발품을 팔아봤는데 딱히 맛있어 보이는 식당이 잘 안 나타난다. 뭔가 허름해도 엄청난 내공을 가진 노포라든지 그렇지 않더라도 외관상 뭔가 특징이 있어 보이는 그런 식당... 적어도 나는 찾는 데 실패했다 ㅠ
친구는 어제 저녁에 먹었던 물회가 땡긴다고 해서 물회가 있는 집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가게 서너 군데를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했는데 재밌는 건 점심시간인데도 식당에 주인이 없는 경우가 있었다! "계세요~"라고 물어도 무반응... 이것이 시골의 laid back 문화인가 ㅎㅎㅎ
그렇게 횟집에 또 들어가서 물회를 시켰다. 어항에 뭔가 심상치 않은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길래 물어봤더니 역시나 상어였다! ㄷㄷㄷ 그래도 어마무시하게 크지 않은 새끼 상어...
2인분을 시켰는데 이렇게 푸짐하게 나왔다.
완도여서 그런지 역시 전복이 빠지지 않고 나온다.
싱싱한 횟감에 각종 채소와 날치알, 김 그리고 그 아래 살얼음 섞인 소스를 잘 섞어주면...
먹음직스러운 물회 완성!
원래는 소면이랑 나오는데 이게 여름 별미였다. 진짜 소면 추가해서 폭풍흡입하고 그걸로는 분(?)이 안 풀려서 밥까지 추가해서 쓱싹~!
허겁지겁 먹고 나서 궁금해서 물어보니 물회에 들어간 횟감 중엔 아까 어항에서 봤던 상어회도 있었다고...
하긴 어항에 그렇게 많이 기르고 있는데 없는 게 이상했다.
따로 상어회를 먹어본 적이 없어서 신기한 경험이긴 했지만 뭔가 알고 먹었으면 좀 거시기 했을 거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원래 소/돼지/닭고기 외 다른 고기는 먹긴 먹어도 그렇게 선호하는 편은 아니라...ㅎㅎ)
그렇게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다시 페리터미널로 향했다.
차를 탄 채로 배에 승선하려고 했는데, 입구를 지키던 터미널 직원 아재께서 "운전자는 차 티켓 구입해서 들어가면 되고 동승자는 터미널 티켓 카운터에서 티켓 끊어오셔야 해요~"
!!!
이게 무슨 소리인가...ㅠ 티켓 창구에서 차 탄 채로 바로 티켓 구입할 수 있다더니...
그리고 그냥 여기서 다 끊어주면 될 것이지 동승자는 따로 저기서 티켓 구입하라는 건 무슨 어이 없는 프로세스인가... (말 그대로 터미널 직원만 편하라고 있는 절차...)
이 전에 티켓 살 때 창구 직원이 이 얘기만 해줬어도 미리 사놓는 건 일도 아녔는데... 허술한 안내로 땡볕에 이 오버를 하고 있자니 짜증이 났다. 어차피 아저씨한테 따져봐야 소용도 없어서 그냥 분을 삭이고 티켓을 따로 산 뒤에 배에 올랐다...
그렇게 친구는 먼저 차를 타고 승선을 하고 나는 따로 터미널 내 티켓 창구까지 다시 가서 티켓을 끊었다...
우여곡절 끝에 청산도행 배를 타게 되었다.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로 선정되기도 한 청산도에는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