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최초의 슬로 시티가 한국에 있었다는 사실!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이 바로 앞인데 섬을 하나 안 갈 수 있겠나 싶어 몸(과 차)을 배에 실었다.
마지막으로 차를 배에 싣고 바다를 건넜던 적이 언제였던가...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본다...
영국 - 프랑스
인생 첫 '부모님 없이 가는' 여행이었던 유럽 배낭여행 당시 도버 해협을 배로 건넜었다. 5주간 여행의 초반이었고 유럽 대륙을 밟기 직전이어서 설렜었던 기억이 난다. 밤배였는데도 거의 못 잤던 것 같다. (이젠 기억도 가물가물)
중국
양쯔강 상류에서 중류까지 무려(!) 1박2일로 배를 타며 여행했던 적이 있었다. 중국 최대 댐인 '산쌰댐'이라든지 삼국지에 나오는 명소 (유비가 숨을 거두었다고 하는 백제성)과 중국 소수민족이 사는 마을 등을 들렀었다. 암흑 같이 어두운 협곡 사이에서 보였던 밤하늘과 그 아래로 블랙홀 같이 검고 어두웠던 강물의 섬뜩함이 아직도 기억난다. 중국 대륙의 광대함과 역사의 깊이는 중국에 갖고 있던 편견을 어느 정도 날려주었고 그 이후로 난 중국을 몇 번 더 가게 되었다.
일본
일본에서 대학생 인턴 시절 홋카이도 삿포로에서 도쿄까지 종주 여행할 때, 하코다테에서 아오모리로 배를 타고 건었었다. 그 때 페리 터미널이 2군데가 있었는데 배 시간과 장소를 잘못 알았다는 사실을 출항 20분 전에 알아서 부랴부랴 다른 터미널로 가느라 택시비 날리고 결국 배도 놓쳐 페리터미널에서 4시간 넘게 다음 배편을 기다렸던 생각이 난다 ㅎㅎ
터키
부르사에서 이스탄불로 갈 때 큰 관광버스를 배에 싣고 마르마라 해를 건넜었다. 건조하면서도 따뜻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터키여행의 마지막 행선지 이스탄불로 들어갔던 기억
한국 - 일본
서울에서 구마모토까지 기차, 버스, 배, 렌트카를 이용해 여행했던 적이 있었다. 부산에서 후쿠오카로 페리를 타고 가는데 한국에서 배를 타고 외국을 갔던 첫번째 경험이었다. 비행기를 타지 않고 외국땅을 밟으니 기분이 묘했다. 그냥 한국 지방도시(섬)에 도착한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내가 일어를 해서 더 그렇게 느꼈던 건지도 모르겠다. 페리터미널은 왠지 공항보다 규모가 작고 수속도 짧아서 그런 것도 있겠고...)
대만
대만에서는 '녹도(뤼다오)'로 불리는 대만 동남쪽 섬에 갈 때(당시 녹도 편 블로그는 여기) 배를 탔었더랬다.
이렇게 기억을 더듬어 보니 정작 배로 한 여행은 대부분 외국이었네?! 물론 이것 외에 더 자잘한 승선도 있었지만 그것도 외국이 더 많았던 것 같다.
한국처럼 해외여행은 비행기로, 주변 섬은 다리로 잘 이어져 있는 나라에서 큰 배를 타는 경험은 좀처럼 없기 때문이 아닐까?
비행기나 차를 타고 하는 여행은 흔하지만 배나 기차를 타고 하는 여행은 생각만큼 많지는 않은만큼 더 특별하다.
친구는 아침부터 SUP로 피곤했었던 모양인지 차에서 잘 요양이었다.
사실 개취이긴 한데, 나는 여행 가서 '쉬는 타입'이 아니다. 물론 쉬기도 하지만 볼거리 먹거리 놀거리가 있으면 그 쉼은 아끼는 타입이다.
이렇게까지 멀리 와서 어디서나 할 수 있는 걸 하고 있으면 여기만의 경치 경험을 놓치는 것만 같다. 그래서 하나라도 더 보고 더 느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 여행중에는 내가 살아있음을 평소보다 더 느낀다. 현재에 집중한다. 그래서 여행이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힐링된다.
이 때도 좀 피곤하긴 했지만 난 차에서 나와 갑판 위로 올라갔다.
완도 근처의 수많은 섬들 중 우리가 굳이 청산도를 고른 이유는
- 근방에선 그래도 가장 큰 섬이었고
- 그래서 배편이 비교적 많고 대기 시간도 적었던 데다가
- 영화 <서편제>의 배경이 되었다고 해서 그래도 뭔가 볼거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페리를 타고 나서 알게 된 게 청산도가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라고 한다.
'슬로 시티' 어디서 들어본 거 같기도 한데... 뇌리 한켠에 쳐박혀 있던 기억들을 강제로 끄집어 내 보려 했지만 딱히 기억할만한 무언가는 없었다.
여튼 청산도가 무려 13년 전이었던 2007년 12월 아시아 최초로 슬로시티에 지정되었다고 한다.
슬로시티는 공해 없는 자연 속에서 그 지역에 나는 음식을 먹고, 그 지역의 문화를 공유하면서 느림의 삶을 추구하는 국제운동을 말한다. 지속가능한 발전, 전통문화 보존, 지역공동체 삶 등을 추구하자는 정신이 섞여 있다.
바쁘고 빠르게 흘러가는 도시의 삶에서 벗어나 유유자적하며 여유와 느림의 미학에 감사하면서 살아가기 위해 자연, 지역문화공동체를 중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인 듯 하다. 근데 정작 왜 청산도가 굳이(?)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가 된 지는 잘 모르겠다. (한국 사람의 대부분도 사실 잘 모르는 섬일텐데...ㅎㅎ) 그런 걸 보면 '슬로시티'란 개념 자체가 아직은 '듣보' 레벨이라는 방증인 건지도 모르겠다. 여튼 서울로부터 머얼리 떨어져 있는 곳인데다가 섬이라서 고립도 되어 있겠다. 슬로시티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리고 이건 여행하고 난 이후에 알게 된 건데 (참 이런 것들이 많다. 여행하면서도 리서치를 틈틈이 하긴 하지만 당시에는 별 생각 없이 지나쳤다가 이렇게 글로 정리를 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는) '청산도'가 이런 이름을 갖게 된 이유는 사시사철 섬이 푸르기 때문이라고... 이거슨 매우 직관적이었다 ㅎㅎㅎ
아까 여행에서 '쉼'을 중시하는 타입은 아니라고 했는데 그런 내가 '쉼'을 강조하는 슬로시티에 가는 것이 살짝 아이러니하게도 느껴졌다. 하지만 비록 '몸'은 쉬지 않는 타입일지언정 '맘'은 제대로 쉬고 있으니 그걸로 된 거였다.
날씨는 너무도 화창했다.
한창 성수기일 법도 한데 코로나 때문인지 승선한 차들은 배가 수용할 수 있는 카파의 절반도 안 되어 보였고 갑판 위도 한산했다.
배는 유유히 방파제를 벗어나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으로 뱃머리를 향하고 있었다.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답게 바다 주변은 온통 크고 작은 섬들이었다.
망망대해로 나간다는 느낌 보다는 완만한 바위섬으로 이뤄진 섬 사이를 헤치고 간다는 표현이 맞아 보였다.
햇볕은 뜨거웠지만 시원하게 불어대는 바닷바람은 묘하게 해방감을 주었다.
이 찰나의 일상으로부터의 해방감, 자유, 이것이 여행이다.
바람이 엄청 세차게 불어서 내 머리는 헝클어진 지 오래다.
눈 앞에 펼쳐지는 이 장관을, 이 순간 살아있음을 일깨워주기 위해 내 살갗을 부드럽게 두드리는 이 바닷바람을 고작 차에서 눈을 부치기 위해 마다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번아웃이 와서 무기력감을 느낄 때가 있다.
직장인으로서 바쁘게 평일을 일하면서 보내고 나면 주말이 온다.
보통은 신났을 주말인데도 심신이 지쳐서 아무것도 하기 싫거나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을 때가 있다.
후자는 대개 막연하게 하고 싶다는 마음만 있지 정작 무얼 해야 즐거울 지 잘 모를 때이다.
특히 자유롭게 나다니기도 어렵고 사람 만나기도 어려운 코로나 기간이라면 더 그렇다.
딱 좋아하는 게 하늘에서 뚝 떨어지면 좋으련만 그것마저도 노력이 필요하다.
여행은 내게 그런 존재다.
내 일상의 스트레스를 날려주고, 내가 매순간순간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소위 나의 '좋아하는 것'이다.
당장 내 눈 앞에 펼쳐지는 걸 느끼고, 내 앞에 당면한 과제들 (맛집을 찾거나, 다음 여행지를 검색하거나, 운전을 하거나, 예상치 못하게 발생한 문제들, 예를 들면 가고자 했던 곳이 문을 닫았거나 등등..을 지금 여기서 해결해야 한다. 과거의 싫은 생각들이나 미래에 발생할지말지도 불분명한 것들로 인한 불안에 신경을 쓸 '사치' 따위는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내게 없다.
그리고 이 '지금'이라는 내게 당면한 순간에 조금이라도 집중하기 위해, 만끽하기 위해 나는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었다. 사실 그리고 그걸 '노력'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런 게 열정인가?! ㅎㅎ
여행 말고 삶의 다른 많은 부분에서 이런 걸 더 느껴야 할텐데 말이다 ㅎㅎㅎ
여튼 내 인생에서 열심히 살았던 때에는 다 이런 감정과 몰입 상태로 임했던 것 같다.
'사랑하는/좋아하는 것'을 갖는다는 건 그만큼 중요하다.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든다.
무언가 좋아하는 게 있는가?
그럼 당신은 그것만으로도 절반은 행복한 것이다.
그걸 쫓는 과정이 얼마나 충실한지에 따라 나머지 절반의 행복이 완성될 것이다.
결과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그 과정의 매순간 최선을 다했다면 당신은 이미 성공한 거고 충분히 행복했을 것이다.
사랑은 축복이다.
한 40분 정도가 지나니 청산도항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평소 서울에서 이동할 때도 러시아워가 아니라면 지하철보다는 버스를 선호한다. 이동중의 경치를 볼 수 있기 때문에 특히 지나가는 구간에 볼거리가 있는 곳이라면 더욱 그렇다.
청산도로 가는 뱃길은 단조로운 망망대해가 아니라 그 자체로 많은 볼거리를 선사한다. 40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때가 특별히 좋았던 시간으로 기억될 정도...
여행은 '목적지'에 있지 않고 이동 자체에 있다는 말이 와닿는다.
왜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가 되었을까
서편제를 여기서 찍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여기엔 내가 모르는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
사계절 늘 푸르다는 섬,
청산도에 첫 발을 내딛기 3분 전 내 머릿 속 궁금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