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도 생소했던 장흥이 내 뇌리에 박혀 버린 이유
달리고 달려 장흥에 도착한 건 저녁 9시가 다 되어서였다.
코시국인데다가 (시골이라고 하기엔 뭐 하고) 지방 도시, 지금까지 열고 있는 식당이 과연 있을까. 반신반의 하며 이 동네 맛집을 몇 군데 뒤져 본 결과, 장흥은 우삼합이 유명하다는 글들이 몇 개 보였다.
탐진강변에 삼합집들이 군집해 있었는데 그 중에서 평점이 (4개 밖에 안 달려 있는 게 좀 걸렸지만) 5점 만점인 '한들한우식당'이란 곳을 찾아 갔다.
코로나 이후 국내여행을 많이 하게 되면서 국내 맵에도 하게 되었다. 가본 곳은 노랑. 한번 더 가도 좋을 곳은오렌지. 엄청 좋았던 곳은 빨강. 그리고 가보고 싶은 곳은 초록색으로 표시해 두다 보니 내 맵은 어느덧 알록달록 무지개색이 되었다. ㅎㅎㅎ
다행히 아직 문을 열고 계셨다. (물론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지만...)
너무 늦어서 쫄쫄 굶거나 편의점에서 서울에서도 먹을 수 있는 흔한 음식들을 입에 우겨 넣어야 하는 게 아닌가 걱정했었는데 불을 켜고 손님을 받는 주인 아주머니를 보니 마치 힘든 일과를 마치고 집에 왔을 때 나를 반겨주는 엄마와 같은 반가움과 포근함이 느껴졌다.
아주머니 맘이 변해 셔터를 내리지 않도록 냉큼 자리를 잡고 바로 우삼합을 시켰다.
홍어 삼합은 들어봤어도 우삼합은 사실 처음 들어봤다. 장흥이 삼합으로 유명하다는 것도 이 날 처음 알았다!ㅎㅎ
조금 알아보니 장흥은 (한우) 삼합으로 유명한데, 삭힌 홍어(해산물)/돼지고기 편육(육고기)/김치(채소)로 이뤄진 홍어 삼합과는 달리 한우 삼합은 소고기(육고기)/표고버섯(채소)/키조개(해산물)로 구성되어 있었다.
우시장이 있었던 안성이 국밥으로 유명한 것처럼 장흥도 근처에 우시장에 많아 한우 생산이 많은 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표고버섯은 우리나라 생산량의 무려 절반 가까이를 장흥에서 생산하고 있다고...!! 키조개는 장흥 동쪽의 득량만에서 채집된 것이라고 하는데 그 크기가 다른 지역의 키조개보다 크고 살도 부드럽다고 한다.
(장흥이 내륙 도시인 줄 알았더니 나름 바다도 접하고 있었다!)
뭐니뭐니 해도 일단 재료 각각이 맘에 드니 이 셋의 조합이 내 입맛에 안 맞을 리가 없다!
식당 앞이 정육점인 정육식당이어서 그 날 떼온 신선한 고기를 직접 골라올 수 있었다. 적당히 떼깔 좋은 고기를 골라 굽기 시작했다. 시간이 거의 9시에 달한 때여서 허기가 질 데로 져있었다.
각 고장에 가면 그곳의 특산물을 맛봐야 하는 게 인지상정! 마침 장흥에도 햇찹쌀 막걸리와, 표고버섯이 유명한 곳인만큼 표고버섯 음료가 있어서 하나씩 시켜보았다.
재료가 얇아서 그런지 돌판에 슥슥 구우니 금방 익었고 기다릴 틈도 없이 우리 목구멍으로 직행. 식도 미끄럼틀을 타고 뱃속에 차곡차곡 음식이 차갈 수록 우리는 연신 감탄사를 연발했다.
잽싸게 구운 재료들을 쌈으로 야무지게 싸서 입에 우겨넣어 본다.
풍요로운(?) 고장이어서 그런지, 삼합의 메인 재료인 소고기, 키조개, 표고버섯뿐만 아니라 쌈도 '삼합'으로 제공된다. 상추, 깻잎 그리고 김치!
소고기를 먹고도 환상적이었던 삼합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대패 삼겹살을 추가로 시켜보았다.
이것도 이것대로 너무 맛있었다.
정말 게눈 감추듯 먹어치워 버렸다.
정말 끼니만 해결하면 다행이다고 생각했는데, 허기만 채운 게 아니라 정말 환상적인 한상으로 저녁 식사를 마무리 할 수 있었다. 거의 10시가 다 된 시간이었는데 연신 엄지를 치켜세우며 허겁지겁 맛있게 먹는 우리 둘이 주인 아주머니도 흐믓하셨는지 추가 주문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주셨다 ㅎㅎ
우리가 마지막 손님이었는데 문 닫기 기다리면서 식당 한켠 자리에 앉아 다음 날 장사 재료를 다듬으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당시 허기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식당에서 먹었던 음식들이 너무나도 만족스러웠다. 원래는 지도에 가본 곳을 표시하는 정도인데, 나오자마자 카카오맵에 평점 5점을 남겼다. 재밌는 건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몇몇 있었던 모양인지 리뷰가 많진 않았지만 남긴 사람들은 대부분 5점을 줬다는 점이다 ㅎㅎ
식당 앞에 탐진강이 있다는 점도 괜히 더 운치 있어 보였다ㅎㅎ 음식이 맛있고 배가 부르니 세상 모든 게 다 좋아 보인다. 달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runners' high를 즐기는 것처럼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travelers' high 같은 게 있다. 나한테는 엄청 아름다운 경치를 보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서 배가 부른 상태가 됐을 때 그런 행복감이 찾아온다.
아무 기대도 안 했던 장흥에서 이런 만족을 느낄 줄이야! 이번 여행의 예상치 못했던 수확(?)이다.
딘닷 유랑기를 시작하며 적었던 인트로에도 적어놨듯, 일본의 료칸 같이 한국에서도 전통미와 역사적인 스토리를 가진 곳에서 묵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여행의 첫밤을 목포의 '춘화당'으로 했었던 것이기도 했다.
장흥에서 묵었던 민박 이름은 '오래된숲'이란 곳이었는데 1917년에 완공된 103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택이다. 지역 유지가 지은 것을 어느 한 교수님이 사서 현재 매니저 아저씨와 몇몇 지인들이 민박으로 운영하게 되었다고 한다.
장흥 읍내에 있는 '물고기들의 숲'이란 카페와 모종의 관계가 있는 모양이었다. ('물고기들의 숲'도 다음 날 들르게 된다.)
몇 번이고 체크인 시간을 늦춰가며 어둠이 깔린 야심한 시각에서야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 때문에 퇴근(?)도 못하셨을 매니저 아저씨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듯 걸걸한 목소리로 쿨하게 우리를 맞아주셨다. 안채와 별채 두 개가 있었는데 별채에는 다른 투숙객이 있었는데 일찍 잠이 든 모양이었다.
아저씨는 안채는 원래 가족 단위의 예약을 받는데 코로나로 예약이 많이 줄어서 가격도 내린 것을 마침 내가 에어비앤비에서 예약을 한 것이다. 10만원 초반대로 예약한 걸로 기억하는데 성수기 때는 30~40만원까지도 한다고 하셨다. 운이 좋았다.
일가족이 머무는 공간을 통째로 빌렸기 때문에 좀 과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뭐 싸게 빌린 거니 어떠랴 ㅎㅎ 목포의 춘화당 보다는 좀 더 넓고 깔끔한 느낌이었다.
도서관 내지 서재로 쓰이는 별채는 곳간채로도 불리는데 예전에는 곳간으로 썼던 곳인가 보다.
매니저 아저씨는 하우스 맥주의 장인(?)인데 여기서 하우스 맥주 만들기 소모임을 종종 가진다고 하셨다.
한바퀴 고택 투어를 마치고 공용공간인 바깥채로 향했다.
안채(본채)의 반대편 행랑채 또는 바깥채는 식당 내지는 펍으로 쓰이고 있었다.
저녁 식사로 바베큐가 제공되었다고 하는데 아직 다 치우기 전인지 쌈 재료들이 보였다. 하지만 우리는 한우 삼합을 원 없이 먹었기 때문에 바베큐에 대한 미련이 딱히 남지는 않았다.
바깥채의 여기저기에는 지인이 그려줬다는 그림이 여기저기 걸려 있었는데 멧돼지를 주제로 하는 것들이었다. 강렬한 색채와 상징성을 띤 듯한 것들이 한 데 얽혀 오묘한 느낌을 자아냈다. 마치 핏줄과도 같이 멧돼지 머리 전체로 퍼져 있는 하얀 자작나무 그리고 멧돼지 머리 위로 뜬 초승달...
펍은 자율제로 운영되어 자기가 마실만큼 탭에서 맥주를 따라 마신 뒤, 알아서 결제를 하면 된다. 매니저 아저씨가 펍에 계셔서 술도 따라주시고 술기운을 빌려 세대를 뛰어넘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아저씨가 직접 양조한 맥주라며 내어주셨는데 본인은 이번 맥주는 잘 안 됐다며 겸손을 떠셨지만 생각보다 맛이 괜찮았다.
장흥 근처에서 지인이 한다는 막걸리도 마셨는데 걸죽하면서도 신맛이 강했다.
맥주를 어떻게 만드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시며 해외에서 유명한 하우스 맥주병을 보여주시기도 했따.
각자 인생 사는 이야기. 매니저 아저씨는 어떻게 하다가 이 민박집을 운영하게 되었는지 맥주를 빚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니 시간이 금방 갔다. 각자의 길이 녹록지 않음에, 그렇지만 묵묵히 걸어가야 하는 건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창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자정에 가까워졌다. 안뜰로 나오니 밤하늘에 별이 가득했다. 아이폰으로 찍었는데도 이렇게 잘 찍힐 정도면 육안으로는 말할 것도 없겠다.
읍내에서 10~20분 거리인데도 큰 도시가 아니다 보니 한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별밤을 볼 수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잠을 청하기엔 고택의 정취가 아쉬워 눈에 좀 더 담아보고 싶었다. 대청마루 앞 복도에 걸처 앉아 멍 떼리고 있으니 속세(?)의 번뇌들이 사라지고 마음이 평온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100년 전 이 집을 처음 짓고 살았던 사람들은 매일 이런 밤을 누렸을까? 일제 치하에서 이 집에 살던 사람들은 어떤 세월을 보냈을까. 일개 여행자로서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평온함이 치열했던 하루하루를 살았을지 모를 그들에겐 지금처럼 편안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리라.
여행을 통해 공간을 넘나들면서도 종종 이렇게 시간을 넘어 이 공간에서 벌어졌을 옛날을 떠올리면 언제나 묘한 기분이 든다.
다음 날은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기에 뜨끈한 온돌방에서 이불을 깔고 잠을 청했건만 시골에다가 집 뒤가 산인지라 모기가 꽤 모여들었다.
시골에서 피는 향을 잔뜩 피워두었건만 이미 방안으로 침투한 모기를 막는 건 역부족이었다. 모기와의 사투를 벌이다. 어렵사리 잠이 들었는데 한밤중에 바깥에서 꽤나 거대한 물체가 집 안을 헤집고 다니는 게 느껴졌다. 움직이는 소리를 듣자하니 작은 고양이는 아니고 꽤나 큰 동물 같았는데 왠지 멧돼지 같은 게 아니었을까 싶은데 괜히 공포심이 들어 바깥에 나가서 정탐(?)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저 숨을 죽이고 소리가 잦아들길 기다렸다.
옛날 옛적에는 집에 늑대며 여우며 호랑이며 찾아들면 옛날 사람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ㅎㅎ
그렇게 동이 텄다.
밤에 보는 고택은 은은한 조명으로 어둠이 주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낮에 보는 모습은 또 그 나름대로 분위기가 달랐다.
어제 으슥해서 돌아보지 못했던 곳들을 천천히 둘러봤다.
아침 산책 겸 고택 바깥 마을 구경도 했는데 주변은 산으로 둘러쌓인 논이었고 조금 더 멀리 가면 강이 있었다.
본채의 대청마루 위에 걸려 있던 솔개연. 얼핏 보면 진짜 매가 벽에 박재되어 걸려 있는 것이라는 착각을 일으킬만큼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오래된숲'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대청마루 앞 회랑에 앉아 사색하는 척을 해봤다.
친구가 아침 커피가 땡기다고 하기도 했고, 어제 얘기 중에 나왔던 지인이 하는 읍내 카페에 들려보고자 '물고기들의 숲'이란느 카페로 향했다. (바깥채에 걸린 멧돼지 그림을 그리신 분이 이 카페를 운영하고 계신 듯 했다.)
멧돼지 그림처럼 동물을 모티브로 한 그림이 카페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여기도 초승달이 있는 걸 보니 화가의 시그니쳐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카페는 친환경을 강조하는지 카페에 녹색당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그 신념을 대변하듯, 빨대도 녹말로 만든 녹는 빨대를 썼던 게 기억에 남는다.
친구는 아메리카노, 나는 유자차(참고로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를 받아들고 이제 여행의 종점, 분당으로 향하기로 했다.
아 참, 그 전에 점심은 나주에 들러 그 유명한 흑산도 홍어 삼합을 먹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