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크리처"에서 한일 과거사 문제 생각해 보기
아마도 한국인이라면 한국과 일본 간에 과거사의 문제가 광복 이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다는 걸 잘 알거야. 언론에서 주로 많이 들어온 얘기중에는
- 일본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 독도 영유권 주장
- 위안부 운영 사실 부정
-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부정
- 역사 교과서에서 위 사실에 대한 균형 잡힌 서술을 하지 않거나 생략
등등
일본에서도 아예 과거사에 대한 반성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야
무라야마/고노 담화 등 일본 총리들이 과거 침략에 대한 공식적인 유감을 표명하기도 했고 하토야마 전 총리는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해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려 진심 어린 사죄를 표하기도 했지 (물론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은 아니었지만 상징적인 의미는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해)
나 또한 대학에서 정치외교/국제정치를 전공했던 입장에서 한일간의 이슈는 가장 관심이 있었던 분야지만 해결이 너무 힘들다는 걸 잘 알았기에 혈기왕성했던 대학시절에는 외교관이 되어 어떻게든 해결해 보고 싶었지만 여기에 내 인생을 바치기엔 역부족일 거란 사실을 깨닫고 그 길을 접었던 기억이 있지
내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두 개만 꼽아보자면
첫째, 일단 일본 사람들이 한국과의 과거사라고 할까 역사 자체에 대해 관심이 그렇게 크게 없어
한국도 이런 민족 감정이 들어간 사안이 아니면 한국사에 대해 전반적으로 관심이 없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할까? 다만 한국은 상대적으로 '피해자'의 입장이 강하기 때문에 그나마 과거사에 좀 더 민감하다고 할 수 있지. 아무리 한국이 일본 정부의 사과를 호소해도 일본 국민들이 보기엔 그저 밑도 끝없이 징징댄다고만 보는 게 사실이야.
둘째, '찬란했고 자랑스러웠던' 일본 제국의 과거를 미화하고 싶은, 즉 역사에 그나마 관심을 갖고 이런 얘기의 주도권을 가진자들은 일본의 (극)우파들이란 거지
자신의 뿌리를 자랑스럽게 여기려고 하는 건 인간의 당연한 이치이지. 생각해봐.
인지상정. 가재는 게 편.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괜히 있는 얘기가 아냐.
보통 자기 아버지든 할아버지든 조상 얘기를 할 때 기왕이면 좋은 면은 부각시키고 안 좋은 면은 숨기고 싶어하지 않겠어? 이건 정치판에도 파다 하니 더 이상의 얘기는 안 할게.
일본도 자민당이란 곳이 전후(세계2차대전 이후) 고작 몇 년을 제외한 70여년을 집권해 온 사실상 일당독재 비슷하게 해온 상황인데, 이들을 후원해온 세력이 바로 일본의 극우세력이라고 할 수 있지.
정치인에게는 후원이 중요한데 (한 때) 찬란했던 일제의 역사에 먹칠을 하게 좌시하지 않는 극우파들의 입김은 실로 무시할 수 없지. 그래서 이들에게 잘 보이려고 많은 일본의 정치인들이 야스쿠니에 가고,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위안부를 부정하는 거야.
그게 역사 교과서의 문제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는 거고 (요건 아래에서 좀 더 얘기해 볼게)
이런 생각들을 가진 사람들이 집권하는 정부랑 무슨 얘기가 되겠어. 아무리 정부 차원의 사과를 요구해 봤자 소 귀에 경 읽는 꼴이지.
그래서 난 이 문제에 대한 외교적 해결을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
그리고 정부가, 총리가 공식적으로 사과한다고 한들 국민들의 진심 어린 공감대가 그걸로 자연히 생길까? 즉 국민적 공감대가 없는 상태에서의 총리 및 정부의 진심 어린 사과는 나올 수도 없겠지.
옛날처럼 정부가 "까라면 까" 식의 방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아. 가뜩이나 인터넷이니 유튜브가 생기고 나서 똑똑해진 국민들을 정부의 프로파간다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 top-down 형태의 해결은 그냥 기대하지 않는 게 맞아.
사실 지금 세대도 역사에 관심이 없었는데 다음 세대가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될리 만무하지 않겠어?
게다가 일본 역사 교과서도 왜곡/생략되는 마당에 일본의 젊은 친구들이 이런 한국과의 과거사를 제대로 알 수가 없겠지. 그게 사실 가장 큰 문제야.
top-down으로 바꿀 수 없다면 bottom-up이 사실상 유일한 해결책인데 국민들이 이에 대해 모르고 관심이 없다면 시작 조차 할 수가 없지. 그렇다면 어떻게 이 다음 세대가 역사에, 특히 한국에 관심을 갖게 할 수 있을까?
대학 시절 국제정치를 배우며 soft power라는 개념을 처음 접한 적이 있었지
결국 군사력/경제력과 같은 실질적인 힘(hard power)이 지배하는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 속에서 이런 소프트 파워란 게 의미가 있을지 상당히 회의적이었지만 나이브하게 한류가 한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었던 적이 있었지. 물론 나이브했던만큼 교수님도 콧방귀도 안 뀌어주셨지.
근데 요즘 흘러가는 모양새를 보면 이게 그나마 유일한 희망이지 않을까 싶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어.
그 소프트파워는 문화에서 오는데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미국 문화력이 좋은 예지.한국의 경우엔 '한류'겠지?
결국 정부 정책이며 담화가 어쩌고, 교과서가 어쩌고.
너무 고리타분하잖아. 일단 눈이 안 가잖아.
관심을 끌려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일단 눈이 가야지.
이런 복잡한 이슈를 정공법으로 풀기엔 실타래도 많이 꼬여있고 분위기도 냉랭하잖아.
아이스 브레이킹으로 마음을 좀 더 열어야 하는데 어느 바보가 직접적으로 핵심 문제부터 바로 언급하나.
이럴 땐 부드러운 주제부터 차츰차츰 실타래를 풀어가는 게 오히려 맞다고 봐.
<겨울연가>, 보아, 동방신기로 시작해 당시에는 극히 일부가 좋아했던 이 K-트렌드가 최근에는 BTS, 블랙핑크, <사랑의 불시착>, <이태원클라쓰> 등으로 점점 더 일본 사회 전반으로, 특히 젊은 층에서 폭넓은 사랑과 관심을 받게 되는 걸 보면서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상황들이 펼쳐지고 있어.
그저 한국 음식이 먹고 싶을 때 찾아가던 한인타운 "신오쿠보"가 언젠가부터 젊은 사람들(특히 여성)에게 핫플이 된 거지.
그러다 넷플릭스에서 <경성크리처>라는 신작을 보게 됐지만 딱히 볼 생각을 했던 건 아니었는데 우연히 이 기사를 보고 한번 보기로 했어.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4010536337
기사에서는 과거사 바로잡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해온 서경덕 교수를 인용하며
'경성크리처'에 앞서 애플TV '파친코'가 일제강점기의 일본의 만행을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는 계기였다고 했다. 그는 "강제징용, 일본군 '위안부' 등 일제에 탄압받던 조선인들의 모습과 일본으로 건너간 이들에게 벌어진 관동대지진 학살 등의 역사적 사실을 드라마로 자연스럽게 녹여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사실 내용은 좀 뻔한 클리셰들 때문에 딱히 재밌다고는 말 못하겠는데,
결국엔 관심을 끌어야 돼. 그러려면 '재미'가 필요하지. 학교 역사 수업 사실 재미없잖아. 고리타분하고.
젊은 학생들 중 과연 몇 명이나 관심을 갖겠어. 근데 이걸 흥미진진한 컨텐츠로 풀어내면 얘기가 다르지.
일단 보잖아. 그러면서 생각하겠지. "에이~ 이런 일이 있었다고? 레알? 한번 알아볼까?"
이러면 역사 문제를 접하는 첫 태도부터가 다르지. 그러면서 하나 둘 더 파보게 되고.
물론 <경성크리처> 하나 나왔다고 많은 게 달라지진 않겠지. 하지만 역사적인 이슈에 대한 관심도를 올릴 수 있는 좋은 컨텐츠적 시도였다고 생각해. 아마 일본 시청자들의 이런 반발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그럼에도 냈다는 건 이제 한국이 컨텐츠적인 자신감의 표현이라고도 보여.
제작사가 이런 한일 과거사 해결 같은 거창한 포부를 가진 건 아니겠지만 이렇게 차츰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도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된 시점에서 이런 컨텐츠들이 제작되고 있는 건 의미있는 시도 같아.
여기에는 당연히 유튜브, 넷플릭스 같은 플랫폼들이 큰 역할을 했는데, 정부가 하는 그 어떤 활동이나 교과서가 할 수 있는 것보다 자연스러운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네이버 같은 한국 플랫폼이 아닌 글로벌 플랫폼이라 오히려 반감 없이 일본인들이 한국 컨텐츠를 접하기도 쉽고.
즉 문제는 '고리타분한 정책'이 아니라 '관심을 끄는 엔터테인먼트'라는 소리지.
이를 상징하는 게 바로 '넷플릭스'이기 때문에 (전체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많은) 일본 국민들이 한국에 대한 호감과 관심을 생기게 하고 그것이 일본 정부 입장 변화에도 영향력을 가할 수 있는 bottom-up 움직임의 시발점이 될 가능성이 그래도 눈꼽만큼은 있을 거라고 믿고 싶어 ㅎ
한국에 호의적인 사람이 늘어나는 마당에 한국과 자꾸 싸우려고 하는 정권과 사람은 안 뽑아주려고 하겠고 결국 예전엔 극우 후원자들 눈치만 보던 정치인들도 슬슬 이런 유권자들의 눈총이 신경 쓰이지 않겠어?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건 고려할 요소조차도 아녔겠지)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건 넷플릭스는 글로벌 플랫폼이잖아.
비단 일본인들의 관심만 유도하는 게 아니라 이런 민감한 이슈들에 대해 글로벌 오디언스의 관심을 끌어낼 수 있다는 거야. 위안부, 생체실험 등 일본의 과거사에 대해 인권에 민감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유도해야 일본 정부에도 압박이 되겠지.
즉 일본 내부적인 변화와 더불어 국제사회의 목소리라는 대내외적인 요소가 맞물려야 비로소 변화를 이끌어내기 좋은 환경이 될 거라는 거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에서도 국제(외교)사회에서 상대적으로 힘이 없는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민간단체들의 목소리가 이스라엘 정부에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듯 (어느 쪽이 맞고 틀린 건 논외로 하더라도)
사라예보에서의 암살로 세계1차대전이 시작됐듯, 인류사의 커다란 사건은 의외로 작은 단초에서 시작된 경우가 적지 않아.
뭐 사실 이런 컨텐츠들이 뭔가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아직도 정말 나이브함 그 자체일 수도 있지만 결국 외투를 벗기는 건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살이었다는 우화를 생각해 보자구.
대부분의 한국 드라마가 그렇듯이, 결국은 기승전'사랑'으로 잘 마무리했으면 하는 바램이야
처음엔 총을 겨누었던 관계지만 많은 다툼 속에서 서로가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대관절 한국이 속한 동북아는 피튀기는 곳이야. 이웃들끼리 싸우면 답 없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