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는 뭔가를 얻으려 갔다면, 두 번째는 뭔가를 내려놓으려 갔다
첫 번째 인도 여행이 뭔가를 얻으려 갔다면
두 번째 인도 여행은 뭔가를 내려놓으려 갔다.
인도에 답을 찾으려 갔던 내가
답이라고 생각했던 걸 내려놓으려고 갔다.
반대되는 이유로 인도로 떠난 것이다.
얻기 위해서, 내려놓기 위해서.
언뜻 보면 반대되는 이유처럼 보인다.
그런데 두 번의 여행 모두
온전히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이었다.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만약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하려던 일을 할 것인가’
언제 죽음이 찾아올지 모르고
그런 날이 온다면 후회하고 싶지 않다.
언제 마지막으로 물었는지 생각이 안 날 만큼
오랜만에 물었다.
답은 ‘NO’였다.
내 마음을 기준으로,
행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랫동안 앞만 보고 달려왔더니 많이 지쳐 있었다.
20대는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살았고 후회 없이 살았다.
30대가 되면서 남들처럼 안정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사서 대출을 갚아 나갔다.
결혼을 했더니 가정을 계획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나를 짓눌렀다.
이런 무거운 짐들은 하루하루를 걱정 속에 살게 했다.
일단 내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짐을 내려놓기로 했다.
가장 처음 내려놓은 일은
5년간 함께 했던 친구의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었다.
친구는 나를 붙잡기 위해서 끈질기게 이유를 물었다.
내 대답은 단순하고 명확했다.
‘지금처럼 살다 죽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
그렇게 아무런 대책 없이 회사를 때려치웠다.
절대 이룰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서른 즈음에 다시 인도’라는 꿈도
더 이상 꿈이 아니었다.
고작 몇 달을 버틸 수 있는 퇴직금이 있었다.
‘일을 안 하고 몇 달이나 버틸 수 있다니!’
‘설마 내가 죽기야 하겠어? 어떻게든 살아갈 거야’
갑자기 긍정의 아이콘이라도 된 것 같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지는 모르겠고
이왕 짐을 내려놓기로 다짐한 거
몽땅 내려놓을 수 있게 만드는 인도를 가기로 했다.
그리곤 행복하게 짐을 싸기 시작했다.
잘 쓰지도 않을 짐들을
배낭 한가득 채우면서.
어차피 한 지역에서만 지낼 거라
35L 면 충분하다며 새로운 배낭을 산다.
30L 배낭을 들고 다닌 11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스스로 뿌듯해했다.
리터 수는 비슷하지만 가격은 10배였다.
평소에 갖고 싶었지만 쓸 일이 없어 못 샀던
여우 모양 로고의 배낭을 산 것이다.
여행 중에 블로그 포스팅을 할 수도 있으니 컴퓨터가 필요했다.
두 개의 맥북이 있었지만 작업용이라 둘 다 무거웠다.
아이패드도 있지만 키보드를 붙여가면 역시나 무겁다.
매우 가벼운 구형 모델의 중고 맥북을 새로 산다.
여행할 때는 휴대폰만 한 리코 카메라를 가져간다.
신혼여행지로 유명한 도시를 가니까
거기서 만날지도 모르는 신혼부부를 위해
무거운 DSLR, 충전기, 여분 배터리까지 챙긴다.
여행에서 사진만 한 선물은 없다.
11년 전에 우다이뿌르에서 찍은 사진들을
출력해서 선물로 챙겨간다.
이번 여행에서는 찍은 사진을 바로 선물로 주고 싶었다.
폴라로이드 겸 프린터 기능이 있는 카메라를 산다.
*이 물건은 앞으로 여행을 수백 번 가도 들고 갈 예정이다.
이제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에게
소중한 추억과 웃음을 선물할 수 있었다.
유튜브를 하진 않지만
혼자만의 여행이니 영상을 많이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유튜버들이 많이 쓴다는
휴대용 영상 촬영 카메라를 중고로 산다.
옛날 감성으로 노래를 듣겠다고
거의 10년 간 써본 적이 없는
에어팟 클래식을 꺼낸다.
가져갈 전자제품들은 위탁수하물로 부칠 수 없었다.
비행기에 들고 탈만한 백팩이 하나 필요했다.
눈여겨봤던 여우 모양 로고의 16L 백팩을 산다.
펜으로 메모를 하거나 일기를 쓰고 싶었다.
휴대가 간편한 매우 작은 수첩 몇 개를 산다.
인도에선 세수를 해도 한 것 같지가 않았으니
휴대용 필터 샤워기와 여분의 필터를 4개나 더 산다.
인도 숙소의 청결 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가 있으니
숙소에서 쓸 침낭을 중고로 싸게 구매한다.
요가 수업을 들어야 하니
여태껏 한 번도 쓴 적이 없던 휴대용 요가 매트를
배낭 옆에 고정시킨다.
수건의 위생 상태를 알 수 없으니
갖고 있던 스포츠 타월 세 개를 챙긴다.
손빨래를 하면 방에 걸어 놔야 하니
휴대용 옷걸이를 산다.
단발머리라 드라이가 필수니
가볍고 성능 좋은 휴대용 드라이기를 하나 구매한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서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으니 10년도 더 지난 이북 리더기
크레마 카르타를 챙긴다.
편하고 잘 마르는 옷을 가져가기엔
기능성 의류가 좋으니
일상복으로 입기에도 괜찮은 운동복을 잔뜩 산다.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인도는 어떤 여행지보다도 짐을 내려놓게 한다.
아니, 내려놓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깨가 너무 아프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 화장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땀이 줄줄 흘러 다 지워진다.
강한 햇빛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선크림만 잔뜩 바른다.
필요 없는 짐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핑계로 준비물을 사는데
여행 경비보다 더 많은 돈을 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스스로에게 그동안 얼마나 쓸모없는 걱정들을
하고 살았는지 보여주려 애쓰는듯 했다.
가이드북과 침낭, 티셔츠 2장 들고 갔던
11년 전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죽기 밖에 더 하겠어?’는 어느새
‘설마 죽기야 하겠어?’가 돼 버렸다.
죽기엔 아직 좀 젊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못 해본 것도 많아 보였다.
뭔가 많은 걸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실제로 필요한 것보다
필요할 것 같은 물건이 훨씬 많았다.
잃을 게 없던 스무 살의 나와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짐을 싸면서도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막상 가면 버리거나 누군가에게 주거나
쓰지도 않고 가져오게 될 거라는 사실을.
불편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가는 인도 여행.
필요 없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챙기는 짐.
쓸모없는 걱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놓지 못하는 생각.
나에게 두 번째 인도 여행은.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마음으로 내려놓지 못하는 것들을
내려놓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었다.
가족이 더 생기면 지금 사는 아파트가
작을 거라며 큰 평수 아파트로
이사 가고 싶었다.
사실, 남편이랑 둘이 살기에 지금 사는 집도 충분하다.
언젠가 교통사고가 날지도 모르니
안전하기로 유명한 외제 SUV가 갖고 싶었다.
사실, 운전은 안전하게 하면 되고
엄마가 3년쯤 타다가 넘겨준 승용차는
앞으로 10년쯤 더 타도 멈추진 않을 거다.
인도에 지내는 동안
가져간 짐들을 버리거나, 누군가에게 주고 왔다.
드라이기는 다른 지역으로 가는 여행자분께 드렸다.
침낭은 게스트하우스 로비에서
얇은 담요를 깔고 자야 하는 단골 짜이샵 아들이자
11년 전에도, 이번에도 내 친구가 되어준
Jimmy에게 주었다.
어딜가든 그 침낭을 꼭 갖고 갈거라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역시 챙겨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비싼 DSLR 카메라,
한번 써보고 갑자기 먹통이 돼버린 맥북은
고스란히 가져왔다.
내가 직접 그린 그림 4점,
매일 짜이를 마시며 바라보던 그림 1점,
남편이 부탁한 인도산 싱잉볼을 가져오느라
짐의 무게가 드라마틱하게 줄지는 않았다.
인도에서 지내는 한 달 동안,
아직 오지 않은,
어쩌면 평생 오지 않을
미래에 대한 걱정을 내려두고 왔다.
역시 이번 인도 여행도 작은 소망을 이뤘다.
언젠가 다시 잊고 살아갈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지금은 내일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는다.
최대한 필요없는 생각과 짐을 내려놓고
나에게 주어진 오늘,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한다.
신도 아닌, 고작 인간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나에게 인도 여행은
어깨에 무거운 짐을 덜어내고
나 자신을 마주하게 해주는 여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