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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희주 Jan 02. 2018

내 친구 젤리

책을 읽다가 혹은 교정 일을 하다가 우리 이야기 같거나 잔인하거나 더럽거나 야하거나 욕하는 장면이 나오면 사진을 찍어서, 텍스트를 복사해서 젤리에게 보낸다. 얼마 전에는 이런 문장을 보내주었다. “진정으로 친밀한 우정은 실제로 유아기에 가장 헌신적인 육아가 주는 것과 똑같은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 바로 답장이 왔다.

-우리 서로 엄마인 거니?

-그러게. 니가 날 키웠나 봐. 우쭈쭈우쭈쭈.

-손바닥에 세우고 우쭈쭈 한번 해야겠네.

-넌 서울구경 시켜주마.

둘이 또 한참을 그렇게 낄낄거렸다.

열네 살. 귀밑 3센티미터 똑단발. 검은 스타킹에 새하얀 실내화. 어떻게 해도 얌전히 말리지 않고 밖으로 뻗치던 왼쪽 옆머리. 손등을 덮은 교복 재킷. 조금만 움직여도 휙휙 돌아가는 교복 치마. 볼과 턱에 솟아오른 붉은 여드름. 끊임없이 잘게 떨리던 눈동자. 높고 날카로운 웃음소리. 비리고 저린 성장의 냄새가 주변을 떠돌던 그 시절.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때. 우리는 우리의 오늘을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각자의 삶에 서로가 똑같은 색 실을 혹은 각자 좋아하는 색 실을 혹은 듣도 보도 못한 색 실을 한 땀 한 땀 박음질해 넣을 것이란 걸 알 수나 있었을까? 그 실들이 모여 어떤 형태의 무늬를 만들어낼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바느질 솜씨 좋은 젤리가 내게 새긴 흔적들을 가만히 더듬어가다 보면 두 개의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장면 하나. 

눈을 뜨니 하늘이 훤했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걸. 벌떡 일어나 시계를 봤다. 지각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결석도, 조퇴도, 지각도 하지 않는 나였다. 알람 소리가 울리면 벌떡 일어나는 나였다. 왜 그랬을까? 어제 늦게 자지도, 요즘 피곤하지도 않았는데. 화장실로 달려가 세수를 하는데 거울 속에 낯선 사람이 서 있었다. 눈이 퉁퉁 부어 제대로 뜨지도 못하는 낯선 사람. 눈은 또 왜 이럴까? 어제 울면서 잠들지도, 라면을 먹고 자지도 않았는데. 오래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대충 씻고 나와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학교로 뛰었다. 다행히 학교는 뛰어서 5분 정도면 도착할 거리에 있었다.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 서서 발을 동동 굴렀다. 자꾸 시계를 확인했다. 째깍째깍 시계 초침은 앞으로 나아가는데 내 발은 빨간 신호에 막혀 나아가지 못했다. 빨간불이 파란불로 바뀌는 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이 시간이면 학교에 도착하겠다. 선생님한테 혼나겠지?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까? 학교가 저 앞에 보이니 더욱 애가 탔다. 학교를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는데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학교 교복, 단발머리, 늘 보던 가방, 특유의 걸음걸이. 젤리였다. 

저 상습범. 또 지각이네. 슬며시 웃음이 났다. 반가웠다. 동지가 있다는 게 위안이 됐다. 그리고 허탈했다. 평소처럼 자기 속도대로 걷는 젤리의 느긋한 뒷모습을 보니 마치 큰일이라도 난 듯, 조금이라도 빨리 학교에 도착하지 않으면 곧 죽을 것처럼 안달을 해대는 내가 너무 바보같이 느껴졌다.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었다. 나는 젤리에게 뛰어갔다. 학교 건물 입구에서 실내화를 갈아 신고 있는 젤리를 만났다. “넌 지각했는데 어떻게 뛰지도 않냐?” 나도 허리를 굽히고 실내화를 갈아 신으며 말했다. “어차피 늦었는데 뭐.” 젤리가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실내화를 다 신고 고개를 들자 갑자기 젤리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야, 너 눈이 왜 그래?” “나도 몰라.” “이렇게 눈 많이 부은 사람은 처음 본다. 앞은 보여?” “나도 이렇게 부은 건 처음이야. 눈 뜨기 힘들다.” 젤리의 웃음은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장면 둘.

어스름이 내린 저녁. 아빠와 집에 있었다. 아마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을 것이다. 아빠가 커피를 타오라고 시켰거나 내 방 문을 열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생겨났는지 나도 잘 모르는 분노가 모두 아빠에게 향하던 시기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시때때로 돈에 허덕이고, 순간순간 서로에게 으르렁거리는 우리 집 풍경을 만들어낸 사람이 오롯이 아빠 혼자라고, 다 아빠 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답답하고 화가 나고 한시도 이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전화기를 들었다. 젤리네 집에 전화를 걸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학교가 갈라져 젤리가 집에 있을지 없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제발, 제발 집에 있어라. 제발, 제발 나를 좀 꺼내줘. 간절한 심정으로 전화기를 붙잡았다. 다행히 젤리는 집에 있었다. 빌린 책을 돌려준다는 핑계를 대고 집을 나왔다. 젤리네 아파트 단지는 우리 아파트 옆 횡단보도 하나 건너에 있었다. 젤리네 아파트 앞을 서성이고 있으려니 곧 젤리가 내려왔다. “책 벌써 다 읽었어?” 젤리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이 터졌다. 젤리는 당황하지 않고 왜 우냐 묻지 않고 그냥 나를 안아주었다. 나는 젤리의 어깨에 머리를 대고 숨죽여 울었다.

한동안 울고 있는데 목이 아파왔다. 나보다 키가 작은 젤리의 어깨에 머리를 대려니 목을 푹 꺾고 머리를 박은 형국이 되었던 것이다. 둘이 동시에 이상함을 느끼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깔깔깔 웃기 시작했다. “야, 이 땅꼬마야.” “뭐가. 니가 멀대같이 키만 큰 거지.” 서로를 비난하며 웃고 또 웃었다.


항상 그랬다. 내가 남들처럼, 아니 남들만큼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발을 동동 구르고 초조해하면 젤리는 그냥 자기 속도대로 자신의 삶을 걸어가면서 그렇게 애태우지 않아도 된다고, 남들처럼 살지 않아도 혼나지 않는다고, 남들만큼 살지 않아도 큰일 나지 않는다고,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네가 생긴 대로 살아도 된다고 알려주었다.

어딘가에서 상처 입고 돌아오면 젤리는 늘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날 안아주었다. 한 번도 날 비난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네가 잘못한 거라고,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해야 하는 거라고 말하지 않았다. 니가 그렇게 결정했으면 됐어, 니가 그러는 덴 다 이유가 있겠지, 그러면 난 뭘 도와주면 될까? 늘 같은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손재주 있는 젤리는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내 삶에 이처럼 뿌리가 깊고 줄기가 굵고 잎이 넓고 열매가 향기로운 나무 한 그루를 수놓았다. 그리고 이 나무는 나에게 엄마이자 아빠이자 오빠이자 언니이자 동생이자 친구이자 스승이 되었다.

우리는 같이 있으면 늘 웃었다. 울다가도 결국에는 웃었다. 어쩌면 나는 젤리와의 관계를 기준으로 삼고 사람들을 사귀었는지 모른다. 모든 것을 솔직히 이야기할 수 있는 관계, 그래도 비난받지 않으리라는 혼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는 관계, 내가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관계, 반대로 상대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관계, 때로는 작은 일에 서운해하고 삐지고 다투기도 하지만 결국엔 별것도 아닌 일로 또 웃고 마는 관계….

이런 이유일 것이다. 나에게 친구가 많지 않은 건. 마음을 나누지 않는 관계를 힘들어하는 건. “너 친구 없잖아.” “네가 만나는 사람이 뻔하지.” 이런 타박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건. 오히려 자랑스러운 건. 내 주위에 우뚝우뚝 서서 나를 믿어주는, 내 말을 들어주는 친구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조금 더 따뜻한 사람이 된다면, 조금 더 나누는 사람이 된다면, 조금 더 잘 듣는 사람이 된다면, 조금 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면 그건 모두 이 친구들 덕분이다. 그리고 나는 내 인생에 찾아온 이 행운들을 양껏 맘껏 누릴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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