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썩, 거실 소파에 앉았다. 오전에 베란다 문 앞에서 얼쩡거리던 햇살이 슬금슬금 엉덩이를 움직여 어느덧 거실 끝, 내 방 앞까지 도달해 있다. 늦은 오후. 이제 한 시간 남짓 지나면 햇살은 무거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겠지. 안녕, 내일 또 올게. 자신이 뭉근하게 데워놓은 자리를 우리에게 양보한 채.
아직 머물러 있는 빛 속에 몸을 담그고 거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을 바라봤다. 가로 한 줄에 약 140권, 세로로 여섯 줄, 두 겹으로 겹겹이 꽂아놓은 곳에선 더하고 텔레비전이 있는 공간에선 빼고 하면 대략 천여 권의 책이 나를 마주 보고 있다. 세계문학전집, 내가 편집한 혹은 교정 본 책, 좋은 글 쓰라고 지인들이 선물해준 책, 재밌을 것 같아서, 고전이라고 하기에 하나둘 사 모은 책.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서로 등을 맞대고 종이를 부비적대며 옆 책에 기대어 시간을 견뎌온 책들. 이 책들은 자신의 이웃이 마음에 들까? 대강대강 내 마음대로 이리 꽂아놓고 저리 쌓아놓았는데. 옆 책이 너무 소란스럽다고, 위층 책이 너무 재미없다고, 아래층 책이 혼자 잘난 척한다고 다툼이 일지는 않는지. 하루키 선생님, 옆에 있는 폴 오스터 선생님이 마음에 드시나요? 프리모 레비 선생님, 아래층 서경식 선생님과 인사는 하셨는지요? 위에 놓인 리베카 솔닛 선생님과는요?
나는 무릎을 세워 앉고 책의 에너지에 대해 생각했다. 책 한 권 한 권에 담긴, 글쓴이가 쏟아부은 에너지에 대해서. 시간과 공간을 건너 이곳 우리 집 책장에 자리 잡은 에너지에 대해서. 위층, 아래층, 옆 칸의 책과 어우러져 늘어나고 줄어들 에너지에 대해서.
몇 해 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느낀 압도적인 에너지가 떠올랐다. 사람보다 그림이 많은 공간에 들어섰을 때 벽에 걸린 그림들이 앞다투어 뿜어내던 에너지. 그것이 공간 안에 가득 차서 방문자인 나에게 확 다가들던 느낌. 그때 처음 알았다. 작가가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린 그림에는 정말 그 사람의 혼이라는 것, 기운이라는 것, 에너지라는 것이 담기는구나. 그것이 시공간을 넘어 전해지는구나.
사람보다 책이 많은 공간에 앉아 나는 책의 에너지를 느끼려고, 책의 소리를 들으려고 살포시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실패. 너무 익숙해진 건가, 우리는? 아니면 읽은 책보다 안 읽은 책이 많기 때문일까? 책장을 열고 페이지를 넘기며 작가와 교감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완의 것으로, 미미한 에너지로, 발아하지 않은 씨앗으로 남아 있는 걸까? 그래서 내게 다가오지 않는 거니?
나는 내가 이 생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한 권의 책을 읽은 순간을 기억한다. 아마 초등학교 1학년쯤? 아빠가 운영하시던 알루미늄 세시 공장 한쪽 구석에 앉아 책 한 권을 펼쳐들었다. 그리 두껍지 않고, 군데군데 그림이 들어가 있는 책. 책장을 펼치고 닫을 때까지 한자리에 그대로 앉아 내리 책을 읽었다. 고개를 숙일 땐 노르스름했던 햇살이 고개를 들었을 땐 어느덧 짙은 보랏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희열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처음으로 책을 끝까지 다 읽어냈다는 뿌듯함, 성취감이 짜릿하게 몸속을 내달렸고, 몇 시간이고 집중해서 책을 읽어냈다는 자랑스러움이 심장을 쿵쿵쿵 두드렸다. 이제 누가 권하지 않아도, 누군가가 읽어주지 않아도 나 혼자 책을 고르고 읽을 수 있는 세상이 열렸다는 것, 나는 그런 아이가 되었다는 것, 그러니 나는 ‘넌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야’라는 도장을 쾅쾅쾅 받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 이 모든 느낌이, 실감이 나를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책을 옆구리에 끼고 당장 엄마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큰 소리로 자랑했다. “엄마, 저 이 책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어요!”
내가 생에 처음으로 혼자 고르고 읽은 그 책이 북한군을 때려잡는 반공책이 아니라 《소공녀》나 《키다리 아저씨》였다면 어땠을지 생각해본다. 그랬다면, 어쩌면 나는 이야기의 즐거움을 좀 더 일찍 알게 되지 않았을까? 상상의 세계를 좀 더 섬세하게 쌓아올리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책과 좀 더 다른 식의 관계를 맺지 않았을까?
이래서 사람들이 첫인상, 첫 만남, 첫 경험, 첫 직장, 첫 단추 등등 온갖 처음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가 보다. 돌아보면 나는 꽤 오래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야 하는 무엇, 성취감과 뿌듯함을 가져다주는 무엇, 남들 앞에서 “나 그 책 읽었어”라고 으스댈 수 있는 무엇, 나를 좀 더 나은 나로 만들어줄 것 같은 무엇으로 생각했다.
세상에 대한 분노와 우울을 갑옷처럼 장착하고 있던 중고등학생 때는 도피처로, 소설을 쓰겠다고 어슬렁거리던 대학생 때는 의무감으로, 책을 만드는 편집자가 되었을 때는 일로. 책은 내가 어딘가로 갈 때 타고 가는 운송수단 같은 것이었다. 책이 읽고 싶어서 페달을 밟았다기보다는 어딘가에 가기 위해 페달을 밟았다. 필요할 땐 타고 필요하지 않을 땐 비 오는 한길에 세워두고.
책 읽는 게 ‘정말 재밌다’고 느낀 건 불과 몇 년 전부터다. 왜 그랬는지, 어쩌다 재미를 알게 되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페달을 밟고 밟다 보니 요령을 터득해 ‘어랏, 이게 이렇게 재밌었나’ 깨달았을지도 모르고, 그동안 꽤 책을 읽었으니 ‘옛다 그래 이제 이거나 가져라’ 하고 책이 재미를 던져주었을지도 모르고, 무엇을 하든 좀 어설프고 늦된 내가 ‘어멋, 이게 이런 거였어?’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미풍만 불어와도 땅에 머리가 닿도록 이쪽으로 넘어졌다 저쪽으로 넘어지던 마음이 어느 정도 우뚝 서서 이제야 주변을 좀 둘러볼 여유가 생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찌됐든 요즘은 책과 좀 편하게 즐겁게 놀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책은 읽다 말기도 하고, 어떤 책은 너무 좋아서 거듭거듭 읽기도 하고, 어떤 책은 읽고 난 뒤 ‘아, 이 작가랑 친구하고 싶다’, ‘이 작가는 글은 좋지만 나랑은 안 맞는 것 같다’ 혼자 수줍어하다 친구로 삼았다 거리를 두기도 하고, 어떤 책은 읽는 내내 작가랑 대화하는 기분이 들어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하며. 책과 함께 울고 웃고 분노하는 기분. 썩 행복한 기분.
동료 편집자에게 어떤 책에 대해 이야기하다 끝에 “나 이 작가 만나보고 싶어. 그런 기분이 들게 하는 책이야”라는 말을 덧붙였다. 동료는 “아직도 그런 기분이 들어? 나는 책 만들면서 이 꼴 저 꼴 다 봐서 그런지 이제는 그런 생각이 안 들던데”라고 말했다. 조금 부끄러워서 동료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제는’이라고 할 만큼 책을 즐기지 못했다. ‘이제야’ 책이 주는 기쁨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눈앞에 서 있는 천여 권의 책을 보며 책이 주는 기쁨을 알게 된 몸으로 이 책들을 다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읽은 책은 또 읽고 안 읽은 책은 새로 읽고. 그럼 또 어떤 기분이 들려나? 일주일에 한 권씩 읽는다고 치면 한 달에 네 권, 1년이 열두 달이니까 마흔여덟 권, 20년은 넘게 읽어야 다 읽을 수 있는 양이구나. 앞으로 20년은, 아니 그 뒤로도 조곤조곤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책이, 나 혼자만의 착각이지만 그래도 어쨌든 친구가 되었다고 우길 수 있는 미지의 책이 이렇게나 많다니. 막 배부르고, 막 든든하고, 막 설레는 기분.
나는 책장 앞을 서성이며 다시 에너지에 대해 생각했다. 책 한 권 한 권에 담긴, 책을 만들고 파는 그 모든 사람들이 쏟아부은 에너지에 대해서. ‘참 쉽게 나오는 책 없다’ 곳곳에서 터지는 사고에 한숨짓고, ‘어떻게 해야 이 책이 더 많은 사람에게 가 닿을까’ 곳곳에 고민의 흔적인 흰머리를 남기는 그 에너지에 대해서. 누구에게는 참 웬수 같고, 누구에게는 자식 같을 그 복잡미묘오묘한 에너지에 대해서. 더불어 이 책장 안에 담긴 에너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사람들이 책에 담아 전해준 따뜻한 응원의 에너지에 대해서. 내가 읽을 책이 고작 반공책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의 그 빈약한 책장을 이제라도 메우겠다는 듯 다 읽지도 못할 책을 꾸역꾸역 사들인 내 욕심의 에너지에 대해서. 그러고 보면 이 책장에는 희, 노, 애, 락, 애, 오, 욕이 모두 담겨 고구마 뿌리처럼 엉켜 있구나.
문득 책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어졌다. 나에게 책은 기쁨과 위로를 주는 친구이자,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자, 입에 풀칠할 수 있도록 일감을 주는 고용주이자, 내 터전이자 꿈이로구나. 나의 과거이자 미래로구나. 막 고맙고, 막 애틋하고, 교정도 막 더 잘 보고 싶은 기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