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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희주 Mar 16. 2018

교정이나 할까


“나도 교정이나 볼까?”라는 말을 들었다. ‘답답해서 한 소리겠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화가 났다. 아, 난 왜 늘 집에 오면 화가 나는 걸까? 당시에는 잠잠했던 가슴이 왜 뒤늦게 요동치는 걸까? 그때 이렇게 쏘아붙여 줬어야 했는데, 왜 이제와 머리를 쥐어박으며 후회하는 걸까? 화도 제대로 못 내는 내가 바보 같아서, 더 화가 났다.

‘이나’라는 보조사 속에 담긴 무시의 뉘앙스가, ‘이나’라는 말로 내가 좋아하는 일을, 내가 공들여 하고 있는 일을 ‘누구나 마음먹으면 쉽게 할 수 있는 일’로 평가 절하한 그 말이, ‘이나’라는 단 두 음절로 그동안 내가 흘린 땀방울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돌리는 그 태도가 몹시 신경에 거슬렸다.

물론 교정은 누구나 마음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다. 특출 난 재능이 있어야만, 특별한 사람이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누구나, 하고자 한다면, 할 수 있다. 하지만 단언하건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교정은 일종의 기 싸움이다. 원고에는 저자 특유의 생각과 감정이 특유의 문장과 리듬 안에 담겨 있다. 이 살아 움직이는 생각의 덩어리를 조금 더 보편적인, 조금 더 일반적인 기준에 맞추어 다듬는 것이다. 따라서 원고가 생명을 잃지 않도록, 다른 어딘가로 튀어 달아나지 않도록, 모습을 바꾸지 않도록 조심조심 매만져야 한다. 그리고 그러려면 저자의 생각을 압도해 끌고 가겠다는 게 아니라 무작정 끌려가지 않겠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싸움’이라는 말이 너무 폭력적이라면,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싶다면 ‘조율’이라는 표현을 쓰자. “손님 얼마나 자를까요?” “끝에만 살짝 다듬어주세요.” “이 정도면 됐나요?” “아뇨, 조금 더 잘라주세요.” “손님, 머리끝이 상했는데 그럼 이번 기회에 상한 부분을 다 잘라내는 게 어떨까요?” 미용실을 찾은 손님을 맞이하듯이 서로 조율하여 그 사람에게 가장 어울리는, 단정하고 예쁜 스타일을 찾아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따라서 끌려가지 않고 버티려면, 내가 생각하는 단정함과 문장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을 절충하려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치열한 대화를 내내 나누어야 한다.

교정은 나와의 싸움이기도 하다. ‘띄어 씀이 원칙이나 붙여 씀도 허용한다’라는, 사실 ‘네 마음대로 하세요’로 해석 가능한 원칙 속에서 흔들림 없는 나만의 기준을 정하고 하나의 원고 안에서 통일성을 갖추어나가야 한다. 원고를 보다 보면 처음에 세운 기준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경우를 만나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그 기준을 밀어붙일 것인지, 다시 새로운 기준을 세울 것인지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사람이 하는 일이므로 늘 실수가 있다. 몇 번을 보아도, 심지어 여러 사람이 몇 번을 보아도 마치 약을 올리는 것처럼 꽁꽁 숨어 있던 실수들이 인쇄된 책 곳곳에서 버젓이 모습을 드러낸다. 항상 내가 불완전하고 부족한 인간이라는 증거를 눈앞에서 마주해야 하는 건 몹시 괴로운 일이다. 실수를 지적당해도 겸허히 받아들이는 단단한 마음,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라면 참 좋겠지만 나는 매번 실수를 지적당하면 움찔해서는 매우 방어적으로 돌변한다. ‘이런, 실수를 했네, 나를 형편없는 교정자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그래서 날 싫어하면 어떡하지’라고 교정 본 원고 상태와 나를 동일시해 자괴감의 땅을 파고 굴속으로 들어간다. 이 모든 과정 또한, 땅굴 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신경을 갉아먹는 과정 또한 교정자가 감내해야 할 부분인 것이다.

“이 일은 해도 해도 쉬워지지가 않아요.”

새로운 원고를 볼 때마다 새로운 대상과 새롭게 기 싸움을 벌여야 하고, 나와의 싸움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살아 있는 말은 시시때때로 변화하고 그 변화하는 말을 따라잡기 위해 공부한다. ‘좀 더 잘하고 싶다. 내가 교정 본 원고는 사람들에게 좀 더 쉽게 읽히고, 오탈자 없고 오류가 없는 상태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한다. ‘멋진 결과물을 내기 위해 저자, 역자, 편집자와 힘을 합하는 좋은 파트너이고 싶다’고 바란다. 10년을 넘게 해도 나에겐 이렇게 어렵기만 한 일을, 이렇게 조심스러운 일을 이나? 이나라고?

생각해보면 출판사에 다니며 편집자로 일할 때도 그랬다. 저자가 글 쓰고 디자이너가 디자인 하고 제작해서 내면 되는 것 아니냐. 편집자가 무슨 일을 하느냐. 굳이 필요 없지 않느냐. 그런 시선으로 보는 사람이 꽤 많았다. 저자를 발굴하고, 원고의 수정·보완점을 제안하고, 목차를 다듬고, 제목을 뽑고, 표지문안을 정리하고, 책의 콘셉트에 맞춰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을 의뢰하고, 보도자료를 작성하며 한가운데 서서 한 권의 책이 나오는 모든 과정에 관여하는 편집자를, 어떤 편집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180도 다른 책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무심코 던지는 말, 말, 말. 물론 돈을 벌기 위해 선택한 직업이고 책은 상품이지만, 이 책이 좀 더 많은 사람에게 가닿기를, 그래서 그들의 가슴을 울리고 영혼을 매만지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외면하는 말, 말, 말.

내가 얼마나 힘든 일을 하는지, 얼마나 어려운 일을 하는지, 얼마나 괴로운지 알아달라는 것이 아니다. 징징거리는 것도 아니다. 모두들 저마다의 철봉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가고 있으리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한다. 위를 쳐다보며 내 손 떨리는 것만 보면 앞뒤좌우에서 함께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사람을, 위태롭게 휘청휘청 흔들리는 사람을, 견디다 못해 철봉 밑에 깊게 파인 절망의 구덩이 속으로 추락하는 사람을 보지 못한다. 그러지 말자고, 잠깐이라도 주위를 둘러보자고, 매달리기가 힘들지 않은 사람은 없지 않겠느냐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은 참 쉬워 보인다. 잠깐잠깐 보기 때문에, 직접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고충이 숨어 있는지 잘 모르기 마련이다. 잘 모르면, 잘 모르니까 더 조심해야 하는데 마치 다 아는 것처럼 나서서 말로 타인의 삶을 난도질한다.

“나도 사업이나 할까?” “공무원 시험이나 봐.” “집에서 살림이나 하면 좋겠다.” 업을, 그 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폄하하는 말, 말, 말.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삶이 마냥 쉬운 사람도 없다. 겉으론 쉬워 보여도 하다 보면, 살다 보면 마치 약을 올리는 것처럼 꽁꽁 숨어 있던 난관들이 곳곳에서 버젓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 힘겹게 난관을 극복하고 있는 사람들의 어깨를 눌러 주저앉히는 무거운 말들을 하나둘 올려놓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사실 나도 자주 생각하고, 곧잘 입으로 내뱉었다. ‘일은 일대로 하고 돈은 쥐꼬리만큼 버는 교정 일 때려치우고 취직이나 할까?’ ‘시골에 내려가서 농사나 지을까?’ ‘취집해서 살림이나 하면 좋겠네.’ 내뱉을 땐 한없이 가벼웠던 말의 무게가 돌아올 땐 이렇게 무거워지는지 미처 알지 못했다. 마음가짐이 말로 나타나기도 하고, 말이 마음가짐을 결정하기도 한다. 말은 영혼을 담는 그릇이지만 어떤 그릇에 담기느냐에 따라 영혼의 모양이 달라지기도 한다. ‘이나’라는 마음가짐으로 어떤 일을 시작한다면 그 일을 잘 꾸려갈 수 있을까? 어떤 일의 시작점이 ‘이나’라면 그건 좋은 출발이 아닐 것이다. 그런 자세로 살아도 될 만큼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

부글부글 끓어서 “열 받아”, “짜증 나” 얼굴을 달아오르게 했던 화가 내 모습을 돌아보면서 조금씩 가라앉았다. 사전에서 ‘이나’의 뜻을 찾아보니 “마음에 차지 않는 선택 또는 최소한 허용되어야 할 선택이라는 뜻의 보조사”라고 나와 있다. 역시 건방진 보조사군. 내가 화가 난 이유가 있었어. 고개를 끄덕끄덕.



네 상황이 답답할 수는 있겠다. 별 생각 없이 그 말이 나왔을 수도 있겠지. 내가 걱정 없이 편하게 사는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고. 하지만 그렇다고 너에게 내 일을 무시할 권리는 없단다. 우리 그렇게 살지 말자. 이 #$%&*$%^@야! 아, 이제 좀 속이 후련하다.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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