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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인칭 Nov 25. 2016

#17<걷기왕> 엔딩크레딧 5분 후, 소순이의 삶

영화 <걷기왕>에는 누군가 간절히 하고 싶었으나 ‘루저’로 내몰릴까봐 하지 못했던 말이 담겨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그들을 루저로 부르는 사람들에 대한 의도적인 몰이해로 점철되어 있기도 하다. 두 입장은 (공정한 입장은 아니지만) 영화 내내 충돌한다. 


‘내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라’고 외치는 사람들과, 자신이 한 때 그런 입장이었음을 깨닫지 못하고 ‘정신 차리고 어서 달려라’고 채근하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만든다. 나는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나는 만복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입장에 서서 <걷기왕> 끝나고 5분을 재구성해 봤다.

만복이는 걷기만 하면 될까. 뛰지 말고 걸으라 혹은 뛰든 걷든 신경 쓰지 말라는 메시지는 만복이 담임 선생님의 조언보다 현명한 것일까. 


영화 <걷기왕> 포스터




때가 왔다. 겨울을 나는 동안 외양간은 부쩍 좁아졌다. 갑자기 더부살이하게 된 송아지의 몸이 제법 실팍해진 탓이었다. 없는 젖을 달라고 배 밑으로 집요하게 기어들던 송아지는 이제 까슬까슬한 여물의 맛을 알아버릴 만큼 자라 있었다. 좁은 여물통에서 녀석과 주둥이를 섞다보니 화가 치밀었다. 

음메-

 한참을 울었지만 마중 나오는 울음소리는 없었다. 마을 여기저기에서 대꾸하듯 들려오던 다른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지가 한참이었다. 

 “왜 그래 소순아” 

 울음소리를 듣고 만복이와 만복 아버지가 종종걸음 치며 다가왔다. 여행 준비에 아침부터 설레어 있던 만복이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소순이 언니 떠난다니까 섭섭하구나? 언니가 대학 가서 공부 열심히 하고, 멋진 소설가가 되어 돌아올게.” 

 대학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많이 들어본 것 같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공부라는 것은 아주 익숙했다. 그것은 만복이를 지난 몇 년간 매일 밤낮으로 걷게 만든 것이었다. 나는 안다. 만복이는 공부라는 것에 소질이 없다. 만복 아버지가 만복이 공부 이야기를 할 때마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음메-

“오 복순아, 알겠다고?”

 아니 때려치우라고. 만복이의 공부라는 것과 만복 아버지가 최근 나를 바라보는 끈적끈적한 눈빛, 무엇보다 새로 들여온 송아지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만복이가 공부라는 것을 고집한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언니 이만 갈게.” 

 이대로 만복이를 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절박하게 울었다.

 음메-

 “그래. 언니도 힘낼게. 소순이도 새끼 많이 낳고 잘 살고 있어.”

 아니 때려치우라고. 새끼는 어떻게 또 낳아 볼 테니까 제발 그 공부라는 것 때려치우라고. 그러나 만복이는 그 어느 때보다 가벼운 발걸음과 함께 논둑 사이 길 너머로 사라버렸다. 만복 아버지는 그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다가 또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만복이와 소순이 ⓒ 심은경 인스타그램


 “아니 차도 못 타는 게 서울 가서 어쩌겠다고...”

 만복 아버지는 착잡한 눈빛으로 길 끝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주머니를 뒤저거렸다. 거기에서는 짤랑거리는 쇳소리가 났다. 그래. 얼른 가서 말려야지. 쟤는 공부에 소질이 없어. 만복 아버지! 

 “우리도 가자 소순아.”

 그러나 만복 아버지는 전에 없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외양간 문을 열었다. 만복 아버지가 나를 외양간 밖으로 이끄는데 코뚜레가 전에 없이 화끈거렸고 방광이 미칠 듯 조여 왔다. 때가 온 것이었다.

 음메-

 “어쩌겠냐, 소순아. 늙은 숫소가 얼마나 하겠냐만 만복이 대학 보내려면 군입이라도 하나 줄여야지.”

 그래. 대학이라는 말을 어디에서 들었는지 기억이 났다. 몇 해 전 마을 아이들이 한꺼번에 대학이라는 곳에 간다고 했을 때, 마을 소가 씨가 말랐었다. 아이들이 걷거나, 달리거나, 차를 타면 소가 사라지는 것, 그게 대학이라는 거구나.

 “그동안 수고했다 소순아.”

 만복 아버지가 투박한 손으로 부드럽게 내 등을 쓸며 고삐를 당겼다. 나는 평생 그래왔듯 만복 아버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처음으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내가 아니었다. 쌀독을 드나드는 생쥐를 보고 눈이 뒤집혀서 쫓거나, 바람이 차가워질 때 목구멍에서 울컥 솟아오른 숨결을 따라 고개를 움직일 때와는 달랐다. 이렇게 걷는 것은.

 음메- 

 만복 아버지의 고함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코뚜레가 잠시 조여 왔지만 곧 느슨해졌다. 야 임마! 만복 아버지의 새된 소리가 엉덩이를 때린 것 같았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의지로 달리기 시작했다. 몸은 무거웠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몸에서 내지르는 비명을 무시하고 계속 달렸다. 발굽이 돌바닥을 깨칠 듯 달리다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만복이가 보였다.

 두 팔을 팔랑이며 하늘을 날 듯 걷고 있는 만복이, 나는 이내 만복이를 앞지르고 그대로,

끝도 없이 달려 나갔다.


영화 <걷기왕> 스틸컷. 선망에 내맡긴 삶은 때로 허망하고, 또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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