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영화 <도리를 찾아서>가 어안렌즈로 바라본 현실
악의는 도처에 널려 있어서 스스로 방어하지 못하는 모든 이의 삶을 공격한다. 특정 상황에서 비장애인들보다 더 무력한 중증 장애인의 삶은 특히 신산하다. 발달 장애, 지체 장애, 언어 장애 등의 명칭에는 이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려움을 느끼는지가 잘 드러나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삶의 상처에서 나는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상어’같은 이들로 가득한 현실 속에서 장애인의 보호자는 한 시도 안심할 수 없다.
그래서 거칠어진다. 그들은 아무도 맘 편히 믿을 수 없다. 심지어 활동보조인에게마저 의심의 눈길을 거둘 수 없어서 괴롭다. 최근 충주의 한 미용실 주인은 뇌 병변 장애를 앓는 장애인에게 염색비로 52만원을 갈취했다. 미용실조차 마음 편히 가지 못할 정도로 장애인에 대한 악의와 착취가 만연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중증 장애인 보호자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장애를 앓는)가족보다 하루 더 살고 싶다.”말이 심심찮게 나온다.
도리의 바다는 현실의 바다와 다르다
<도리를 찾아서>는 바다에서 살아가기 어려운 바다 생물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나 사실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가기 어려워하는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다. 고래상어 ‘데스티니’는 한치 앞도 분간하지 못할 만큼 시력이 나쁘고, 하얀 벨루가 돌고래 ‘베일리’는 선천적으로 주어진 초음파를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혼란스럽다. 문어 행크는 다리 하나가 없다. 그들은 모두 ‘시고니 위버 해양생물 연구소’에 머무르며 바다로 나가기를 꺼려한다.
그 중에서도 블루 탱 종인 ‘도리’는 가장 위태로워 보인다. 도리는 단기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다. 심지어 시종 기억을 되새겨주지 않으면 삶을 지탱하는 근본적인 기억도 까무룩 사라진다. 생존 본능, 규칙, 사랑하는 이들을 자꾸만 잊는 도리는 악의로 가득 찬 세상에 대한 방어력이 전혀 없어 보인다. 그녀의 삶을 지탱해주던 부모와 불의의 사고로 헤어진 이후에는 부모에 대한 기억마저 잃는다. 이제 그녀는 무엇으로 세상에 맞설 것인가.
그러나 도리의 바다는 현실의 바다와 달랐다. 어려움에 부닥친 그녀가 소리 높여 도움을 청할 때마다 바다 생물들은 귀를 기울인다. 도리의 요청을 받은 바다 생물들은 무심하게 제 갈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슨 일이냐.’고 묻고 도움을 주려 애쓴다. 또한 기억을 잃은 그녀를 ‘등쳐먹으려’고 드는 이도 없다. 기억을 잃은 도리가 좌충우돌하면서도 부모의 염려와는 달리 잘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다.
무엇보다 친구들이 있다. 도리의 친구들은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추듯 무력한 부분을 메꿔준다. 배수 파이프에서 도리가 또 다시 기억을 잃었을 때도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눈이 어두운 데스티니가 도리의 입과 귀가 되어주고, 착란에 빠져 자신감을 잃은 베일리가 도리의 눈이 되어준다. 게다가 애초에 자신감이 부족했던 데스티니와 베일리가 변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를 찾아 바다에서 온 도리의 존재 덕분이다.
다리 하나를 잃은 문어 행크도 도리를 돕는다. 처음에는 바다에 가지 않고 수족관에 남기 위해 협조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도리와 함께 하는 동안 그 어떤 바다생물도 하지 못할 일을 해내는 행크는 다리가 잘려나갈 때 잃은 것이 다리의 ‘기능’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감과 정체성이라는 사실을 점차 깨달아 간다. 도리 역시 수동적으로 의지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행크가 어려움을 극복하게 도왔던 것이다.
장애는 장애를 부른다.
현실에서는 어려운 일이다. 예컨대 시각장애인은 보이지 않는 것에만 고통 받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때로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고 지식습득과 자유로운 사고마저 제한한다. 당연하게도 이는 시각적 장애 요소 때문이 아니다. 사소하게는 시각장애인의 안내견을 쫓아내는 것이나 철저하게 비장애인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점자 안내문처럼 장애 극복에 소극적이거나 나아가 적대적이기까지 한 사회 때문이다.
엄혹한 사회일수록 장애는 장애를 부른다. 하나의 장애가 시민에게 응당 주어져야 할 기본권을 연쇄적으로 박탈하지 않도록 고민해야 함에도 우리 사회는 장애를 ‘스스로 방어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해 방치하고 공격한다. 장애인등급제나, 장애인 이동권 운동에 대한 차가운 시선은 우리 사회에 인도주의적인 시선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장애인들이 마땅히 쟁취해야 할 기본권을 폭력적으로 파괴하는 것에 가깝다.
현실 속에서 도리와 친구들이 서로 도우며 당당할 수 있을까. 어려울 것이다. 일부 무력한 부분을 메꿔주기는커녕 ‘장애의 연쇄’ 속에서 온갖 삶의 장애에 고통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설령 의지하기 위해 모여든다고 해도 그들은 곧 ‘기피할 것’이 된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장애인을 위한 공적 시설이 지역 주민들의 반발을 산다는 이유로 이름을 바꿔 달기도 한다. 그러는 동안 장애인은 소위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격리되어 왔던 것이다.
따라서 <도리를 찾아서>속 캐릭터들이 마치 ‘도울 준비는 되어 있다.’는 듯 돕고 의존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한국 사회에 비춰보면 비현실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의 미덕이 그것이다. 애니메이션이 아이들에게 전하는 ‘상상의 현실’은, 곧 성인들이 보고 느끼는 병든 현실의 왜곡이자 청사진이다. <도리를 찾아서>는 장애인이 서로 돕고 자립해서 살아가기 어려운 현실을 어안렌즈로 바라보듯 우그러뜨려 청사진을 제시한다.
내가 도리라면 어떻게 했을까
다친 바다 생물들을 찾아서 치료하고 돌려주는 것이 모토라는 ‘시고니 위버 해양생물 연구소’에는 바다 생물들을 만져 보는 전시관이 있다. 구경하러 온 아이들이 손가락으로 툭툭 찌르며 해양 생물들을 ‘경험하는’ 동안, 바다 생물들은 괴로움에 몸부림친다. 상처 입은 이들에게 보이는 피상적인 관심이 얼마나 폭력적인 것일 수 있는지가 드러난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차별적으로 잡아들이지 않는 것’과 ‘약속한 대로 돌려보내주는 것’이지 구경거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호주 코미디언 스텔라 영은 의족 스프린터에게 쏟아지는 사람들의 관심을 ‘감동 포르노’라고 비판했다. 장애인들의 역경이 비장애인의 동기 부여를 위해 ‘쓰이는’ 현실을 비판한 것이다. 비장애인을 특별하거나 불행한 사람으로 보는 시선에서 편견과 차별도 생기기 때문이다. 그녀는 트위터 계정에 자신을 코미디언, 뜨개질하는 사람, 장애인 순서로 소개했다. 장애도 정체성의 일부이지만 ‘무조건 우선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내가 (장애를 가진) 도리라면 어떻게 했을까. 상상만 해도 버거운 질문이다. 그러나 도리의 친구들은 오히려 어려움에 닥쳤을 ‘내가 도리라면 어떻게 했을까?’고 질문을 던진다.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기능을 상실했다고 생각한 도리가 사실은 혼자서도 그 누구보다 잘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는 장애를 가진 이들이 그저 홀로 설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