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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인칭 Aug 04. 2016

#4 <부산행> 아포칼립스, 그 생사여탈의 철학

누구를 죽이고, 살릴 것인가.


다음 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죽음의 중지> 의 첫 문장이다. 이 소설은 사회의 다른 기능은 그대로인 상태에서 거짓말처럼 죽음만 기능하지 않게 된 혼란스런 사회를 상상한다. 장의업체는 일감이 사라졌다고 울상이고 보건복지부와 병원은 끔찍한 상처를 입고도 살아남은 환자들에게 병상을 분배하는데 골머리를 앓으며 정부는 끝내 죽음을 원하는 내국인의 ‘유출’과, 죽음을 원치 않는 외국인의 ‘유입’을 두고 고민한다.  


죽음이 기능하지 않고 자연스레 삶이 정체된 사회에서 주제 사라마구는 철학적 질문을 던지기보다 온갖 행정적 사회적 난맥상을 짚는다. 그 결과 ‘덜 죽고 덜 태어나는’ 현대 사회가 맞닥뜨릴만한 공포가 과장되게, 그러나 여과 없이 드러난다. 이처럼 삶과 죽음의 톱니바퀴를 의도적으로 어긋나게 할 경우,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회가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 것인지가 드러난다. 또한 체념하듯 받아들이게 되는 사회적 문제점들도 낱낱이 폭로된다.


영화 <나는 전설이다>포스터. 좀비 속에 홀로 인간으로 남은 주인공  ⓒ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좀비 영화’는 삶과 죽음을 전복하면서도 다시 천연덕스럽게 섞어놓음으로써 주제 사라마구가 던진 것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물론 좀비도 초기에는 부두교의 괴물로 등장하여 흡혈귀나 늑대인간처럼 제한된 장소에서 재앙을 불러왔다. 그러나 세기말에 대한 염증과 신세기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진 밀레니엄을 전후로는그 양상이 바뀌었다. 세계전반에 동시다발적으로 좀비가 출몰하여 기존 사회는 종말하고 그 속에서 극히 일부만 살아남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누구를 죽이고 누구를 살리느냐’ 하는 것은 단순히 서바이벌의 재미만 부여하지 않는다. 도무지 뿌리칠 수 없는 세기말의 문제점을 고발하고 한편으로는 다가올 신세기를 설계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예컨대 <나는 전설이다>는 이를 극대화시켜 아예 홀로 살아남은 윌 스미스를 전설 속 화석 인류로, ‘좀비’들은 신인류인 것처럼 그리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좀비 영화 <부산행>은 어떤 종말, 어떤 출발을 그릴까.


용석은 생사여탈권을 행사한다


용석(김의성)은 열차를 통제하고 생사여탈권을 확보한다. ⓒ NEW


영화 <부산행>은 재난 영화와 좀비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클리셰로 가득하다. 많은 이야기가 생략됐고 애초에 그걸 설명할 의지도 없다. 영화는 서울에서 부산으로 나아가는 KTX처럼 우직하게 끝을 향해 나아가며 사소한 개연성은 창밖의 풍경처럼 날려버린다. 그 가운데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충실히 전달하는 것은 열차 한 대와 그 안에 타고 있는 승객들의 생사다. 


핵심인물은 용석(김의성)이다. 그는 감독이 밝힌 대로 영화 내에서 유일하게 현실적인 인물이지만 한편으로는 욕망으로 가득한 절대 악이다. 그가 영화에서 맡은 역할은 간단하다. 안전하게 살아남아 부산에 닿을 사람과, 그 전에 좀비에게 희생당할 사람을 가리는 것이다. ‘천리마 고속 상무’라는 직함이 큰 권위를 가진 것은 아님에도 엄격한 관료처럼 정장을 빼 입고 시종 열차 안의 정보와 권위, 권력을 틀어쥔 채 생사여탈권을 행사한다.


서사 내적으로만 보면 용석은 도움이 되는 사람만 살리려고 한다. 그는 눈치 없이 위험한 곳에서 머뭇거리는 열차 팀장(한성수)을 애써 끌어온다. 일견 이타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열차 안의 주도권을 놓지 않고 기장(정석용)과의 연락망을 틀어쥐기 위함이다. 반면 가까스로 좀비를 피한 석우(공유)일행이 안전 객차로 들어서려고 하자 “그들이 감염되었을지 모른다.”며 쫓아낸다. 석유가 이끌고 온 ‘노약자’들은 도움은커녕 방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용석(김의성)은 열차를 통제하고 생사여탈권을 확보한다. ⓒ NEW


용석의 선택에서 기시감이 느껴진다. 위기로 고립된 객차 안에서 관료 역할을 맡은 용석은 바이러스에 노출되었을지 모르는 약자가 강자의 덜미를 잡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용석의 머릿속에는 어떻게든 자신이 살아남겠다는 생각 밖에 없고, 열차 안의 강자는 차례로 서열화 되어 용석 아래에서는 모두 약자로 전락한다. 용석은 끝내 이용 가치가 사라진 열차 팀장마저 희생시키고 홀로 살아남는다. 각자도생이자 최강자의 생환이다.


한 편으로 용석은 감독의 선택을 대행한다. 영화가 후반부로 치달아가면서 용석은 다소 억지다 싶을 만큼 강박적으로 이기적인 행동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반드시 누군가 죽게 만든다. 좀비가 가득한 열차의 문을 열어놓는다거나 애써 진희(안소희)와 영국(최우식)앞에 좀비를 인도하기도 하며, 자신을 구하러 온 기장을 좀비에게 던져주는 식이다. 인간의 이기주의를 드러낸다기보다 감독이 용석을 통해 생사를 선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특히 펀드 매니저 석우는 죽어야만 하는 인물이다. 다시 말해 삶과 죽음이 섞인 ‘좀비’가 되어야 한다. 상화(마동석)의 편견처럼 부도덕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그는 실체가 없는 숫자로 세상을 재단하고 허위와 진실을 혼동케 한다. 특히 ‘주식 작전’을 통해 좀비 바이러스가 세상에 퍼지게 한 석우는 “정부는 폭동에 잘 대처하고 있다.”고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을 한 관료나 그걸 그대로 받아서 보도한 언론과 동류다. 


석우에게 도덕적 심판을 내려야 한다는 게 아니다. 영화는 석우라는 인간을 완벽히 부도덕한 인물로 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좀비가 출몰하는 상황에서 양심적 고뇌에 빠진 그의 모습은 평범한 현대인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는 인간이 쌓아올린 경제와 사회 질서가 모두 무너진 상황에서 최후의 보루로 남은 부산에 어울리지 않는 상징이다. 석우가 존재하는 부산은 스스로를 파멸시킬 만큼 허위로 가득했던 세기말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진희와 영국도 신세기로 가지 못한다. ‘학생’이란 무엇도 아니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존재다. 따라서 신세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들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학생들 앞에 놓인 미래는 혼탁하다. 기성세대를 부양하느라 아이 낳는 일은 꿈도 꾸기 힘든데 ‘머릿수 부족’으로 발언권은 거세당했다. ‘강자를 위한 약자의 희생’을 외치는 용석이 스쳐지나가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은 세기말을 현실적으로 그린다.


순수한 삶을 온존하기 위한 안간힘


새로운 시작을 제 안에 눌러담은 두 사람 ⓒ NEW

결국 살아남는 것은 성경과 수안이다. 그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저 무력하게 아버지들의 도움만 받는다. ‘아버지들’이 성경과 수안을 보호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이 사태를 불러온 세기말의 폭력과 지배력을 체화하고 있기 때문이었으므로 성경과 수안의 무력함은 곧 ‘결백함’을 의미한다. 영화 속에서 두 사람에게는 ‘임산부’, ‘순진무구한 아이’라는 것 말고 다른 사회적 지위가 없다. 이렇게 보면 두 사람은 무력하기보다 순수한 삶을 제 안에 온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신세기의 인물들이다.  


신세기는 순탄치 않을 것이다. 성경과 수안은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군인들의 총구 앞에 내몰리고, 여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버지에게 바치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 최악의 경우 영화 <워터월드>의 디스토피아처럼 소수의 패악이 더 심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좀비 영화는 우리가 쌓아온 것이 무너졌을 때 유토피아가 가능하다는 종말론이 아니라, 무너지는 과정 속에서 빛나는 미래와 어두운 과거를 분간해 내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죽음의 중지>는 삶과 죽음의 정체가 만들어낸 혼란 속에서 삶도 죽음도 고결함을 잃어버리는 현실을 그렸다. 이처럼 영화 <부산행>도 삶과 죽음이 한 몸에 정체된 좀비들의 습격에서 성경과 수안을 살려냄으로써, 손익 계산에 매몰된 나머지 삶과 성장에 대한 소중함을 잃은 세기말의 어둠을 고발한다. 또한 그걸 해결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신세기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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