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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aris Apr 05. 2020

출장, 파르주, 메카스

영덕으로 출장을 갔다. 우선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포항으로 가서 다시 3량짜리 무궁화호를 타고 동해선을 올라간다. 열차에서 바다가 보일까, 하고 바다 방향으로 나 있는 창문 쪽으로 계속 목을 뺐지만 바다는 가끔씩, 멀리에서만 보였다. 영덕역에서 잘 오지 않는 택시를 타고 법원으로 갔다. 바다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한적한 구석에 위치한 작은 지원은 깨끗하고 예뻐 보였다. 이 근처에서 일하면 어떨까, 하고 하릴없이 생각해 보았다. 재판은 조금 길었고, 재판장은 이미 마음을 정한 듯했고, 상대방 변호사는 연륜이 있어 보였으며, 내 뜻은(즉, 내 의뢰인의 뜻은)이뤄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끝나고 나오는 길에 상대방 변호사가 친근하게 말을 붙이기에 혹시 이 근처의 식당을 아시나요, 하고 무심코 물어보았다. 열차 시간이 빠듯하여 점심도 먹지 못한 채 오후 세 시가 지나자 배가 고팠다. 그녀는 마침 오는 길에 어디어디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괜찮았노라고, 자신의 다소 연식 있는 외제차에 나를 태우고선 무슨 초밥집에 내려주었다. "먼 곳에 올 땐 여행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녀는 아이가 어릴 때 기록과 아이를 나란히 뒷좌석에 태우고 멀리 떠나곤 했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서면으로는 힘든 사람도 얼굴을 보면 다소 정이 간다. 사회적 거리두기로는 알 수 없는 일이 있는 것이라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일생 모토로 삼아 온 나조차도 이제는 조금 그렇게 생각한다.



손님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초밥집에서 초밥을 먹고, 역시 아무도 없는 대로를 천천히 걸어 역사 방향으로 돌아갔지만 할 일이 없었다. 돌아가는 차편이 별로 없어 출발하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역 앞의 예쁜 찻집에서 아를레트 파르주의 [아카이브 취향]을 읽었다. 끝까지 읽고 나자 열차를 탈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맑은 날이라 해가 질 무렵의 능선을 차창으로 바라보는 것도 좋았다. 돌아오는 길에 요나스 메카스의 [행복한 삶의 기록에서 삭제된 기억]을 보았다. 메카스의 이 영화는 자신의 삶에서 기록한 다양한 영상들을 그 자신의 기준에 따라 푸티지로 이어붙이고, 이따금 나레이션과 발췌문들을 넣은 것이다. 열차 바깥으로 보이는 하늘의 빛깔. 이런 광경을 보았다는 것조차 나는 언젠가 잊을 것이다. 메카스는 이 이미지들은 기억이 아니라 진짜라고 말한다. 기억은 사라지지만 이미지들은 지금 여기에 있다고. 진짜들. 내가 잊은 뒤에도 영원히 남아있을.




아를레트 파르주의 [아카이브 취향]은 아카이브를 연구하는 역사가인 파르주의 에세이다. 그가 연구한 18세기 프랑스 파리의 형사사건 아카이브들에서는 무수한 인간의 흔적들이 살아남아 발견된다. "아카이브의 글자들 안에 보관되어 있는 실재의 드라마에서 고발, 항의, 증오, 질투가 차지하는 비중은 사랑과 슬픔이 차지하는 비중과 거의 비슷한 만큼, 작업자는 인간의 이 그늘진 측면, 파괴와 죽음에 끌리는 이 충동을 절대로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이상하게도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그의 일이 나의 일과도 비슷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나는 아직 역사가 되지 않은 아카이브를 수집해야 하기에 그 아카이브 속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서 내게 육성을 들려주고 때로는 힘들게 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히 파르주의 작업에서처럼 사법 체계라는 공고한 문명을 결연히 마주대하는 비정형의 강렬한 정념이, '고발, 항의, 증오, 질투' 그리고 '사랑과 슬픔'이 존재한다. 파르주는 메트라의 글을 인용한다. "인간의 비극은 존재가 자기의 살과 근본적으로 불화한다는 데 있다. 역사를 쓰는 일은 곧 이 불화의 확인 조서를 작성하는 일이다". 성공과 실패는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지만, 내가 잊고 떠난 뒤 먼 미래의 아카이브에서 다른 투쟁의 대상으로 다시 부활할 지 모른다. 그를 기다리며 나는 전염병의 시대에도 아카이브와 몸을 열차에 싣고 어딘가로 간다.


"우리가 저마다 규범을 넘나들 수 있는 수많은 전략들, 규범을 어기지 않을 수 있는 복잡한 노선들을 마련하는 것은 당하고 견디는 삶이 아닌 모색하는 삶, 연대하고 대결하는 삶을 살기 위함이다. 세계에 전망이 있다면, 현실에 존재론이 있다면, 아무것도 물화시키지 않겠다는 그 강경한 의지 속에 있을 것이다. 그때의 말들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말들도 어떤 가능성의 매체가 되고 싶다는 희망을 그 의지에 걸고 있을 것이기에."

아를레트 파르주, 아카이브 취향, 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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