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지금 하는 일을 깊이 사랑하게 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금방 알았다. 전화들. 외근들. 회의들과 종이들. 회의會議일까, 회의懷疑일까? 어쨌든 당분간은 이 운명에 묶였다. 별로 사랑하지 않는 것들 속에 머무르는 일. 어렵지 않다. 여태까지의 인생을 그 일에 바쳐왔다고 해도 좋으리라.
봄의 햇살과 먼지와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사이에서 노동자의 행복을 찾느라 동료와 여기저기를 쏘다닌 끝에 지하철 역 출구 앞의 작은 매점에서 로또를 샀다. 자동으로 할 거면 용지는 필요 없어. 로또 용지 다발을 뒤적이는 초짜들을 보고 아주머니는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6개씩 늘어선 5행의 숫자들. 나는 처음으로 내 돈을 주고 행운의 가능성을 미세하게 품은 숫자들을 사 보았다. 숫자들은 나비처럼 얇고 나풀거렸다.
동료와 나는 최근 아주 쉽게 퇴사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나쁜 버릇이 들었는데, 고용주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이제 다른 은어를 사용해 보기로 했다. "아주 먼 도시로 가자고 하면 어때요. 헬싱키라든지." 나는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슬쩍 끼워넣는다. "이를테면 헬싱키로 갑시다, 라고 하면 퇴사하자는 뜻이에요. 아, 아니면 아예 오로라를 보러 가자고 하는 거에요!" 동료는 찬성한다. 그렇게 우리는 퇴사를 '오로라'라고 부른다. '내가 퇴사를 하면'을 '내가 오로라를 보러 가면'이라고 말한다. '퇴사!'라고 외치고 싶을 때 '오로라!'라고 외친다. 우리는 사실 당분간 서로가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이제 그 망상은 좀 더 아름다워지고 눈부신 광채로 빛난다. 어느 날 문득 누군가가 떠나면 그는 오로라를 향해 간 것이다.
로또가 당첨되면 오로라를 보러 갈 거야. 이 문장 속에는 두 개의 다짐이 포함된다.
언젠가, 겨울의 긴 시험이 끝난 뒤에 오로라를 보러 갈 계획을 세웠다. 늘 겨울을 사랑했었는데, 막상 추위 속에서 혹독한 시험을 치르고 나니 더 이상 다른 먼 겨울의 나라를 찾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 해의 남은 겨울에 나는 남쪽으로만 갔다. 더 따뜻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 차갑고 어둡고 외로운 곳에서 반짝이는 것들을 한없이 기다리기보다는, 눈 앞에 선명하게 펼쳐진 녹음과 하늘과 사람들을 보고 싶었다. 수많은 이들이 몰려가는 뻔하고 가까운 장소에서 확실한 즐거움을 손에 넣고 싶었다.
남쪽 세계의 일자리. 자본주의 세계의 좌표상에서 실패하지 않는 하루들이 5일씩 4개가 모이면 한 달의 숫자들이 급여로 환산된다. 오로라를 가져다 줄 지도 모를 행운의 숫자들보다 단단하고 확실한 숫자들. 그것의 놀라운 신화적 힘이 최선을 다해 오로라 없는 삶을 비루함으로부터 방어한다. 그러나 어째서 선명한 숫자들이 지지하는 시야가 문득 흐려지고, 눈의 안쪽으로는 태양풍의 입자들이 추는 춤을 상상해보는 일이 있는 것일까. 보겠다고 결심하고도 아직 보지 못한 종류의 빛이 있고, 그것은 이 성적표로는 제대로 청산되지 못하는 빚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는 것일까.
세상이 적어 준 적당한 계획표를 따라 어른이 되고 거기서 또다시 어른이 되었는데도 모든 것을 보고 가질 수 없다는 이유로 여전히 망연자실한 아이처럼 서글퍼할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행운이 내게 오지 않는다고 해도 언젠가는 오로라를 보러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