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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aris Feb 15. 2020

200215

"할머니는?" 미용실 원장이 크고 드라마틱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사람의 머리를 하고 있던 와중에도 건너편에 있는 나의 자리까지 한달음에 달려와서. 원장에게 머리를 맡기려면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나는 팀장이라는 직함을 가진 다른 헤어 스타일리스트에게 머리를 맡기고 있다. 팀장과 나는 원장이 다가오기 전에 고객 응대의 고충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무래도 타고나야 하는 것 같다고, 우리는 별 재주가 없다고. "원장님처럼요. 그런 거 엄청 잘 하시죠." 내가 말하자 팀장은 말했다. "그쵸. 그런데, 원장님을 아는 다른 분께 들었는데, 예전에는 그렇게 말이 없으셨대요. 안 믿기죠." "정말요?" "네, 원장님 때는 원장님처럼 미용 전문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다 자부심이 세서, 그렇게 고객에게 살갑거나 하지 않았대요. 요즘은 완전 다르죠." 말수가 적은 원장은 확실히 상상하기 어렵다. 그녀에게 미용실은 무대이고, 그녀는 찬란하게 반짝이는 옷을 입고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노래하는 디바니까. 그러니까 그녀가 다가와서 소프라노와도 같은 어조로 "할머니는?" 그렇게 물을 때조차도, 나는 역시, 원장은 원장이야,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원장에게 다소 압도된 상태로, 나는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잠깐 생각했다. '할머니? 나의 친할머니는 돌아가셨는데?' '외할머니 이야기라면 원장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곧 어머니가 해준 말이 기억이 났다. 몇주 전 외할머니는 상태가 악화되어 의식이 없는 상태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아흔을 넘긴 자그마한 노인에 대한 의학적 전망은 좋지 않았고, 병원에서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이제 자신을 잘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노인을 곧 이 세상에서 잃을 지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와 근심 속에서 며칠 동안 먼 길을 왔다갔다 하며 정신없는 몰골로 지냈다. 그러다 문득, 그 비극이 정말로 닥쳐오면 이 상태로 상을 치르게 되리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고, 오랜만에 머리를 하러 원장에게 갔던 것이다. 이 동네에서 가장 멋지게 머리를 해 주는 미용실의 여왕에게. 나는 마침 새로운 직장에 나가게 되어 너무나 바빴던 나머지 이 모든 사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날 아침에 출근하려고 아침을 먹는데 마주 본 어머니의 머리가 아주 단정하고 아름다워서, 머리가 잘 됐네요, 라고 했던 것은 기억난다. 그 날 퇴근하고 들어오자 어머니는 그간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다행히 괜찮아지셨어요." 나는 매우 낡은 문자 그대로 머리에서 형광등이 켜진 것처럼 이거구나, 하고 위 이야기를 기억해낸 뒤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나와 함께 어머니와 할머니 이야기를 몇 마디 더 나눈 뒤 그녀는 다시 자신의 무대를 건너 돌아갔다. 나는 할머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주 작고 사랑스럽고 늙은 나의 외조모가 많은 것을 기억하지 못하게 된 지 꽤 되었다. 할머니가 떠나게 되면 내가 아주 친근하게 느끼는 그녀의 육신에서 생기가 마침내 떠나가고 영영 보지 못하게 되는 것에 대한 슬픔이야 당연히 적지 않을 테지만, 내게는 오래전에 할머니를 잃은 느낌이 조금은 있다. 내가 그녀에게서 아주 일찍 잊혀졌기 때문이다. 나는 늘 멀리 사는 외손녀였고, 다른 외손녀만큼 살갑거나 애틋한 존재도 아니었으며, 결정적으로 외할머니는 딸들이나 손녀들보다도 손자들과 아들들을 마지막까지 기억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이에 대한 원망은 하지 않았지만, 가장 많이 어머니를 챙기는 딸들이 아닌 아들에 대한 기억과 사랑이 당신 어머니의 희미하게 깜빡이는 뇌 속에서 결국 승리한다는 것에 왠지 아쉬움을 느꼈던 것은 분명하다.


외할머니가 떠나게 되면, 나에게는 어떤 조부모도 남지 않게 된다. 하지만 그보다도 나의 어머니가 고아가 되리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더 쓸쓸하다. 외할머니가 아주 오랫동안 이 우주에 머물렀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미지의 여행객으로서라도 괜찮으니까. 마음이란 이상한 것이다. 이미 세상에 너무 오래 사로잡힌 육신과 영혼이 지쳐 명멸하고 있다는 걸 아는데도, 이제 그 작은 머리 안에는 나에 대한 기억이라곤 은빛 머리칼 한 가닥만큼도 남아있지 않고, 내 모든 것이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아는데도, 무한한 이별의 유예와 소멸의 지연을, 내 손길이 가닿을 수 있는 형체를, 그 존재를 원한다. 그렇게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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