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계절성 우울의 한가운데에서 누군가의 부고를 듣고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저 좋지 않았다고 말하기엔 더 깊은 마음이었지만, 떠난 사람이 그에 대해 이렇게 많이 말해지기를 원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왠지 그녀는, 그냥 여기에 존재하고 싶지 않았을 것만 같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것 외에는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같이 나중에도 이야기되고 싶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도 저도 모두 그저 추측에 불과하며, 떠난 사람은 아무것도 알려주거나 알 수 없으므로, 이 넘겨짚기와 마음씀은 남은 사람의 지극히 자기만족적 윤리와 세상에 대한 작은 영향력을 통제하고자 하는 범위 안에서 벌어지는 일일 뿐이다.
어쨌든 부고를 들은 다음날에 갑자기 한 친구가(그녀는 뮤지컬 덕후인데) 좋아하는 배우의 [헤드윅] 티켓이 남았는데 너무 앞자리라 누군가가 채웠으면 한다며 나를 불러주었다. 사실 나는 그녀의 '최애 배우'에게는 큰 관심이 없고, 연극이나 뮤지컬을 맨 앞자리에서 보는 것도 다소 부담스럽게 생각한다. 얼마 전, 실제 공연보다 영화를 더 편하게 여기는 이유에 대해 쓴 적이 있는데, 그것은 스크린 안쪽의 세상이 나와 철저히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환상이 주는 안정감이었다. 이때 지인 한 분이 [링]의 사다코 이후로 그런 안전함은 사라졌다는 말을 해주셨는데, 이에 깊이 동감하기도 하고 기실 요즘의 스크린 안팎이란 영향력이 계속 교차되는 전장이나 다름없으므로 역시 이는 환상에 불과하다. 다시 돌아와서, 실제 사람이 있는 무대를 바라본다는 것은, 그것도 맨 앞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퍼포머에게 나의 반응을 주고 그것에 퍼포머가 반응하는 되먹임의 일부로서 공연을 구성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내심 오만가지 감정을 겪으면서도 가시적 리액션이 영 모자란 나에게 그것은 너무 막중한 책임감을 지우는 활동이기도 하고, 이렇게 마음이 무거운 와중에 그렇게 화려한 뮤지컬을, 그것도 영화가 나온 직후에야 사랑에 빠져 DVD도 사고 사운드트랙도 사고 존 카메론 미첼의 첫 내한공연(2007년이다)도 갔지만 그 후 한국에서 수많은 별명이 붙은 인기 헤드윅을 배출한 기간 동안 거의 헤드윅 냉담자나 다름없던 내가, 지금 [헤드윅]을, 하는 뭐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와서 보기만 하라는데 딱히 할일도 없는 입장에서 마다할 까닭이 있겠는가.
막상 가보니, 정말 맨 앞 열이었고, 십여년 만에 듣는 것이나 다름없는 첫 넘버 '사랑의 기원'에서부터 눈물이 쏟아졌다. 이제 나이가 들고 그때보다 많은 걸 보아서 그런지 이 이야기는 또 전혀 다른 느낌으로 비통하고 아름답게 다가왔다. 끈질기게(물론 그들에게 다른 선택이 주어진 적은 없지만) 제도와 불화하며 살아가고 있는 몇몇 친구들 생각도 나고, 내가 뭔가를 그간 많이 잃어버렸다는 생각도 들고, 뭐 그랬다. 헤드윅 이야기를 한도 끝도 없이 할 수 있겠지만 이 공연에서 본 것 중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헤드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헤드윅] 뮤지컬에는 헤드윅의 남편 이츠학이 자신만의 노래를 부르는 파트가 있는데, 친구의 말에 따르면 이츠학을 맡은 배우마다 선곡이 다르다고 한다. 내가 본 공연의 이츠학은 정말 아름답고(요즘 어휘력이 달려서 이런 뻔하고 다소 아재같은 수사 말고 딱히 적절한 표현이 떠오르지가 않는데) 뛰어난 가창력을 지닌 여자분이었는데, 그녀의 선곡은 뮤지컬 [웨이트리스]의 '그녀는 나의 일부였어She used to be mine'이었다.
나는 뮤지컬 [웨이트리스]를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원작 영화는 개봉했을 때 영화관에서 보았다. 국내개봉을 하지 않았지만 당시 운이 좋게도 외국에 있었고, 이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차를 가진 친구가 있었다. 당시 영어실력이 형편없었지만 이 영화만큼은 왠지 한글 자막으로 본 것처럼 이해에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영화는 정말 아름다운(또!)시절의 케리 러셀이 주인공으로, 그녀는 남편에게 학대를 당하며 식당 웨이트리스로 일한다. 그녀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도망가고 싶어하지만, 임신했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한다. 그녀는 역시 불행한 한 산부인과 의사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녀 삶의 위안거리는 아름다운 파이를 굽는 것이다. 십수년이 지났는데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장면은 그녀의 연인이 된 의사가 그녀의 집에 찾아가는 장면이다. 그녀는 부른 배를 안고 눈물이 어린 얼굴로 그를 맞이한다. "나는 행복해지고 싶지 않아요." 둘은 함께 파이를 굽는다.
영화 [웨이트리스]에서 기억해야 마땅한 다른 한 여자는 감독인 애드리언 셸리다. 배우이기도 하고 각본가이기도 한 셸리의 첫 연출작이 이 [웨이트리스]였다. 하지만 셸리는 자신의 영화가 개봉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셸리는 화장실에서 목을 맨 채로 발견되었고, 처음에는 자살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결국 타살로 밝혀졌다. 한 남성 인부가 특별히 밝혀진 동기 없이 그녀의 집에 침입하여 셸리를 살해했던 것이다. 이 허무하고 잔혹한 사건으로 인해 그녀의 이 사랑스럽고 멋진 영화는 데뷔작인 동시에 유작으로 남았다. 셸리는 [웨이트리스]에 직접 출연하기도 한다. 자신의 짝가슴을 피카소의 그림에 비유하는 농담을 자조적으로 던지는 주인공의 나이든 직장 동료로. 셸리는 내가 그녀를 더 잘 알기도 전에 자신의 재능을 모두 가지고 떠나버렸다.
이런 이야기를 나는 아무런 일관성을 갖추려는 노력 없이 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시대의 이야기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일관성을 찾아간다.
그녀는 불완전하지만 노력하죠
그녀는 선하지만 거짓말을 해요
그녀는 자신을 괴롭혀요
그녀는 부서졌지만 도움을 구하지 않아요
그녀는 엉망이지만 친절해요
그녀는 외로워해요, 아주 많은 시간 동안
그녀는 이 모든 것, 한데 섞여서 아름다운 파이로 구워진
그녀는 떠났지만 내 일부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