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의 그것
마지막의 그것
미국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의 여주인공 메러디스는 꿈에 그리던 왕자님이라고 맥드리미라고 부르던 데릭과 헤어진 후 슬픔과 분노로 이런 말을 한다.
나는 당신이 내 마지막인 줄 알았어요. 더 이상 바에서 내 짝이 어디 있나 찾아다닐 필요 없이 의지하고 슬픔을 함께 나누고 일상을 나누게 될 마지막 사람인 줄 알았어요.
나는 그가, 내가 그토록 오래 찾던 내 짝이라고 생각했다.
전화 통화를 극도로 싫어하는 내가 전혀 알지 못하던 그와 첫 통화에서 두 시간을 통화했을 때, 멀리서 그의 모습이 보였는데 한눈에 그임을 알아봤을 때, 그가 세계여행 대신 그 돈으로 1년을 봉사활동을 갔다고 했을 때, 그의 아버지가 목사님이라고 했을 때, 이야기를 나누느라 저녁을 네 시간을 먹었을 때, 그러고도 아쉬워 카페가 문을 닫을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을 때, 집에 돌아와 그와 같은 영화를 보며 새벽 늦게까지 통화를 했을 때. 그 모든 순간이 그가 내 사람이구나 알게 해줬다.
언니들이 말하던 '결혼할 짝을 만나면 한눈에 이 사람이다 알아 볼 수 있다'고 하던 그게 이거구나 확신했다.
그와는 어떤 싸움도 없을 줄 알았고 더 이상 내 삶에 헤어짐은 없을 줄 알았다.
그는 내가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무기력한 모습으로 헤어짐을 통보했고 나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가 그렇게 떠나고 나는 그와의 만남조차 부정하며 여느 짧았던 만남과 똑같이 스쳐 지나가려 했다.
시간이 흐르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상하게 그에 대한 마음들이 더 선명해져 갔다.
그는 내 짝이 아니었으니까 떠났다. 그는 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 '맥드리미'였다. 그는 잘생기지 않았지만 여전히 그는 멋있었다. 마른 사람을 싫어하는 나지만 그의 마른 몸은 예술가의 고뇌와 가까워 보였다. 그냥. 그의 모든 게, 내가 과거도 현재도 절대 좋아하지 않는 것들까지도 그가 가진 것이라면 다 좋았다. 지금도 그의 것들은 전부, 멋있어 보인다. 그가 내게 준 상처의 크기와 상관없이.
그와의 마지막 데이트는 갑작스러웠다. 갑자기 시간이 나서 아무 준비없이 그냥 만난 어느 평범한 날이었다. 그러나 사귀자는 고백을 받고 처음 만나는 우리의 공식적 첫 데이트였다. 갑작스러웠지만 설레었고 행복했다.
그러나 그는 어떤 특별한 눈빛도, 어떤 특별한 손길도 없었다. 그가 핀란드의 교육과 대한민국의 교육에 대해 열변을 토할 때 나는 '우리는 왜 첫 데이트에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거지' 생각했고 '왜 그는 내 손을 잡지 않는 거지' 생각했다. 나는 그의 달라지지 않은 눈빛에 당황했고, 그의 특별하지 않은 손짓에 불안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우리는 헤어졌다. 그날의 그 특별할 것 없던 데이트가 우리의 마지막 데이트였다.
'그레이 아나토미'의 메러디스는 데릭에게 마지막 키스가 어땠는지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데릭은 그들의 마지막 키스를 이렇게 표현했다.
아주 짧은 키스였다고. 영원히 언제든 이렇게 키스할 수 있을 것처럼.
그날의 데이트가 마지막이었다는 걸 알았다면 나는 어땠을까? 그렇게 불안해하고 그의 행동을 의심하며 우리의 대화에 불만을 가졌을까?
그날도 분명 어느 순간에는 다정했을 것이고, 분명 어느 순간에는 로맨틱했을 것이며, 어느 순간에는 설레었을 것이다. 그날의 대화는 흥미로웠을 것이며 나의 태도는 달랐을 것이다.
나는 우리의 데이트가 지속될 것이라 생각했고, 미래의 데이트를 걱정하느라 그가 보인 그날의 태도에 불안과 불만만 가득했다. 오지도 않을 미래를 위해 그날의 즐거움을 버려야만 했다.
우리가 마지막을 안다는 것은 그게 무엇이 되었든 그것을 굉장히 소중하게 만든다.
나는 그가 내 마지막 사람이라 확신하면서 그와의 마지막 데이트를 생각지도 못했다. 그가 내 마지막 사람이라서 나는 그가 더 소중했고 그와의 마지막을 예상하지 못해서 그 데이트의 소중함을 몰랐다.
그래서 마지막이다 확신했던 그를 실제 만났던 시간들보다 훨씬 오래 마음에 담고 아파하고 있으며, 그와의 마지막 데이트를 훨씬 오래 기억하고 아쉬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