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련한 정치인,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이 글은 중앙일보 기자 블로그인 [ J plus ]에 2015년 2월부터 2017년 5월까지 썼던 글이다.
[ J plus ]는 중앙일보 디지털 전환에 따라 기자 블로그 운영을 멈추면서 폐지되었다.
옮긴 글 중 몇몇 글은 제목과 내용을 약간 수정했다.
[ 정치 9단 김종필 전 총리의 한 수 ]
입력 2015.02.24 01:30
J플러스로 보기 http://news.joins.com/article/18705587 복사
대한민국 대통령이 상(喪)을 당한 친척의 상가로 조문을 갑니다. 이 행차가 사적인 행사일까요? 아니면 공적인 행사일까요? 그 친척이 특별하게 눈여겨볼 필요가 없는 일반적인 국민의 한 사람이라면 사적인 행사가 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의 친척이란 이유로 대중의 관심, 특히 언론의 관심을 더 많이 받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대한민국이 제왕적 대통령을 선출하는 나라는 아니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직선제로 선출된 노태우 대통령 이후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까지 이어지면서 자연스레 생겨난 생각일 겁니다.
다수 지지로 선출된 대통령도 잘못했을 때는 호된 비판을 받아야 하는 그런 대한민국이 된 것이죠. 아울러 대통령과 관계되었다고 무조건적으로 관심을 받아야 할 이유도 없는 것이죠.
23일 오후 박근혜 대통령은 아산병원 장례식장을 찾았습니다. 김종필 전 총리의 부인인 박영옥 여사의 상가를 간 것이죠. 21일 오후 86세로 별세한 박영옥 여사는 박 대통령의 사촌언니입니다. 결국 김 전 총리는 박 대통령에게는 사촌형부가 되는 셈입니다.
이날 박 대통령은 사적인 행사라고 생각했을까요? 청와대 출입기자와 사진기자, 심지어 청와대 행사를 기록하는 전속 사진가도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박 대통령의 조문 모습은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김종필 전 총리가 일반적인 사람인가요? 그는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5.16(본인은 '혁명'이라 말하지만, 객관적 사실은 성공한 '쿠데타')의 주역이었습니다. 그 후 총리를 역임했고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에는 자민련 총재를 지내면서 3김으로 대표되는 한국정치사의 한 축을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과 대통령이 만나는데 어찌 언론이 관심을 갖지 않겠습니까.
아산병원 장례식장에는 이른 아침부터 기자들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조문 오는 각계 인사들을 촬영하기 위해 사진기자들도 모였습니다. 이런 상가취재에는 상주와 조문객에게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해 순번을 정해 사진취재를 합니다. 23일도 사진기자가 2명씩 시간을 정한 뒤 사진취재를 했습니다. 오후에 박 대통령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에 있던 사진기자들은 청와대출입 사진기자들이 당연히 취재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대통령 취재는 경호문제 등으로 인해 제한이 있습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청와대 전속 사진가도 없이 온 것입니다. 사진기자들은 현장에 있던 사진기자 중 1명만이라도 취재할 수 있도록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거부되었습니다. 결국 사진기자들은 박 대통령이 조문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3층 복도에서 빈소로 들어가고 나오는 박 대통령의 모습만을 볼 수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조문을 왔지만 상주, 특히 고인의 남편인 김종필 전 총리도 보이지 않는 그런 상황이 된 것이죠. 한마디로 단팥 없는 단팥빵이 된 것이죠.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박 대통령이 나온 뒤 잠시 후 김종필 전 총리가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을 나온 것입니다. 김 전 총리는 2008년 12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오른팔과 오른 다리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대한민국 대통령을 배웅한 것이죠.
자칫 조문행사도 공개하지 않는 불통 대통령이란 구설수가 생길 수도 있었는데 김 전 총리가 자연스럽게 해소한 것입니다. 정치 9단 다운 한 수였습니다.
이날 오전에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인 이희호 여사가 조문을 왔습니다. 김 전 총리는 아내가 말기암에 걸린 상황을 이희호 여사에게 말하다 눈물을 짓기도 했습니다.
이 여사는 조문을 마친 뒤 김 전 총리 앞에 부의금을 놓고 떠났습니다.
김 전 총리는 조문객들에게 부의금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빈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