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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모 Sep 09. 2024

흙을 먹는 나날

인간이 먹는 모든 것은 땅에서 나온다

‘정화불사(淨化佛事)’


이 책은 신초샤(新潮社)에서 1982년에 펴낸 '흙을 먹는 나날: 나의 정진 12달(土を喰う日々: ガ精進十二ヶ月 )'의 문고본 개정판(2011년/2022년 37쇄)을 번역한 것이다. 원서 초판은 미즈카미 쓰토무가  1978년 1월부터 12월까지 잡지 "미세스(ミセス)에 연재한 글을, 같은  해 12월 7일 문화출판국(文化出版局)에서 출판했다. 그러니까 45년 전에 출간된 오래된 책이다. 중년의 소설가가 가루이자와의 산장에서 직접 농사짓고 살며 십 대 시절 배운 요리를 재연한 12달의 기록이다. 밭에서 수확한 제철 식재료를 이용해 계절의 맛을 지닌 음식으로 만든 뒤 검소하고 소박하게 상차림하는 과정이다.

잡지에 연재한 글이었고 문고판으로 나올 정도로 분량이 적은 책이다. 전철로 출퇴근한다면 2~3일 이면 기차 안에서 읽어낼 수 있는 글이다. 쉽게 쓴 글이지만 순간순간 톡톡 쏘는 탄산 맛이 있는 글이다. 

글쓴이는 가난했기기에 9살 때 절에 들어가 사찰요리법을 배우면서 음식에 대한 자세와 요리법을 익혔다. 고기 같은 육류가 나오진 않지만, 풀 한 포기, 열매 하나하나 그 맛의 본질을 탐구하는 구도자 같은 음식 레시피가 책 곳곳에 등장한다. 재료 자체에 대한 풍부한 지식, 그리고 요리법, 먹는 법이 나온다. 여기에 많이 옮기지는 않았지만 그 레시피가 궁금하다면 책을 사서 보아도 좋을 것이다. 화려한 기교보다는 최대한 음식재료를 살리고(당연히 버려지는 부분은 최소화한) 보기 좋기 위한 외적 기교는 없는 그런 요리법이다.


글을 번역해 옮긴이는 식재료나 음식 이름은 번역하는 것이 원칙이나 이미 통용되고 있거나  적합한 단어가 없는 경우 일본어 발음 그대로 표기했다고 밝혔다. 일본어로 된 재료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상관없다. 이 책은 요리책이라기보다는 인생의 어려움을 넘기며 깨달은 삶의 지혜와 음식을 만들면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살피는, 살짝 철학적인 책이니 크게 문제 될 일은 없다. 

그렇다. 이 책은 요리책이 아니다. 요리책으로 가장한 인생철학 책이다.

(누적판매량 1억 권을 기록한 요리만화 '맛의 달인'의 주인공 야마오카 지로가 "지금 유일하게 읽을 가치가 있는 음식책"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박찬일 요리사는 추천사에서 읽으며 메모했다고 했다. 2022년 나카에 유지가 감독한 영화 '열두 달, 흙을 먹다'가 있다고 한다.)


아래는 책에서 소개한 글쓴이에 대한 글이다. 

지은이 미즈카미 쓰토무(水上勉 , 1919~2004)는  전후 일본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1919년 후 쿠이(福井) 현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목수 아들로 태어나 입을 줄이려고 아홉 살에  출가해 십 대 후반까지 교토의 선종 사원에서 생활했다. 이때 부엌에서 살며 정진요리(精進料理, 일본의 사찰요리)를 배웠다. 중학생 때 주지스님의 식사를 준비하고 시중을 드는 전좌(典座) 역할도 했다. 엄격한 수행생활이 힘들어 절에서 도망친  적도 있다. 1937년 리쓰메이칸 대학에 입학했지만 반년  만에 자퇴, 이후 생활고에 시달리며 옷 행상을 하는 등  40여 년 동안 36번이나 직업을 바꾸었다  "안개와 그림자(霧と影 )를 발표한 1959년(40세)부터 사회파 추리소설 작가로 두각을 나타냈다. 대표작으로 "바다의 송곳니(海の牙)" "기러기 절(雁の寺)" "우노 고지전(宇野浩二伝)" "잇큐(一休)" "데라도마리(寺泊)" "료칸(良寬)" 등이 있다.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나오키상, 기쿠치간상, 다니자키준이치로상, 가와바타  야스나리상, 마이니치예술상을 수상했다. 1998년 일본 문화공로자로 선정되었다.


독후감으로 글을 쓰기보다는 책에서 내 맘에 들어온 문장을 옮기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나중에라도 자료로 쓸 수 있게 말이다. 그래서 책에서 옮긴 글은 글자를 두툼한 볼드체를 사용했다.


아홉 살부터 선종(禪宗) 사원의 부엌에서 살며 무엇을 얻었는가, 묻는다면 우선 정진요리(精進料理:일본의 사찰요리를 뜻한다. 음식도 수행의 하나로 보는 선종에서는 특히 육식을 금하며 몸을 청정히 하기 위해 해초, 곡류, 채소를 주재료로 만든 음식을 정진음식이라 한다. 주로 엄선된 제철 채소와 곡류를 듬뿍 사용한다. 미식(美食)은 피하고 식재료가 가진 소박한 맛에 집중한다.)를 배운 일이라고 답하겠다. 선종에서는 어린 승려를 양육할 때, 어려운 얘기는 이러쿵저러쿵 잔소리로 하지 않고 일상 속 사소한 일에 녹여서 가르치곤 한다. 예를 들어 무언가를 씻고 난 물을 조금이라도 무심코 뜰에 버린다면 보고 있던 주지 스님이나 사형이 일갈한다. "바보 같은 녀석, 아까운 짓을 했구나." 구정물이니 아까울 것도 없다. 왜 야단맞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자면 뒤이어 이런 말이 돌아온다. '한 방울의 물이라도 풀이나 나무가 기다리고 있다, 왜 생각해 보지도 않고 아깝게 버리느냐, 어차피 버릴 거라면 뜰에 나가 이거다 싶은 나무뿌리에 뿌려라."  [p9~10]


은시(隱侍:노스님을 위해 시중드는 일을 하는 승려)는 재료가 없는 와중에도 반찬을 만들어야 한다. 사실 만든다기보다 쥐어짠다는 표현이 적합했다. 이것이 노스님이 가르친 조리법의 가장 기본이다. [p14]


아무것도 없는 부엌에서 쥐어짜 내는 게 정진이라고 했지만, 이는 요즘처럼 가게에 가면 뭐든지 다 있는 시대와는 달라서 밭과 의논해서 정하는 것이었다. 내가 정진요리란 '흙을 먹는 것'이라고 생각한 건 그 때문이다. 제철 재료를 먹는다는 것은 곧 그 계절의 흙을 먹는 것일 터이다. [p15]


TV  요리 프로그램에서는 음식 재료를 손질하면서 많은 부분을 깎아내지만 정진요리에서는 재료 전체를 최대한 살려낸다. (결국 음식 준비단계에서 버려지는 음식쓰레기는 줄고 대신 인간이 먹는 양은 늘어난다.) 사실 부족한 재료를 쥐어짜 내 만든 음식이란 말의 또 다른 면이다. 비록 맛없다고 여기는 떫은맛을 내는 밤의 속껍질마저도 살려서 요리한다. 그 떫음 자체도 재료 본연의 맛이니... 속껍질이 있는 밤을 함께 넣고 밥을 지으면 나름 맛있다고 한다. 영양학적으로 밤의 속껍질에 무시 못할 양분이 있다고도 하니 수행하듯 먹어본다면 어떨까? 배탈이 날까?


한순간도 태만히 해서는 안 된다. 하나는 보고 하나는 놓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공덕을 쌓을 때도 대해(大海)의 한 방울이라고 할 만한 작은 것일지라도 남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 산처럼 높은 선근(善根:온갖 선을 낳는 근본)도 티끌을 쌓아 이루는 것과 같지 않은가.  [p20] 


나는 익히는 방식을 달리해 재료의 단맛을 끌어내고 이런저런 잡스러운 맛을 내지 않아 손님들은 내 요리 방식에 의외로 신선한 맛을 느끼는 듯 입맛을 다신다. 대접을 받았으니 당연히 치하하는 것이겠지만 접시가 빨리 비는 건 맛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칭찬하더라도 나는 '절대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어떠한 경우에도 접시를 다시 채워 주지는 않는다. 이것도 선종의 방식이다. 맛있는 음식을 소중히 여기며 먹어 주면 좋겠다. 그래서 조금만 담아내는 것이다.  [p23]


한국 정서에 비할 것도 없이 일본 세속의 규범에 따른다 해도 안 맞는 법칙일 수 있다. 맛있다고 입맛 다시는 모습을 보면 더 먹으라고 음식을 더 내오는 것이 일반적인 인지상정일 테니까. 하지만 재료 본연의 맛을 끌어냄과 동시에 낭비하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양을 밭에서 거둔 재료들일테니 더 줄 여지도 없지 않았을까? 사실 모자람을 느낄 만큼 먹을 때가 가장 맛있게 느껴지는 법이다.


글을 읽으며 한 가지 이상하게 생각한 점은 스님인데 결혼을 하고 애를 낳는다는 사실이다. 필자도 어려서 동자승으로 절에 들어가 밥 짓는 일도 하고 주지 스님의 애도 돌보는 일이 힘들어 도망쳤다고도 했으니 말이다. 일본에는 부인을 두는 대처승(帶妻僧) 제도가 있다는 점을 생각하니 이해가 됐다. 일제 강점기 이후 우리나라 절에도 대처승이 있었지만 1954년부터 일어난 ‘정화불사(淨化佛事)’를 통해 대처승은 사라지게 된다.


‘정화운동(淨化運動)’ 혹은 ‘정화불사(淨化佛事)’로도 불리며, 대체로 1954년부터 1962년까지 대처승의 배제, 비구승에 의한 종단 재건, 한국불교 전통 재건, 불교 근대화 운동을 내용으로 하는 불교 내 자정운동이다.

이 운동의 직접적 계기는 1954년 5월 20일 이승만 대통령이 전통불교사원에서 ‘대처승은 물러가라’는 요지의 유시를 내린 것이 발단이 되었다. 본래 대처승은 한국불교의 독신 전통과 달리,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승려들을 강제 결혼시키면서 나타나게 되었다. 불교정화운동은 우선 일본 불교의 대처승단 영향으로부터 한국 불교의 독신 승단 전통을 복원시키려는 운동이었다.



언젠가 내가 부엌 한 구석에 대충 잘라서 버린 시금치 뿌리를 노스님에게 들킨 일이 있었다. 노스님은 잠자코 그것을 주워 모으며 "잘 씻어서 나물에 넣거라" 하셨다. 나는 얼굴이 화끈했다 시금치 뿌리는 깨끗이 씻기가 힘들다. 흙이 뿌리가 뭉친 곳에 달라붙어 있는 데다 껍질이 단단해서 잘 씻지 않으면 나물에 흙 알갱이가 섞이기 일쑤다. 뿌리를 하나하나 펼쳐서 물속에서 지저분한 부분을 깨끗이 씻은 다음, 껍질도 손톱으로 잘 벗겨서 불그스름한 뿌리를 정갈하게 다듬어 잎 부분과 함께 사용하는 것이 옳다고 알고 있었지만, 바쁠 때는 생략했다.


이렇게 생략한 데는 부드러운 잎과 뿌리를 동시에 데칠 수 없다는 이유도 있다. 뿌리가 딱딱하기 때문이다. 물로 뿌리부터 끓는 물에 넣어 잘 익었는지 가늠한 다음 잎을 넣는 것이 상식이지만, 이때 뿌리 끝부분을 잘라 버리면 조리 시간이 절약된다. -중략- 노스님은 화를 내시지 않고 "제일 맛있는 부분을 버리면 아깝지"라고만 하셨다. 이런 일도 도겐(道元, 1200~1253) 선사의 다음과 같은 말과 겹친다.


모든 음식을 조리하고 준비할 때 평범한 사람의 눈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평범한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한 포기의 풀을 뽑는 일에서도 불도(佛道)를 실현하고, 작은 티끌 같은 곳에 들어가서도 위대한 불법[大法輪(대법륜)]을 설파하도록 한다.

비록 변변찮은 채소로 국을 끓일 때도 그 일을 싫어하거나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된다.. 우유가 들어가는 고급 요리를 만들 때도 크게 기뻐해서는 안 된다. 집착하는 마음이 사라진다면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겠는가. 그래야 하찮은 것이라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고, 훌륭한 것을 만나도 더 정진하는 법이다. 결코 물건에 따라 마음이 변하거나, 사람에 따라 말을 바꾸어서는 안 된다. 이는 수행하는 사람이 할 행동이 아니다. [p 35~36]


도겐(道元, 1200~1253) 선사는 일본의 독자적인 선종인 조동선(曹洞禪)의 개조. 송 나라 유학 중 만난 노전좌(老典座)를 통해 사원에서 대중의 공양을 마련하는 전좌에 대한 중요성과 수행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귀국 후 '전좌교훈(典座敎訓)'을 찬술 하였다. '식(食)'이 바로 '불도(佛道)'라고 파악하여 선 수행에서 식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런 도겐의 가르침이 담긴 '전좌교훈'은 일본 정진요리 발전에 초석이 되었다.




나는 삼십사 리를 걸어 표고버섯을 사러 온 그 노승이 온전히 부엌일을 하는 사람이 된 경지를 생각한다. 부엌일을 하는 사람이 되어서 요리 삼매에 빠지면 거기에 문자도, 수행도 열릴 수 있는 길이 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없는 부엌에서 손님의 마음을 헤아려 얼마 안 되는 재료를 으깨어 갈고, 삶고, 끓이고, 식초에 무치는 기지를 발휘해 그릇에 담는 행위는 대학에서 배우는 철학의 정원과 닮지 않았나. 철저한 수행도, 문자에 이르는 길도 거기에 있다.

그런데, 이는 언뜻 요리에서 말을 발견해 책을 내는 요리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지금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 또한 찔린다. 부엌에서 이론을 자꾸 둘러대는 것은 하수 중의 하수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사람을 종종 본다. 그저 입을 다물고 묵묵히 만들면 된다. 이러니 저러니 입으로 떠들었다가 완성된 음식이 맛이 없으면 부끄럽지 않은가. 식사는 먹는 것이지 이론이나 지식을 펼치는 장이 아니다. [p59~60]


봄이라지만 아직 칼날처럼 차가운 계곡물을 헤치며 미나리를 찾은 뒤... 필자는 밭뿐만 아니라 주변 숲 속에서 나는 나물, 새 순, 그리고 계곡에서 미나리를 찾아 요리했다.


갑자기 수초 옆에서 빼곡히 돋아난 미나리를 보고는 감동한다. 작년과 같은 장소에서 나를 기다려 줬던 것이다. 뜯어와 부엌에서 씻고 있으니, 고원의 언 땅을 흠뻑 적시는 물의 온기에 얼음이 녹고 땅이 풀리면서 양분을 흡수해 싹을 틔운 풀들의 강한 생명력과 아름다움에 가슴이 북받친다. 갸륵해서 눈물을 글썽거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인간성일 것이다. 땅과도, 풀과도 무연해진 황량한 도시의 사람들에게 이런 환희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땅을 갖고 싶다, 땅을 갖고 싶다, 외치는 게 아닐까. [p62~63]


나는 봄나물이 나올 때면 두릅을 찾아 먹는다. 나는 두릅 새순을 데쳐서 초고추장 찍어 먹는 법 밖에는 모른다. 사실 내가 요리한 것이 아니다. 어머니가 봄이 되면 두릅 새순을 시장에서 사 와 만들어 주었고 결혼 후 아내가 해준 것이다. 글 내용 중 일하던 목수가 젖은 종이에 두릅을 감싸 잿불에 넣어 구운 뒤 된장 발라 먹는 모습이 나온다. 따끈한 김이 오르는 두릅을 밥 위에 올려 먹는 모습이 참 맛있어 보였다고 했다. 나도 한 번 해볼까 싶은, 맛이 궁금한 요리법이다.



얼마 전에 비엔나에 다녀왔다. 그곳의 와인 저장고 주인이 손님인 우리에게 그해의 포도 작황에 관해 상세히 설명하는 진지한 눈빛을 보고 있자니 울컥했다. 사람은 무언가를 직접 손으로 만들면서 비로소 자연의 흙과 함께 한다. 가령 한 알의 매실이든 포도든, 서양 사람이든 동양 사람이든 다 마찬가지다. [p116]


사실 나는 이 매실절임이 들어간 국을 묘신지의 전 관장인 가지우라 이쓰가이 스님의 저서에서 읽고 흥미롭다고 생각해 만들어 보았다. 가지우라 스님은 그 책에서 다음과 같이 개성적인 말씀을 남겼다.

수행의 측면에서도 때가 아닌 재료로 만든 음식을 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때그때의 계절에 맞게, 이른바 '제철'인 재료를 자유자재로 조리할 수 없다면  한 사람의 요리인이라고 할 수 없다. 대접(ご馳走 [ごちそう] 참고:달릴 치, 달릴 주: 1. 손님을 향응함 2. 맛있는 요리)이라는 말에는 '달리다, 뛰다'라는 글자가 들어 있다. 그러므로 절의 경내를 이리 뛰고 저리 뛰면 이런저런 것들이 눈에 띈다. 또 경내를 뛰지 않더라도 실내와 부엌을 계속 걸어 다니면 여러 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채소도 좋고 과일도 좋고 또는 주변에 있는 과자도 괜찮다.  [p117~118]


일본어 'ご馳走(고치소우)'라는 말이 이리저리 뛴다는 말이 '대접한다'는 뜻으로 쓰인다는 게 재미있다. 그만큼 정신없이 움직여야 대접할 수 있고 이리저리 움직여야 식재료를 준비할 수 있단 말이겠다. 바쁜 주방의 모습이 연상된다.


산초조림을 좋아해 매 끼마다 드시던 외할머니를 기억하면서 필자는 이렇게 글을 쓴다.


내가 기부네의 산초에 입맛을 다시고 가루이자와에서 어설프게 직접 조린 산초 열매를 아침밤에 얹는 버릇은 할머니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했다. 늘 말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고작 산초 열매에서조차 사람은 기억을 더듬어 생명의 역사를 되살린다. 혀에서 녹아 피와 살에 스며드는 맛이란, 즉 이런 식으로 그 사람 나름의 역사와 관련된 흙의 자양(滋養)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p135]


필자는 나카무라 고헤이의 [일본요리의 비법(日本料理の奧義)]이라는 책에서 나오는 완벽한 요리가 지녀야 할 여섯 가지 맛을 옮기고 있다. 나카무라는 달고, 짜고, 시고, 쓰고, 떫은 다섯 가지 맛에 더해 '뒷맛'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나카무라의 주장인 뒷맛이란 '먹고 난 후에 또 먹고 싶어 지게 입안에 감도는 맛'이라고 한다. 필자는 추가된 맛인 '뒷맛'에 심리적인 부분도 가미된 것이라는 점에서 감동하고 있다.


대체로 나는 무든 토란이든 껍질을 벗길 때 반드시 주지 스님의 가르침을 떠올린다.

"껍질을 두껍게 깎지 마라. 가장 맛있는 부분을 버리는 거나 다름없으니."  [p202]


밤을 밥에 넣을 때와 달리 팥에 넣으면 약간 떫은맛이 생긴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밥과 팥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는데 그들의 대화를 들을 귀가 없는 게 불행이다. 아마도 밥은 떫은맛을 달갑게 받아들이고 팥은 꺼리는 모양이다. 살아있는 것에는 성격이라는 게 있어서 인간 남녀와 마찬가지로 성격이 맞지 않으면 속껍질을 벗기지 않은 채 서로 으르렁거리며 산다. 부부 사이도 그런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지 않은가.  [p204]


나는 자신의 과거를 가장 쉽게 돌아보고 떠올리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지난날들에 숨어 있는 먹거리를 재현해 입에 넣는 게 지름길이라고 말해 주고 싶다.

그렇지 않은가. 다 큰 어른이 어째서 축젯날 밤에 큰 북이 울리면 어깨가 들썩거릴까. 어린 시절 부모의 목말을 타고 신사에 모인 많은 사람을 봤던 기억이 그리워서다. 노점에서 팔던 달고나, 솜사탕, 일전양식(一錢洋食:서양식 우스터소스를 발랐기에 일종의 서양식 대파 부침개, 한 장에 1전에 팔아서 일전양식이라고.)...... 그 소스가 구워지던 냄새가 코에 닿으면 눈물이 날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 남자든 여자든 미각은 그 사람의 삶에 숨어 있는 정신사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러한 의미이며, 우리는 그 맛있었던 옛날 맛을 잊고 사는 것에 불과하다. 축젯날 큰 북소리가 이를 일깨웠을 뿐이다. 요리 또한 이러한 예에서 빠질 수 없다. [p215~216]


요즘은 소년 시절 절에서 식사를 하기 전에 읊었던 경이 생각난다. '오관게(五觀偈)라고 한다. 나는 어린아이였으니 뜻도 모르는 채로 그저 사형들을 따라 읽었다.

첫째      많든 적든 수고를 살피고, 이 공양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헤아린다.         [計功多少 量彼來處]

둘째      내 덕행이 이 공양을 받기에 부끄럽지 않은지를 생각한다.                    [忖己德行 全缺應供]

셋째      마음을 지키고 과오로부터 멀어지는 일은 삼독을 버리는 것이 으뜸이다.  [防心離過 貪等爲宗]

넷째      이 음식을 약으로 받아 육신의 고달픔을 치료한다.                              [正思良藥 爲療形枯]

다섯째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는다.                                                  [爲成道業 應受此食]  

[p232]



흙을 먹는 나날 / 미즈카미 쓰토무 지음 / 지비원 옮김 /       메멘토 / 2024.09.05. 초판 발행 / 17,000원

책에는 여러 가지 음식 만드는 법이 등장한다. 이중 특이한 음식 만들기가 눈에 들어왔다. "떫은 감 구이"라고 할 수 있을까? 홍시가 되어야 먹을 수 있는 '다이시로 감'을 조금 딱딱할 때 전통 종이나 은박지에 싸서 모닥불 속에 묻어 둔다. (우리는 껍질을 깎아 겨우내 매달아 곶감을 만들어 먹는다. 그런데 고구마, 감자 굽듯이 잿불에 넣어 굽는다.) 나뭇가지로 찔러 잘 익은 듯하면 꺼내서 미숫가루(다른 지방에서는 보릿가루)를 섞어 뭉개면서 설탕을 조금 넣고 힘껏 젓는다. 젓다 보면 딱딱한 떡이 된다. 둥글게 뭉쳐서 먹으면 된다. 살짝 남은 떫은맛과 단맛이 어우러진 맛이다. 가을에 떫은 감을 구해서 에어프라이기에 넣고 한 번쯤 해볼까 싶다. [빈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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