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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모 May 05. 2021

노동조합

노동자 권익보다 노동조합의 권력을 추구하는 세상이 된다면...

[책꽂이 정리]

안토니 버제스가 지은 소설 '노동조합'은 1989년도에 모음사에서 출간된 책이다. 사실 영국에서 1978년 출간된 이 책의 원 제목은 '1985년'인데 이미 제오문화라는 출판사에서 '1985년'이란 제목으로 이미 출간되어 있었다. (https://blog.naver.com/eyoooo/220240985655) 번역은 라채훈, 김동완 이렇게 2명이 했는데 책 제목이 소설 '노동조합'으로 바뀌면서 번역자는 라채훈 1인이 되었다. 그리고 조혜란 화백이 그린 삽화가 중간중간 들어가 있다. (이미 나온 책인데 왜 제목을 바꿔 다시 나왔는지... 뭔가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이다.)


아마도 나는 노동조합이라는 제목에 끌려 뒤늦게 구입했을 텐데, 읽은 뒤 느낌은 좀 황당한 소설이었다는 생각이었다. 노동조합 만능인 세상, 모든 부문에 노동조합이 구성되어 있고 그 시스템 안에서 사람들은 작은 부품처럼 끼워져 사회가 돌아가고 있는 세상을 소설은 묘사하고 있다. 국회의원이 자신을 고급 샐러리맨이라고 말하고, 절도범이 판사에게 없는 죄까지 만들지 말라고 비웃는다. 그런데 실제로 대처 영국 수상이 집권하면서 영국병이라고 말한 노조의 파업을 정면돌파한 모습을 보면 그냥 비현실적인 소설이라고 말하기엔 살짝 무리가 있어 보인다. 우화나 소설은 현실과 비교되면서 교훈 내지는 경고음을 주는 존재이기도 하니 그 정도로 생각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 책이 우리에게 모습을 보인 1989년 대한민국과 2021년 대한민국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하다. 내가 개인 자료용으로 책 내용을 옮긴 부분(특히 저자의 노트)이 많아 글이 상당히 길다. 관심없는 분은 그냥 앞부분만 보고 그냥 가시길...

노동조합(원제:1985) / 안토니 버제스 지음 / 라채훈 옮김 /모음사 / 3300원 / 1989년 7월 15일 발행

소설 초반부에 주인공 베브는 아내 엘렌이 입원해 있는 브랜포드 병원이 방화범에 의한 화재사고가 난 것을 알게 된다. 화재 현장에서 심각한 화상을 입은 엘렌이 죽기 전에 "놈들을 그냥 두지 말아욧!"라고 소리치는 소리를 듣고 베브는 부인을 찾게 된다. 화재가 이렇게 커진 것은 3주째 이어진 소방관들의 파업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화재가 난 병원에 오기 전 베브는 딸 베시에게 점심을 주기 위해 집으로 돌아갔다.

베브의 딸 13살 베시는 성숙한 육체를 지녔지만 저능아다. 이에네스리아라는 무통분만 약 부작용으로 저능아가 됐다고 의사는 말하지만 부작용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거리에는 '크미너'라 불리는 10대 무뢰배들이 몰려다니고 있다. 크미너는 동부 아프리카 잔지바르 및 연안 지역에 살고 있는 반투족(族) 언어인 스와힐리어(語)로 '10대'라는 뜻이다. 베브는 집 앞에서 크미너에게 집단 폭행당하고 얼마 되지 않는 금품을 강탈당한다. 그 뒤 집에 들어오니 딸 베시는 TV를 보며 자위하고 있었고, 입원한 엄마에게 전화했냐 물으니 딸은 '전화가 안돼'라는 답만 했다. 베브가 병원에 전화하니 자동응답기에서 구조 및 대피 작업 중이라는 말만 나온다. TV 채널을 돌려보니 화재가 발생했음을 알려주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역사학 석사를 가지고 스미스 종합중학교에서 유럽사를 가르치던 선생님이었던 베브는 문부성의 지시로 수업 내용이 노동조합 운동 역사가 강화되는 식으로 대폭 제한되면서 그만둔다. 그 뒤 초콜릿 공장 제조공으로 일하던 38세 베브는 아내 엘렌의 죽음 뒤, 노동조합에 저항하기 시작한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시작한 일이 이젠 부도덕한 권력기구로 변해 버렸음을 깨달은 것이다.


저항 과정 중 베브는 강제로 갱생시설에 들어가게 되고 재교육 프로그램을 받지만 굳은 그의 신념은 더욱 강해진다. 그동안 그의 딸 베시는 석유부자인 아랍 부호에게 팔리듯 시집을 가게 된다. 몸만 어른이고 저능아인 베시를 사실상 제대로 돌봐 줄 수 없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베브는 끝까지 저항하지만 결국 스스로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 


"놈들은 모두 도망칠 것이다. 언제나 그랬으니까. 역사라는 것은 에덴동산에서 놋 땅으로 가는 길고 긴 여행의 기록에 지나지 않으며, 그 도중에는 불의(不義)라는 이름의 사막뿐이다." 이어 베브는 달의 향해 쓰라린 마지막 인사를 했다. "안녕, 난 누구에게도 가르칠 것이 없었다구. 안녕!"

베브는 가슴을 열어젖히고 고압전류가 흐르는 철책에 몸을 맡긴다. 그 순간 베브가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어째서 자신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조합을 거부하고, 죽은 사람들의 파업에 참가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사실이었다. 다음 순간 그의 심장이 튀어나와, 바람에 흔들려서 땅바닥에 떨어진 그 신맛 나는 야생 사과 사이를 굴러가는 듯이 느껴졌다.


이 책의 저자 안토니 버제스는 필명이다. 원래 이름은 존 안토니 버제스 윌슨이다.

John Anthony Burgess Wilson,, who published under the name Anthony Burgess, was an English writer and composer.

아래 글은 역자의 후기다.

안토니 버제스는 1917년 영국 맨체스터에서 태어나 맨체스터 대학을 졸업한 영국 토박이이다. 대학 시절 그는 음악과 언어학을 전공하고 교직에 있을 때까지도 작곡가의 길을 걸었으나 40대에 접어들면서부터 문학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열정적으로 저술 활동에 몰두했다.

20여 권에 달하는 그의 저서들은 발표될 때마다 세인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중에서도 1960년에 발표된 <시계장치의 오렌지>와 78년에 발표된 <노동조합:원제 1985>은 세계의 문학사에 길이남을 역저(力著)로 꼽히고 있다.

내용면에서 노동조합과 맥락을 같이하는 <시계장치의 오렌지>는 젊은이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풍부한 부를 누리는 가운데서도 반(反) 문명적인 풍조에 오염되어가는 현상을 지적한 작품으로, 우리나라에서도 60년대에 이미 번역 소개된 바 있다. 또 이 작품은 영화화되어 세계 100대 영화 중의 하나로 아직도 주목을 받고 있다.

그의 두 번째 역작이라 일컬어지는 <노동조합:원제 1985>이 출판된 직후 매스미디어와 각계 인사들이 입을 모아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버제스는 파토스적(感性的) 역사의식을 로고스적(理性的) 미래의식으로 승화시켰다. 」

그 후 버제스의 <노동조합>은, 30년 이상 ‘미래 사회에 있어서 강력한 폭군 정치가 국민의 도덕적 선택(자유)을 어떻게 말살할 것인가를 경고한 예언서' 로서 확고부동한 위치에 있었던 오웰의 (1984년)을 도리어 압도하면서 전 세계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우리와 가까운 나라 일본에서만 해도 수년 전에 이 책이 번역되어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처럼 버제스의 <노동조합>이 우리에게 새로운 충격을 주는 이유는 첫째, 독재권력의 빈틈없는 대중선동과 억압적인 감시 때문에 개인의 자유가 말살된다는 오웰의 미래 사회를 코믹한 상상력이라고 지적한 데 있다. 최근 폭군 정치의 주역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있음을 들어 그는 가까운 장래에 독재권력이 쇠퇴할 전망이라는 주장을 편다.

이것은 <노동조합>이 주는 두 번째 충격의 기본 시각을 이룬다. 즉 그는 강력한 힘을 가진 초국가가 아닌 상디칼리즘(노동조합주의, Syndicalism:생산수단을 노동자가 소유해야 한다는 조합주의) 국가를 미래사회의 모델로서 지적한 것이다. 이제까지 상디칼리즘 국가란 극히 단편적으로 몇몇 정치 이론가들의 상상 속에서 제시되었을 뿐, 이처럼 구체적이고도 명확하게 그려진 적은 없었다. 그런 만큼 첫 페이지에서부터 우리는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된다.

의학의 발전이라는 대의명분 아래 무분별하게 사용되는 약품 때문에 저능아가 되어버린 딸아이, 노동자가 되는 데 필요한 것만 가르치는 학교에서 뛰쳐나와 거리의 부랑자가 된 10대 소년들,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이 계속되는 중에 불에 타 죽어야 했던 아내……. 그것은 논리적 상상력이 낳은 지적(知的) 예언이라고 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지난번 영국 총선거에서 대처 여사의 보수당이 노동당을 물리치고 집권하는 데 버제스의 <노동조합>이 1백 만표 이상의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은 것만 보아도, 우리는 <노동조합>이 보여준 파업 제도의 공포가 얼마나 충격적으로 영국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졌는지 알 수 있다. 당시 <더 타임스>에 실린 서평은 <노동조합>의 충격을 단적으로 설명해 준다.

「안토니 버제스는 이 책 한 권으로 조국의 운명을 바꾸는 데 중요한 일익을 담당했다. 」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A Clockwork Orange〉 〈Honey For The Bears 〉(The Right To An Answer) (Devil Of A State) (The Wanting Seed) (Nothing Like The Sun) (Re Joyce) (Long Day Wanes) (Vision Of Battlements) (Doctor Is Sick) (Tremor Of Intent) 등이 있다.


옮긴이/라채훈

1947년 인천 출생. 인천고, 서울대 문리대 졸업.

ITC 외신 편집위원, 제오문화사 대표 역임〈결혼의 기원과 역사〉 〈수퍼스타 막사이사이> 등 번역

장정/아트콤

삽화/조혜란


아래 글은 소설 뒷부분에 붙인 <저자의 노트> 부분이다. 원본은 훨씬 더 긴 문장이라는 글을 어디서 본 듯한데 정확하게 알지는 못한다. <노동조합>으로 번역된 책의 뒷부분을 그대로 옮겼다.


<저자의 노트>

① 영국이란 나라

오웰의 미래소설 (1984년)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더블 싱크(二重思考), 뉴 스피크(新語), 빅 브라더(大兄)라는 따위의 말을 들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또한 소설 〈1984년〉의 내용과 상관없이 1984년이라는 해가 되면 개인의 도덕적 선택의 권리가 완전히 말살된 채, 독재권력이 세상을 지배하는 암울한 사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있을 것이다.

정작 1984년이 되더라도 오웰이 예견한 20세기의 악몽은 실현되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사 1984년이 되어 그의 예견과는 정반대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더욱 신장되고 독재권력이 전면적으로 쇠퇴하는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오웰이 지적하고 있는 저 가공할 만한 〈1984년〉의 악몽은 그 타당성을 잃지 않고 여전히 미래에 대한 우울한 예견으로 남을 것이다.

슈트가 쓴 소설 〈해변에서〉를 원작으로 하여 제작된 영화에서 이 세계는 1962년에 멸망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영화를 텔레비전에서 다시 보았을 때, 1970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1960년대의 몸서리쳐지는 사태에 무서운 불안을 감출 수 없었고 그래서 몸을 떨어야 했다.

사실 문학작품으로서의 소설에 의하여 더욱 촉진될 수 있는 불안의 상징은, 그것이 지닌 타당성에서 무서움을 주는 것이지 구체적인 연도와는 상관이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1984년〉은 사회적 압제 정치를 의미하는 다소 애매한 상징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애매함은 솔직이 유감스러운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대학생들은 학교 수업 중에 마리화나를 피우지 말라거나 독서를 하라는 충고를 받으면 ‘그렇다면 바로 지금이 〈1984년〉이나 다름이 없잖은가?'라고 퉁명스레 말한다는 것이다.

오웰적(的)이라는 말도 과장되게 해석되어 컴퓨터의 보고서에서부터 새로 건설된 비행장의 기능적인 면에까지 모든 부문에 사용되고 있다. 가령 현재 레닌그라드에 있는 건물들이 달라스 국제공항의 건물보다 구식인 데다 퇴락했다는 점에서 '오웰적이잖은가'라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1984년〉의 도시 풍경에 대한 묘사의 숨은 뜻은 그것이 어떠한 외양(外樣)을 보이느냐 하는 것에 있지 않다. 오히려 현실 속에 흐르고 있는 마음이 문제인 것이다. 예를 들면 전철 속에서의 성교가 금지되는 그런 개개의 금지령에 오웰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웰이 미래에 투사하려 했던 것은 완전하고 절대적이며 계획적으로 전체집단에 예속되어, 철학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악몽에 빠진 개인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 미래는 1984년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가령 슈트가 말한 1962년의 종말이라 해도 좋은 것이다.

우리들에게는 〈1984년〉을 받아들이기 위한 다음과 같은 과제가 있다. 즉 오웰이 예견하는 20세기 악몽의 원인을 오웰 자신과 오웰을 낳는 데 한몫을 담당한 역사의 일면에서 찾아내어 그것을 이해하는 것, 오웰이 어떤 부분에서 잘못에 빠졌으며 어떤 부분에서 올바른가 하는 것을 조사하는 것, 1970년대가 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듯이 생각되는 상태, 현실적으로 1984년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상태 —— 이렇게 말하면 표절이 될 염려가 있으니 1985년에 존재하게 될지도 모르는 상태로 고쳐 말하겠다 ——  를 오웰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려내 보이는 것 등등이다.

나의 이야기 〈노동조합:원제 1985〉도 무대는 역시 오웰과 동일하다. 미국 사람들이라면 나의 역(逆) 애국주의를 한탄하기 전에 영국이 일찍이 일대 제국을 건설하게 된 원동력은, 바로 통제되지 않은 방심 상태 덕분으로 사회개혁의 중요한 기회를 가졌음에 생각이 미칠지도 모르겠다.

사실 영국에 있어서 개혁은 개선(改善)이기도 했지만 개악(改惡)이기도 했다. 프랑스 사람들은 영국 사람들보다 현명했다. 프랑스 사람들은 신 헌법을 문서화하는 작업을 능숙하게 해 냈지만 새 질서의 여러 가지 형태는 우선 영국에 나타나는 것을 지켜보는 현명함을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수없이 많이 있지만 몽테스큐의 〈법의 정신〉만을 살펴보아도 확실하다. 그 저술은 미국 헌법 제정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는데, 영국에 예전부터 사회계약이란 것이 있지 않았더라면 아마 이 세상에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영국에 존재하고 있던 사회계약에 대해서 몽테스큐가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겠지만, 영국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유의 정치이념과 제도를 다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영국 사람이 어리석다고 말한 이는 월터 버죠트다. 그러나 영국 사람은 프랑스 사람들이 자랑하고 있는 집단적 지성이 결여되어 있는데도, 자신들의 그런 결함에 대해 고민하는 일은 별로 없다.

프랑스 사람들의 집단적 지적(知的) 성격은 1940년, 나치스에 대한 프랑스의 항복과 무관하지는 않을지도 모르겠다. 영국 사람의 어리석음이 그들에게 나치스에 대한 레지스탕스를 깨닫게 해 주었는지도 모를 일인 것처럼. 다시 말해서 직관이라고 고쳐 말할 수도 있는 어리석음 때문에 영국에 있어서 17세기의 혁명이나 신대륙 이주가 벌어졌다. 더구나 그것은 권력에 대한 제한이나 개인적 자유를 보장한 권리장전 등이 완비된 상태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이렇게 보면 현재 영국의 오염된 사회적 혼란 속에서 서양의 미래형이 나타날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고 하겠다. 그것은 우리들 대부분이 개탄해야 할 만연된 영국병(英國病), 노동조합의 천국을 말하는데 잉그속이 바로 그 노동자 천국을 깨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머지않아 알게 될 것이다.

② 예견 1-잉그속(Ingsoc is the fictional ruling party of the totalitarian state of Oceania, in the dystopian novel Nineteen Eighty-Four by George Orwell, which was published in 1949.)

대양방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세련된 지성을 지닌 소수 독재 계급이라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지배계급은 솔리프시즘(Solipsism, 唯我論)적인 철학에 몰두해 있으며, 말과 기억을 조작하는 기술을 습득하고 있고, 또 자신들이 왜 권력을 구하고 있는지 명백히 자각하고 있다.

이들은 집단지배의 영속성을 위해 히틀러나 스탈린식 개인숭배를 하지 않고 빅 브라더라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 지배계급에 영원성을 부여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더블 싱크(二重思考)라는 기술에 의해서 정반대 되는 것을 절충시킬 방법도 알고 있다. 잉그속이야말로 사상 최초의 직업 정부이며 따라서 최후의 직업 정부이기도 하다.

잉그속의 이론적 근거는 형이상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그 형이상학이란 ‘현실은 자기 내부에만 존재한다'라고 생각하는 유아론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자기만이 분명히 알 수 있고 확증할 수 있다는 철저한 자기 확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즉, 자신의 외부에 있는 어떠한 것도 독립된 존재일 수없다는 이론으로서 관념론보다 철저하다.

관념론은 마음이야말로 현실이며 물질은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신(神)이라는 정신적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으며 또한 논리를 부정하거나 모순을 인정하는 일은 없다. 따라서 관념론의 수학적 관계는 일정 불변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어 2+ 2는 항상 4이다. 그런데 잉그속의 집단유아론(集團唯我論)은 이것을 부정하고 2+ 2는 4가 될 가능성이 있을 뿐 아니라 3이나 5도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말하면 미치광이의 말처럼 생각될지 모르나 광기(狂氣)라는 것은 집단정신 속에 흡수되어, 집단정신의 현실관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개인 정신의 속성이라고 당(黨)은 말하고 있으므로 2+2가 3이나 5가 되는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한편 잉그속의 역사 인식은, 역사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자기 환경개선을 위한 투쟁의 발자취라는 것까지는 인정하지만 그것은 모두 실패의 연속이었다고 말한다. 개인은 쉽게 지치고 쇠약해져서 실패한다. 그러면 개인적인 것보다 집단적인 것을 고양하여 개인적인 요소를 감소시키면 시킬수록 역사에 있어서 승리는 계속 이어질 것이 아닌가. 따라서 계속 승리하기 위해서는 집단적인 요소를 끊임없이 강화시키고 고양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집단이 개인의 정신과 마찬가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집단의 구성원이나 개인의 관찰이 기억에 관해 합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을 관찰하고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지 전원일치가 필요하다.

더블 싱크(이중사고)는 바로 개인의 관찰 결과와 기억의 내용을 언제 어느 때이건 당(黨)이 진실이라고 말하는 사실과 일치시키기 위한 수단이다. 따라서 현실은 과거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수정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집단정신은 기억(과거)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래서 집단은 자유롭게 과거를 창조할 수 있다. 집단이 창조한 과거와 기억 속의 과거가 충돌을 일으키면 이때는 더블 싱크가 발동한다. 그야말로 집단은 언제나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잉그속의 철학자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우리는 인생이라는 것이 부분적으로는 정반대의 것을 상대로 요술을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종류의 인간 실체, 즉 집단이 단일체로서 기능하는 것이 우리의 염원이다. 사고의 단일성, 또는 통일성을 달성하려면 모순에 대처하는 의식적인 기교를 사용해야 한다.」

이중사고는 분명히 정신을 제어하는 한 가지 수단으로, 보다 방식화하여 표현한 것이긴 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쓰디쓴 농담이기도 한 것이다. 오웰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정치가들의 거짓말에 질려 있는데, 정치가들은 국민이 물가고나 실업률에 대해 불평을 하면 '그것은 새로운 번영을 위한 일시적 고통일 뿐'이라고 둘러친다.

공산주의자들은 민주주의자가 사용하는 정반대의 의미로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오웰은 이런 점들을 반어적(反語的)으로 탐구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권력자가 애용하는 서투른 대답 회피나 얼버무림에 비하면 차라리 잉그속의 이중사고에는 일종의 고귀함까지 있어 보이기도 한다.

잉그속은 스스로 강력한 자신(自信)에 넘쳐 있으므로 애매모호한 불확실성에 의해 품위를 잃을 필요가 없을 것으로 생각해도 좋다. 잉그속은 애매함을 좋아하지 않는다. 글을 쓰건 말을 하건 표현은 명확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뉴 스피크(新語)를 만들어낸 것이다.

〈1984년〉에 우리는 언어를 통한 사고제어(思考制御)의 제1단계에 서 있게 되는 데 불과하다. 국가의 3대 슬로건은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논리는 잉그속은 어느 때이건 위트에 넘치는 역설(逆說)을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우리는 끝없는 밤이 시작되기 전의 마지막 위트일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예전에는 평화가 일상의 논리였던 것처럼 전쟁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논리다. 적대국과의 전쟁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자신의 예속 상태를 평온하게 느끼게 된다. 그러나 전쟁은 자유스러운 사람에게는 오히려 무거운 짐이 된다. 군대라든가 민병대에라도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자유인에게 전쟁은 최대의 고통이 될 뿐이다.

또한 자유를 선택하는 행위는 환경의 예속이라는 쇠사슬과의 힘든 투쟁이다. 알고 있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사고의 모순에 사로잡히게 된다. 알고 있는 것이 적은 사람일수록 행동이 쉬워지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사실이며 〈1984년〉의 사람들은 당(黨)이 민주주의라는 견디기 어려운 폭력을 제거시켜준 것에 감사하며, 바야흐로 자유롭게 지적 게임을 할 수 있게 된다. 윈스턴 스미스가 하는 일은 지적 게임이며 그것도 매우 자극적인 게임이다. 〈1984년〉을 살아간다는 데에는 위험이 따른다 해도 그 생활이 지루해야 할 이유는 없다.

전쟁은 계속되고 도시의 한 복판에서 로키트탄이 폭발하지만 그곳엔 징집제도가 없다. 그래서 물자가 부족하고 생활이 곤궁해도 전쟁 때문에 불가피한 것으로 이해된다. 애당초 실업이란 말 자체가 없으면 탄압을 위한 법률도 없다. 누구나 폭력과 범죄에 피해를 당하지 않는다. 또한 오늘날처럼 인종문제도 없고 어리석은 거짓말을 하는 정치가도 없고 시간을 허비하는 토론이나 선거도 없다.

정부는 최고의 능률 덕분에 안정되고 미래에 대한 고민이나 걱정이란 아예 없다. 오히려 '2+2=4'라고 생각하는 윈스턴 스미스야말로 이 근사한 집단의 매끄러운 육체에 생긴 부스럼이라고 할 수 있다.

오웰은 나치스의 국가사회주의가 독일 국민의 자존심을 채워주고 국민적 긍지를 되찾게 해 준 매력적 요소를 간파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84년) 잉그속 사회가 소수 독재정치의 미덕이나 장점을 갖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었다.

잉그속의 매력은 민주주의 성과에 실망하고 있는 지식인이라면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것이라는 데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즉, 기회만 주어지면 거짓말하는 정치가의 노예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수백만, 수천만의 대중들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아는 지식인이 보면 잉그속은 오히려 편안하고 안온한 느낌을 줄 것이다.

소수 독재체제의 집단주의에 대한 반론은 자유라는 애매한 전통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집단주의 내부에 있는 모순을 인식하는 데서 생겨날 것이다.

애정성의 지하실에서 윈스턴 스미스는 이런 말을 듣게 된다. 「불안과 배반과 힐책의 세계, 남을 짓밟고 자신도 짓밟히는 세계, 점차 세련되어감에 따라 그 가혹함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늘어만 가는 세계, 우리들 진보의 세계는 보다 많은 고통을 초래한다. 옛 문명은 사랑과 정의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했다. 그러나 우리들 문명은 증오에 기초를 두고 있다………(中略)…… 권력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그것은 끊임없이 증대하고 미묘한 것으로 변화할 것이네. 언제 어떠한 때이건 필시 승리의 쾌감, 무력한 적을 짓밟는 쾌감이 있다네. 미래상을 보고 싶으면 영원히 인간의 얼굴을 짓밟고 있는 구둣발을 상상하게나.」

쾌락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권력의 쾌락은 통치의 쾌락과 가까운 관계에 있으며 그것은 피통치자에게 개인 또는 집단의 의사를 강요하는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영원히 인간의 얼굴을 짓밟고 있는 구둣발'은 바로 권력의 비유에 불과하다. 어떤 권력자도 권력 그 자체를 위하여 권력을 잡으려는 사람은 없다는 점을 똑똑히 알고 있다.

권력은 지위이며, 월등한 것이어서 그것이 완전할 때는 권력의 보수인 여러가지 쾌락을 즐기게 된다. 남에게 공포심을 준다든지, 사랑을 받는다든지, 죽이든지 살리든지, 유죄판결을 내릴 것인지, 집행유예를 내릴 것인지 독재를 할 것인지 민주주의를 행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쾌락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지배의 입장이다.

우리는 〈1984년〉을 스위프트풍의 비유로서만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그것은 이해와 파악의 비유다. 오웰이 보여준 그런 미래는 단순히 단편적으로 밖에는 타당하지 않다. 잉그속이 존재할 가능성은 없다. 잉그속은 단순한 인간조직이 섣불리 흉내내고 있는 전체주의의 실현 가능한 이상에 불과하다.

어디까지나 끈질기게 버티고 있는 것은 〈1984년〉의 비유적인 힘이다. 〈1984년〉은 우리가 품고 있는 가장 심한 불안의 묵시록적인 원본인데 왜 우리는 지금 구제할 수 없는 비관론에 싸여 잉그속이 출현하기를 바라고 있는가? 우리가 항상 두려워해온 것은 국가다. 국가는 언제나 무섭다. 그건 왜 그럴까?

③ 예견2 - 카코토피아(Kakotopia) 

‘네가 누구이든 너는 항상 일을 해야 한다. 게으름을 피울 구실은 아무 것도 없으려니와, 술집이나 매음굴도 없고, 여자를 유혹할 기회도 밀회의 장소도 없다. 누구나 너를 주목하고 있다. 너는 너의 일을 계속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한가한 시간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이상은 영국의 토마스 모어가 쓴 〈유토피아〉에 나오는 구절이다. 라틴어로 된 원문(原文)에서 모어의 말은 그다지 강렬한 느낌을 주지 못하고 있으나, 구어체(舊語體)의 영어로 옮기면 잉그속(Engsoc)적인 냄새를 풍긴다.

유토피아(UTOPIA)라는 말은 토마스 모어가 처음으로 사용하였는데 그 말에는 즐거움과 안락, 요컨대 모든 걱정거리가 완전히 잊혀지는 사회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러나 좋은 사회이건 나쁜 사회이건 상상의 사회를 의미하는 말로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UTOPIA를 분해하면 그리스 말의 OU와 TOPOS로 나누어진다. OU는 부(否), 비(非)를 의미하고 TOPOS는 장소(場所)를 의미한다. 많은 이들이 이 OU를 선(善)이나 은혜를 나타내는 EU와 혼동하고 있는데 EUTOPIA는 EUPESIA의 반대어로 사용되고 있으며, 두 가지 모두 엄밀히 말해서 유토피아의 항목에 들어간다.

나는 오웰이 상상한 〈1984년〉의 사회를 카코토피아라 부르고 싶다. 카코포니 (Cacophony, 不調和音), 카코데몬(Cacodemon,악령) 등과 같은 입장에 따라 그렇게 부르기로 했으면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카코토피아는, 디스토피아(Dystopia, 결함사회)라는 말보다 더 나쁜 느낌을 준다.

대개의 미래상은 카코토피아적이라 할 수 있다. 오웰은 특히 카코토피아 소설의 대단한 애호가이며 〈1984년〉은 최악의 상상세계를 그린 최대의 소설이다. 그러나 〈1984년〉을 말하려면 러시아의 소설가 쟈마틴이 쓴 〈우리들〉이란 책을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1946년 1월 4일자 트리뷴지에 오웰은 〈우리들〉의 서평을 쓰면서 이 책을 소개했다. 이 책은 지금 〈1984년〉이상으로 유명하다. 책의 저자 쟈마틴은 〈우리들〉을 통해 공산주의적 기계주의를 통렬히 비판했다. 그는 1906년 제정러시아 정부에 의하여 투옥되었고, 1922년에는 볼셰비키에 의해서 독방에 감금되었다. 쟈마틴은 거의 모든 형태의 정부를 미워하고 있었다. 그는 일종의 원시 무정부주의자였다.

〈우리들〉이란 제목부터 무정부주의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바쿠닌의 슬로건 '나는 나라고 하고 싶지 않다. 우리들이라 부르고 싶다' 를 은연 중에 가리키고 있는 듯하다. 이 말의 의미는 강력한 중앙집권에 대한 대응어로서 각각의 개인이 아니라 자유로운 무정부 사회라는 말인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들〉이 씌어진 것은 1923년으로서, 러시아에 대해 쓰고있는 것도 아니며 어떤 기존의 권력체제를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이데올로기로 볼 때 위험한 책이라는 이유로 출판이 금지되었다. 책 속에 나타난 공상은 황당무계한 데다 배경이 아주 먼 미래의 세계로 설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출판이 금지된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무대는 26세기의 유토피아 세계로서 그곳의 시민들은 완전히 개성을 잃어버리고 번호에 의해서 식별될 수 있다. 그들은 제복을 입고 있으며 '인간'이 아니라 ‘유니프스'라고 불려진다. 오웰이 말하는 전막(電幕), 즉 텔리스크린은 아직 발명되지 않고 있다.

그곳의 개인주택은 보호대라는 국가 경찰이 감시하기 용이하도록 유리창으로만 되어 있다. 음식은 합성식품이며 오락으로는 확성기에서 시끄럽게 흘러나오는 국가(國歌)에 보조를 맞추어 행진하는 것이 전부이다.

결혼은 행해지지 않으나 일정기간에 섹스가 허용되고 있다.섹스기간이 되면 유리창으로 되어 있는 주택에 커튼을 칠 수있게 된다. 핑크색의 배급권을 끼운 섹스 배급 쿠폰이 있고,성교의 상대가 그 쿠폰의 원장에 날인을 하게 되어 있다.

단일국가라고 불리는 그 세계는 빅 브라더와 마찬가지로 정체 모를 인물에 의하여 통치되며, 그 인물은 은인(恩人)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투표를 통해서 권력의 자리에 앉게 되지만 선거에서 경쟁 상대는 한 사람도 없으므로 은인은 영구히 집권한다.

이 단일국가의 철학은 단순하다. 행복하지만 동시에 자유로울 수는 없다. 자유란 선택의 괴로움을 부과하는 것이다. ‘무한히 자애로운 신(神)은 아담과 이브를 두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는 영광의 전원에 가두어 놓음으로써 선택의 괴로움을 제거하려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금단의 과일을 훔쳐먹어 영광의 낙원에서 추방 당하는 괴로움을 겪어야 했다. 즉 자유 의지의 대가를 지불했다'는 창세기의 해석을 근거로 하여, 자유는 오직 불행일 뿐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들〉의 단일국가는 자유라는 뱀을 죽이고 에덴의 낙원을 되찾아 국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소설 〈우리들〉의 주인공 겸 해설가는 D503호라는 기사(技師)로서, 그는 착한 시민이 되려고 노력하지만 자기로서도 깜짝 놀랄 정도의 선천적인 충동에 사로잡혀 사랑이라는 금지된 행위를 하게 된다. 게다가 더욱 불행한 것은 그가 사랑하는 상대는 담배나 알콜 같은 악덕을 추구하면서 레지스탕스 운동을 지휘하고 있는 1330호라는 여성이었다.

처음부터 건전한 시민을 꿈꾸었던 D503호는, 국가가 질병으로 간주하고 있는 '상상력'을 X선 요법에 의하여 제거할 기회가 생겨 상상력 병을 고치게 된다. 그리하여 D503호는 애인 1330호를 비롯한 지하운동의 공모자들을 경찰에 밀고하고는, 그들이 고문당하는 모습을 무표정하게 바라본다.

반체제주의자들은 모조리 처형된다. 처형에 사용되는 도구는 '은인의 기계' 로 그것은 음모자들의 육체를 연기와 한 모금의 물로 환원시켜 버린다.

오웰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이 처형은 실제의 인간을 제물(祭物)로 바치는 것으로 처형장면을 묘사하면서, 고의적으로 고대 세계의 음침한 노예 문명사회를 그리고 있다.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것, 잔학 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행위, 신성(神性)을 부여받고 있는 지도자를 위한 숭배 등에서 엿볼 수 있는 전체주의의 불합리성에 대한 직관적 파악, 이것이야말로 쟈마틴이 작품을 헉슬리의 그것보다 뛰어난 것으로 만드는 요소이다. 」

여기서 헉슬리의 그것이란 바로 〈아름다운 신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 책 역시 쟈마틴의 영향을 받아 쓰여졌다.

오웰은 헉슬리의 〈아름다운 신세계〉가 미래의 가능성을 그린 청사진으로는 부족하다는 점과, 정치적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물론 헉슬리가 그린 유토피아에서도 쟈마틴의 유토피아에서처럼 행복을 위해 자유가 희생된다는 점은 같다(이때 행복이란 말은 만족이란 말로 바꾸어 생각하는 것이 좋다).

헉슬리가 그린 유토피아에서 미래 세계의 시민들은 국가가 제시해 주는 운명이나 생활에 만족하게 된다.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것은 전혀 없으며 사회는 엄격하게 계층화되어, 위로는 최고의 지식층에서 아래로는 최하의 하층 노동계급까지 정해져 있다. 계급은 서로 이동할 수 없는 엄격한 것이다.

또 아기는 섹스에 의하여 태어나지 않고 시험관에서 생산될 뿐이다. 이것은 완전하게 안정된 사회이며 여기서는 쾌락주의가 바로 철학이다.

〈아름다운 신세계〉에 대한 오웰의 거부가 여기에 있다. 그는 그런 사회는 오래 지탱할 만한 역동력이 없다고 말한다.

「권력에 대한 갈망도, 새디즘도, 그 어떤 종류의 가혹성도 없다.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권력 유지에 욕심이 없고 모든 사람이 쾌락 이외의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할 때, 과연 이런 사회가 오래 지속될 수 있단 말인가?」

오웰에게 있어서는, 지배자가 피지배자에게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려는 욕망을 갖지 않는 사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웰이 말하는 사회, 그 사회의 역학은 피지배자가 지배하는 자에게 저항하는 것에 의해 성립된다. 저항하는 피지배자를 학대하고 탄압하는 쾌감이 지배자의 보편적인 속성이라는 것이다. 또 그러한 저항과 탄압이 없으면 그 사회는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남을 지배하고 싶어하는가? 그것은 남에게 은혜를 베풀려는 것이 아니다. 

국가는 지배자가 피지배자에 대하여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생겨난 도구이다. 이 도구가 기능을 발휘할 때 가능한 모든 반대에 직면하지 않게 해야 할 필요가 있는 이상, 국가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으로서의 악(惡)은 결코 개인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오웰의 미래 사회는 매우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 지배자가 악을 위해서 악을 행하는 데 주된 기쁨을 느끼는 사회로 만들어져 있다. 악을 위해서 악을 행한다는 것은 바꿔 말해서, 서서히 의식적으로 혹은 조직적으로 개인에게 고문을 가함으로써 인간을 인간성을 박탈당한 비인간으로 바꿔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궁극적인 카코토피아이다.

나치스 독일이나 소련, 그 이외의 많은 독재국가들이 이 카코토피아로 향하는 경향을 보였지만 끝내 카코토피아에 이를 수는 없었다. 그런데 오웰은 미래의 세계가 카코토피아로 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국가는 점점 강대해지고 가장 악랄한 탄압의 기교를 발휘하여 개인을 잠꼬대나 할 수밖에 없는 비인간으로 변하게 한다. 미래에는 개인이 굴욕적으로 패배하고 국가는 전면적인 승리를 기록할 것이다.

오웰의 이 예견이 과연 현실화되고 있는지 어떤지를 살펴보자.

④ 젊은이들에게

국가를 불신한다거나 무서워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19세기는 폭군정치의 도구로서의 국가가 해체(解體) 되기를 원했다는 점에서 20세기보다는 그러한 느낌이 더욱 강렬했다. J. S. 밀과 같은 사상가는 전쟁을 국가의 전형적인 발현으로 보았다. 밀은 전쟁이 개인이나 자유로운 인간사회에 불가결한 악(惡)이며, 전쟁 그 자체는 국가가 ‘부자연스런 괴물' 이라는 설(說)을 정당화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마르크스는 전쟁이야말로 자본주의 독재를 실행하기 위한 계획이며 장치라고 보고, 만일 노동자 계급이 권력을 잡으면 전쟁이 없어질 것이므로 국가는 전락하여 파괴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한편 마르크스와 동시대 사람이었던 미하일 바쿠닌은 국가를 사악한 거인이라 보고 국가를 타도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바쿠닌은 당시 어리석은 사람으로 여겨지고 허풍장이로 무시당했으나, 1세기가 지난 후 역사는 그를 혁명적 무정부주의의 아버지로 받들게 되었다. 바쿠닌의 영향으로 인해 무정부주의는 언제나 폭력의 색채를 띠게 되었다. 무정부주의 (Anarchism)라는 말에서 화약 냄새를 맡게 될 정도다.

아나키즘은 그 어원으로 올라가면 An(無) + Archos(統治者)라는 의미로, '통치자 없이 살아가는 주의' 라는 말로 풀이할수 있다. 마르크스처럼 체계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던 러시아귀족 출신의 바쿠닌은 충동적인 감성에 의하여 자신의 주장을 펴고 있다. 바쿠닌은 인간을 사랑하고 보편적인 우애를 주장하면서도 유태인과 독일인을 싫어했다. 그는 일체의 권위를 부정하여 한때는 레닌식 혁명적 독재체제를 부르짖기도 했다.요컨대 바쿠닌은 합리적인 무정부주의 이론보다는 무정부주의를 인간화, 영웅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바쿠닌이 태어났을 때는 1814년, 나폴레옹이 워털루의 전쟁에서 패배하기 전이었다. 당시 유럽을 풍미하고 있었던 전제적 폭군주의가 바쿠닌의 어머니에게서도 나타나고 있었다고 한다. 바쿠닌은 그런 어머니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자유로운 것을 바라고 어떤 제약도 싫어하는 성품이 되었다고 한다.

바쿠닌은 열 한 명이나 되는 형제의 장남이었으므로 동생들로부터 우상시되고 있었다. 거기서 그는 작은 사회가 서로 다투고 갈등한다 해도 전체적인 질서는 유지될 수 있음을 보았고, 그것이 어찌하여 더욱 큰 사회에는 적용될 수 없는가를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때부터 그는 과격해지기 시작한다. 그는 성장하여 러시아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전쟁에 관하여 발언했다. '인간이 전쟁을 하는 것은 승리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위험에 의하여 내분비선의 활동이 활발해지는 기쁨을 맛보기 위한 것'이라고, 이렇게 군대의 규율과 통제에 반발심을 나타낸 그는 끝내 군대를 떠나 베를린으로 가서 철학을 공부하게 된다.

베를린에서 헤겔 철학을 공부하며 그는 스스로의 변증법을 만든다. '역사는 보다 나은 세계를 만드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것은 낡은 것보다 좋은 것이다. 낡은 것을 파괴하면 그 대신 새로운 것이 나온다. 자, 그러니 모두 다같이 낡은 것을 때려 부수자.’ 이것이 아나키즘을 그토록 무서운 폭력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새로운 것을 찾는 매력을 지닌 것으로 만든 요인이었다.

바쿠닌은 직업으로서 혁명적인 아나키즘의 길을 택했다. 1848년은 유럽 각지에서 민중봉기가 성행했던 시기였다(민중봉기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인텔리 계급이 민중이라는 이름 아래 일으킨 폭동이었다). 바쿠닌은 이 폭동의 현장을 찾아 유럽 각지를 헤매면서 체포, 탈주, 비밀결사 등을 계속했지만 영웅적인 결말을 보지 못한 채 불순한 반란자로 몰려 스위스에서 죽고 말았다. 그러나 아나키즘의 행진은 계속되었다. 바쿠닌이 죽은 후 오히려 그 세력은 더욱 커졌다. 바쿠닌의 뒤를 이은 맹신자들은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하여, 낡은 것에 대해 무차별 폭거를 자행했다. 폭탄을 던지고, 방화하고, 제국주의 관료들을 암살하고, 부르조아나 프롤레타리아에 상관없이 공격을 감행했다. 그리하여 아나키즘은 심한 비난을 받았다.

이때 크로포트킨이 아나키즘의 철학적인 존엄성을 어느 정도 회복시켰다. 그는 지적(知的)이고 유토피아적인 요소를 강조함과 동시에, 이론으로서의 아나키즘이 노동자 계급에 적합하도록 정리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인텔리 계급이나 고안할 수 있었던 그런 철학이 스페인에서는 교묘하게도 노동조합주의와 절충되었다. 스페인 내란은 이런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신(新) 바쿠닌주의자들은 스페인 곳곳에서 살해당했다. 그러나 아나키즘은 젊은이들 속에서 부활할 수 있었다. 젊은이들은 이상주의에 기울어지게 마련이므로 이것이 무정부주의와 잘 조화되었다고 하겠다.

〈1984년〉이 나온 이래, 젊은이들이 강렬한 호감으로 이 책을 받아들인 이유는 몇 가지 안된다. 그러나 그 몇 가지 이유가 폭발적인 매력이 되고 있다. 〈1984년〉에는 매우 현저한 아나키즘적 특징이 있다. 즉 법률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젊은이들과 잘 부합되고 있다. 그러니까 〈1984년〉은 이론적으로 '누구나 자유롭다'는 사실이다.

모두에게 자유가 없는 것과 같은 논리로 인간의 자유라는 명제는 모든 토론의 명제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명확한 정의와 신학적 지식과 형이상학적 통찰이 없이 자유가 논의되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학생집회의 경우가 그렇다. 이런 회합을 갖는 젊은이들이 모두 자유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스럽다.

젊은이들이 정치적 억압에 대항한다는 선동에 이끌리고 있는 것은, 인간의 자유에 대한 지식 부족과 자유를 행사하기 위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젊은이가 전통과 교육의 룰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폭군정치에 대한 유일한 방어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꿔 말해 젊은이는 압정이나 전제정치의 정체가 어떤 것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오웰은 이 점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1984년〉의 윈스턴 스미스는 무엇이 진실이며 무엇이 자유인가를 알려고도 하지 않고, 잉그속의 강령이 지니는 내면적인 성찰조차 없이 '빅브라더를 타도하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겐 잉그속에 대항할 형이상학이 없다. 윈스턴 스미스가 놓인 이 상황은 현재, 가령 자유의 허용도가 매우 높은 민주국가에 있어서도 자유를 사랑하는 개인이라면 누구나가 놓여져 있는 상황을 멜로드라마식으로 과장했을 뿐이다. 

스페인 속담에 이런 것이 있다.

'갖고 싶은 것은 가져라. 그러나 그 보상을 하라! 

중요한 것은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의 의미를 충분히 자각하지 않고 행동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이것이 개인의 자유에 따른 조건이다.

⑤ 시계장치의 오렌지

나는 지금까지 말한 자유에 대한 설명에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로맨틱한 요소가 있음을 자각하고 있다.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공격이 아무리 심하다 할지라도, 개인주의의 가치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두뇌 속의 불가침 부분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많은 사람들에게 아직도 감옥이 차가운 철창과 두터운 돌담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부인하는 사고방식이 있다는 말이다. 이런 생각은 매우 낡은 것이다.

그리고 현대의 폭군정치가 숨기고 있는 능숙한 책략과 무자비함을 잘 모르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1984년〉은 영화로 두 번 상영되었는데 처음에 만들어진 영화는 (이제는 상영되지 않고 있을 테지만) 윈스턴 스미스와 그의 정부(情婦) 쥴리아가 총살 집행반 앞에서 ‘빅 브라더를 타도하라'고 외치는 장면에서 끝난다.

사실 독재권력이란 적을 숙청하는 일보다 일반 시민을 탄압하는 데 더 관심을 갖고 있으므로, 형벌의 경중(輕重)이 문제가 아니라 정부에 대한 이단사상을 말살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다.

독재권력에 반항하는 정신을 완전히 벗겨내어 철저히 없애버리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폭군의 감시를 속일 수 있는 개인의 영혼이 있게 마련이라고 믿고 있다. 아니, 믿기보다는 그렇게 믿고 싶어하고 있다.

잉그속은 순교에 관해서라면 무엇이든 알고 있으며, 순교자들의 육체는 사라져도 그 정신과 목소리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순교자의 어원은 목격자 또는 증인이라는 말이 된다. 따라서 잉그속은 증인 따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요즘 우리들 사이에는 일부러 감옥에 들어가려는 행동은 하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말해, 감옥 속에서 참된 자유를 향유하기 위하여 투옥되는 것을 몽상하는 경우가 있다. 감옥에서 〈천로역정〉이나 〈래딩 감옥의 발라드〉 등을 쓰고 싶다는 꿈, 혹은 책과 노트와 연필과 빛을 모두 빼앗긴 채 머리 속에서 영웅에 관한 끝없는 서사시를 그려냄으로써 정의로운 상태를 지니고 싶다는 꿈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말이다.

사실 철창이 감옥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감금상태에 놓였을 때 당사자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어느 만큼 생각하느냐에 따라, 자유인(自由人)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결정하게 된다. 아무리 감옥 문이 튼튼하다 할지라도 인간의 정신까지 가둬놓을 수는 없다. 그러나 잉그속은 인간의 의지가 완강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육체는 물론 정신까지 감옥 속에 가두려고 한다.

설령 오웰의 카코토피아가 이 세상의 모든 자유롭지 못한 사회를 대표한다 해도, 독재권력이 자유로운 인간 정신을 간교한 방법으로 탈취한다는 이야기는 〈1984년〉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소설에 나오는 방식은 자유로운 인간 정신을 잔학행위로써 붕괴시키고 있다.

개를 학대해도 만족감을 얻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인간을 학대하는 것보다 그 만족도는 낮다. 독재권력은 괴테나 아인슈타인같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정상적이며 명석한 사람을 고문하여, 절규하는 육체와 사고력을 잃어버린 뇌세포 덩어리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이다.

〈1984년〉의 독재권력은 이런 기술 —— 소련이나 나치스로부터 배운 절망과 공허의 상태를 낳기 위한 —— 을 노골적으로 사용한다. 그 기술은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를 고백시키고, 부들부들 떨면서 눈물로 참회하는 피고문자의 몸짓을 즐겁게 감상한다. 아무리 내면적인 의지가 강하다 할지라도 고문은 우리들 인간이 견뎌낼 수 없기 때문이다.

고문은 처음부터 불합리한 것에 의존하고 있다. 피고문자가 무엇에 의해서 가장 큰 공포심을 느끼는가 하는 반사작용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1984년〉의 경우 윈스턴 스미스에게는 쥐가 사용되는데, 그 이외의 사람에 대해서는 뱀이나 벌레 등등의 공포 재료가 신중히 결정된다. 고문은 고통보다는 공포심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고문의 기술은 육체가 아닌 정신에서 발휘되기 때문이다.

비참을 동반하지 않는 독재정치는 있을 수 없다고 오웰은 말하고 있다. 인간의 혼을 완전 조작하는 기술은 파블로프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

파블로프는 1936년 세상을 떠나기 4년 전에 이미 자기의 일을 마치고 있어, 그것이 사회에 응용될 가능성을 어느 정도 내다볼 수 있었을 것이다. 19세기의 유물론자였던 파블로프는 인간을 선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인간의 두뇌를, 간장이 담즙을 분비하듯이 사상을 분비하는 기관으로 보았다. 과학적인 연구자에게 있어 두뇌는 인체의 다른 기관과 마찬가지로 신비한 대상이 아니라고 간주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사고(思考)와 감정의 소재지이며 행동의 자극을 지배하는 대뇌는 근본적으로 개조될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그는 그 개조가 능률적인 메커니즘, 즉 대뇌의 소유자가 인간 유기체로서 자신을 향상할 수 있도록 해주는 방향으로 개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이 완벽해질 수 있다는 것은 단순하고 경건한 동경의 영역을 뛰어넘어 과학적인 프로그램이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파블로프는 개를 대상으로 실험을 행하여 개의 반사활동을 조건지을 수 있음을 찾아냈다. 먹이를 줄 때 벨을 울리면 개는 침을 흘린다. 그것이 반복되면 먹이를 주지 않고 벨만 울려도 개는 침을 흘린다. 이 발견이 지니는 가능성은 대단히 방대한 것이며, 헉슬리는 이 가능성을 분명히 간파했다.

그는 〈아름다운 신세계〉에서 사회의 하층계급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싫어하게 만드는 방법을 보여준다. 하층계급 아이들은 장난감을 살 수 없으므로 그렇게 교육시키는 것이다. 그 방법은, 처음에 아이들에게 많은 장난감을 보여준다. 아이들은 장난감을 보고 기뻐 어쩔 줄 모르는데, 그때 장난감에 전기 쇼크를 일으키는 장치를 해서 아이들에게 건네준다. 아이들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쇼크를 받아 점점 장난감을 싫어한다.

이런 방법으로 하층계급 사람들에게 샴페인 따위를 싫어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것은 어떤 것을 거부하게 만드는 소극적인 것이지만 적극적인 방법도 있다. 즉 쓰레기통 속에서 달콤한 냄새와 아름다운 음악이 계속 흘러나오도록 해두면 아이는 청소부가 될 마음자세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파블로프 대신에 스키너가 자주 입에 오르내린다. 행동심리학자 B. F. 스키너는 〈자유와 존엄을 초월하여〉라는 책에서 인간사회가 존속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에 관하여 쓰고 있다. 이 조건을 만들려면 적극적 강화법(보상을 해주면서 행하는 조건부)에 의하여 인간을 개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이성적 동물이라는 전제에서, 인간에게서 자신의 공격적 경향을 없애고 사회적 양심을 더욱 증진시키는 합리적인 잇점을 제시해 주는 것보다, 일정한 행동을 쾌감과 연결시켜주면 인간은 그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누구나 보상을 좋아한다. 보상이 없으면 인간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들 인간은 개인의 자유가 상실되어도 보상이 있으면 그다지 놀라지 않는다.

아사 케스트러는 공산당에 의한 투옥과 고문을 이겨낸 사람이므로, 고문이나 그 이외의 방법으로 인간의 두뇌를 조작한다는 생각만 해도 몸이 오싹해지는 버릇이 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그는 인류가 살아가려면 인류를 개조하기 위한 모종의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이다.

그는 〈두 얼굴을 가진 신(神)〉이란 책에서 마크린 박사의 학설을 소개하고 있다. 즉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3개의 두뇌를 받고 있는데, 하나는 파충류의 두뇌이고, 다른 하나는 하등 포유동물로부터 이어받은 두뇌이며, 또 하나는 포유동물이 새로 발육시킨 두뇌이다. 이들 3가지 두뇌는 서로 동조하는일이 없으므로 인간의 중추신경계통에 분열생리적이라는 용어를 적용할 필요가 있다. 즉 인간은 병에 걸리는 생물이라는것이다.

인간은 지구에서 벗어나 달에 착륙할 수 있다. 그러나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넘어가기는 불가능하다고 케스트러는 말하고 있다. 이렇게 되는 근본적 이유는 인간이 자신에 대하여 의외로 쉽사리 굴복해 버리는 버릇이 있는 데다, 독재자나 전쟁 지도자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려는 버릇이 있어서 생겨나는 현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의학은 어떤 종류의 분열증이나 정신이상에 대한 치료법을 발견했다. 의학이 낡은 두뇌가 행하는 바보 같은 짓거리를 거부할 수 있는 새로운 혈액을 공급하고, 진화의 터무니없는 잘못을 수정하며, 감성과 이성을 절충시켜 정신병자에서 정상적인 인간으로 비약하는 은혜로운 효소의 집합을 발견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이미 유토피아적인 꿈이 아니다.

그 접근 방법이 어떠하든간에, 또 처방법이 무엇이든간에 인간을 병에 걸리는 동물로 보는 견해는 옳은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병에 걸리는 인간에 대해 발육 대책을 강구할 필요성을 느끼는 경우, 그 사람은 진실하다고 할 수 있다.

스키너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는 인간의 병을 치료하는 인간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의 전제를 생각해야 한다.

모든 인간이 병을 앓고 있긴 하지만 그 중에는 비교적 증세가 가벼운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다. 가벼운 증세의 병자를 편의상 건강인이라 부르기로 한다면 결국 두 종류의 인간이 존재하게 된다. '우리들'과 '저 사람들' 이다. '저 사람들' 이란 우리들이 고쳐주어야 할 병자들을 말한다. 우리가 저들을 치료해 주겠다는 뜻이다. 건강한 ‘우리들’과 병을 앓고 있는 '저 사람들' 이 분리되어 있다는 이 의식에 이끌려 1960년에 나는 〈시계장치의 오렌지〉라는 짧은 소설을 썼다.

내 개인의 생각으로 그 소설은 훌륭하지 못하며 지나치게 교훈적인 데다 언어구사가 너무 노출증적이었다. 그래도 나는 사람들 가운데 범죄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생각에 대한 나의 혐오감을 정직하게 표명했다.

1960년경 영국에서는 정직한 사람들이 미성년자들의 범죄증대에 관하여 귓속말을 하고 있었고, 신문에서도 선풍적인 기사로 보도하고 있었다.

그래서 범죄 충돌을 그 근원에서 없애버리는 치료를 하자고 주장하는 무책임한 사람들도 나타났다. 즉 약품이나 파블로프식 조건반사를 이용하여 미성년자 범죄자를 치료하여 반사회적(反社會的)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리면, 사회가 안전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렇게 살펴보면 영국처럼 개인의식이 존중받는 사회에서도 개인보다 사회가 우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비행 청소년은 완전히 건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아직 미성숙한 사람이며 투표권도 없다. 요컨대 사회를 대표하는 '우리들’에 대립하는 '저 사람들'에 속하고 있다.

당시에 일부 강간범들의 마음속에서 성적(性的) 공격충동이 근본적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던 것은, 영화나 텔리비전의 스크린에 벌거벗은 소년이나 소녀들의 도발적인 모습이 너무 빈번하게 등장한 것도 한 이유가 된다.

사회구조 자체가 그들에게 성적 충동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때 나는 비행 청소년들이 반사회적 행동을 실행하는 장소는 물론이고, 그런 행동만 생각해도 구토와 혐오를 느끼는 그런 실험적 정신병원을 상상했던 것이다.

내가 책에다 <시계장치의 오렌지〉라고 제목을 붙인 이유는 이런 상상과 무관하지 않다.

오렌지처럼 풍부한 색깔과 단맛을 지닌 과일에 파블로프의 조건반사나 기계론적인 법칙을 적용한다는 것, 그래서 나는 이 제목이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말레이지아에서 공무(公務)에 종사한 일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인간을 의미하는 말은 '오랑' 이다. 내 소설의 주인공은 알렉스이며, 알렉스라는 것은 '인간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 알렉산더의 줄임말이다. 알렉스에는 이 외에도 담겨 있는 뜻이 있다. Alex라 하면 ‘자기 자신에 있어서의 하나의 법률' 이고 '자기 자신의 언어' 이며 동시에 희랍어의 α(알파)는 없음(無)을 의미하고 있으므로, ‘법률을 지니지 않은' 이라는 의미도 갖는다.

소설가들은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을 면밀한 주의력과 노력으로 고심하는 사람이다. 알렉스라는 이름은 의미심장하고 고귀한 이름이며 나는 알렉스라는 이름의 남자가 동정받고 불쌍히 여겨져, '저 사람들'의 범주를 벗어나 '우리들’과 동일하게 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탈선이었다. 실험적 정신병원의 노력, 즉 '저 사람들’을 ‘우리들’과 동일하게 만들려고 한 것이 비행을 저지르는 악의 선택능력을 상실시켰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음악을 좋아하는 알렉스의 천성조차 없애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 천성적 음악 애호심이 없어진 것은 모짜르트나 베토벤의 음악에 대한 것이었지, 폭력영화의 반주음악에는 감정적 고조를 나타냈다. 이것은 국가로서 크나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었다. 즉 젊은이들이 폭력을 휘두른 대가로 권력자들이 고문을 사용했을 때, 폭력을 행사할 힘마저 잃어버린 젊은이는(일단 권력자의 의도처럼 되었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이 가져야 할 폭력에 대한 인식 그 자체까지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알렉스의 경우는 더욱 참담했다. 음악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음악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서 온 축복이 아니었을까?

아물든 국가는 이중의 죄를 범한 셈이다. 우선 인간성이란 그 자신의 도덕적 선택이라는 자유에 의하여 성립되는 것이므로 국가는 하나의 인간을 말살한 것이며, 더우기 하나님의 축복까지 멸망시킨 것이 되었으니까.

국가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사랑의 실천은 그와 무관한 것이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해도 인간은 하나님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두뇌가 아무리 신성하지 못하다 해도 인간은 그것을 분해하지 말아야 한다.

파블로프여, 조용히 잠들지어다.

⑥ 사랑의 죽음

〈1984년〉의 윈스턴 스미스가 매일 행해지는 ‘조직적 증오의 집회'에 참석하고 있을 때 그는 2분간에 걸친 음향과 영상의 작용으로 인하여, 자신의 마음속에서 살인에 대한 혐오감이 급격히 일어나고 있음을 느낀다.

더욱이 자기 자신에게 억지로 강요되어 느껴지는 증오의 마음은, 아무에게나 쏟아버릴 수 있는 무차별한 무기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은 오웰이 〈1984년〉을 집필했던 1940년대의 시기에 행해진 발견의 하나였을 것이다.

즉 어떤 사람에게 한번 불붙은 증오심은 국가가 증오하라고 포고한 대상 어디에나 마치 입으로 부는 화살처럼 쏟을 수 있다는 점이다.

어째서 지금은 미워해야 할 것을 사랑해야 하고, 사랑해야 할 것이 미움의 대상으로 바뀌는가?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감정이 어느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바뀌는 일이 기계조작처럼 가능한가? 인간의 감정을 순식간에 바꿔버릴 수 있는 이중사고의 발상은 오웰 자신이 겪은 시대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었다.

전쟁 전 나치스에 못지않게 악마적이었던 스탈린의 소련이, 나치스의 침략을 받아 영국과 같은 '나치스의 피해자가 되었다는 그 이유만으로 하룻밤 사이에 사랑해야 하는 상대로 바뀌었다는 사실, 그리고 스탈린 개인에 대해서도 찬양가를 불렀다는 사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전쟁이 끝나자 돌연 스탈린에 대하여 증오와 저주를 퍼붓게 되었다는 사실이 오웰에게는 신기하게 보였다. 마치 빙빙 도는 레이더의 방향 탐지기처럼 자유자재로 감정의 방향과 대상을 빙글빙글 돌리는 것이 오늘날에 있어서 국가의 기본적인 테크닉처럼 보였던 것이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어떤 것이 본질적으로 미움을 받아야 할 것인지 선별한 다음에 그것을 미워해왔다. 기독교는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가르치면서도 그 속에 잠재되어 있는 잔인성이나 탐욕과 같은 것들을 미워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예전에는 마땅히 미워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던 시대가 있었으나, 현재는 무엇을 미워해야 할 것인지 확실하지가 않다. 전통적으로 악덕이었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미덕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오만하고 탐욕스럽고 호색한이며, 질투심이 강한 사람일지라도 영화계의 스타나 산업계의 거물로 명성을 얻으면 그는 일약 영웅처럼 떠받들어진다. 겸손은 허약과 같은 의미가 되고 분별심은 겁으로, 관용은 멍청함이 되고 만다. 본질적으로 혐오해야 할 ‘성질’ 이란 것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사랑해야 할 ‘성질’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1984년〉에도 사랑이란 단어가 나온다. 그 사랑은 복음서에서 말하는 보편화된 사랑이 아니며, 물론 19세기의 저 로맨틱한 소설 속의 사랑도 아니다. 거기에서 사랑은 결혼식의 맹세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로서 사용되고 있다. 윈스턴 스미스가 이름도 모르는 여인에게서 받은 메모지에 씌어 있는 ‘사랑하고 있습니다’는 간음을 하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간음은 국가에서 통제하는 쾌락으로서 잉그속 사회에서는 반역 행위에 속한다.

섹스를 나눈다는 것에는 섹스 그 자체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미덕이 덧붙여지게 된다. 그런데 잉그속 사회에서 고문을 행하는 부서에 '애정성'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처럼, 간음하고 싶은 의지를 '사랑한다'라고 표현한 그 메모지의 말에는 똑같이 전통적인 가치를 우롱하는 면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1984년〉의 약점이 여기에 있다. 개인의 애정관과 국가의 애정관이 서로 가치를 우롱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를 바 없다는 것 말이다. 자유를 아무 하고나 간음할 수 있는 정도의 권리로 생각하는 쥴리아가, 윈스턴에게 지금까지의 정사(情事)를 멜로드라마처럼 이야기해 주는 장면은 차라리 서글프다.

오웰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전통적 사랑의 가치가 소멸되어갈수록 애정의 관념 자체가 소멸될 것이라는 점인데, 이런 것은 결코 억압적인 국가의 탓이 아니다. 현대의 가장 자유스럽다는 미국 문명이 결혼제도에 남긴 커다란 공적은 사랑의 가치를 낮추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청교도가 간통을 무거운 죄로 다룬 것과 크게 관계가 있다. 그래서 간음보다는 이혼이 나은 것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소설에서나 실제 인생에 있어서 매우 유감이지만, 이혼이란 어쩔 수 없는 최후의 외과수술로써 행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사랑은 새로운 승용차를 구하는 것처럼 되어가고 있다.

오웰이 만든 〈1984년〉식 사랑은 성욕과 동일하게 여겨지고 있다. 성욕이 없어지는 일은 결코 없으며 다만 대상이 바뀔 것을 요구할 뿐이다. 성욕은 이런 점에서 증오와 마찬가지로 총과 대포다. 사랑의 가장 좋은 육체적 표현이 성적인 것이긴 하나, 이 표현을 사랑의 본질과 혼동해서는 곤란하다. 그것을 혼동하는 것은 언어와 실물을 혼동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윈스턴 스미스와 쥴리아는 성욕과 성행위가 서로를 만족시켜준다는 의미에서 계속 관계를 갖지만, 두 사람 모두 자기들의 관계가 영원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 잘 알고 있다.

독재권력은 궁극적으로 결혼의 가치를 하락시키고 가족관계를 파괴하려 한다. 가족관계가 파괴되면 인간은 개별적인 본질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고 인간은 사랑의 가치를 스스로 하락시켜 마침내는 사랑이 죽어버린 미래에 도달할 것이라고 오웰은 말한다. 〈1984년〉에 있어서 최대의 경악은 사랑의 죽음, 아니 사랑의 소멸이라고 오웰은 부르짖는다.  [빈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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