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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모 Apr 28. 2021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 한국인 비판

20여 년전 책인데 우리 사회가 얼마나 좋아졌을까?

[책꽂이 정리]

이 책이 출간된 것이 1999년 1월이다. 이후 그 해 9월까지 초판 35쇄를 찍을 정도로 화제를 모은 책이다. 내가 가진 책도 35쇄이니 열풍이 한창 지난 뒤에 구입한 셈이다. 서가를 정리할 셈(헌책방에서도 사지 않을 테니 결국 폐지함에 버릴 테지만)으로 책을 골라내면서 다시 읽었다.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 한국인 비판/이케하라 마모루/중앙 M&B/1999.09.15 초판 35쇄/7000원

20여 년 전 나온 책이니 책에 나온 나쁜 한국사회의 모습이 얼마나 변했을까? 내 생각을 괄호 안에 살짝 덧붙이긴 했지만 이 글 보시는 분마다 다른 생각이 있을 것이다. 암튼 책 내용을 요약해 옮겨 본다. 읽어 보니 많이 좋아진 곳도 있고 그대로인 부문도 있고 오히려 더 나빠진 곳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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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는 10,000 달러, 의식은 100 달러. ----> (2019년 통계청 자료 1인당 국민소득 33,720 달러, 의식은 변했나?)

수재민 돕기 ARS 기부, 며칠 만에 수 억 원 돌파. 인정 많은 사람들. 그 돈 제대로 전달되는지 확인은?

동전 삼킨 공중전화, 화내며 그냥 다른 전화기로 간다. 한국통신에 따져 배상받아라. 그래야 발전 있다.

100원 공사 수주, 50원 슬쩍, 관련자 아래 위로 나눠 먹기. ---------> (혹시 지금도?)

잘못한 일이 있어도 무조건 보호하는 과도한 자식사랑, 대입 시험날 출근 시간 조정, 학생 스스로 일찍 일어나 시험장 가면 안되나. 망나니로 키우는 가정교육 -------> (지금도 계속되는 ㅠㅠ.)

인재 키워주는 문화가 없다. 앞선 자를 시기한다.

필요할 때만 형님, 의리 찾는다. 클레임 걸렸다고 하루아침에 거래선 바꾸는 대기업. 하청업체는 죽고 기술 개발은 사라지고. 법이란 사회적 약속이다. 교통법규 같은 작은 약속도 못지킨다면 큰 문제. 시대와 상황에 안맞으면 법을 고쳐라. 공해 수준이 된 공공장소 휴대폰 통화. 들어보면 급하거나 생산성 있는 경우는 10퍼센트도 안된다. 쓸데없이 긴 통화, 공해다. -----> (지하철 버스 같은 공공장소 휴대폰 사용은 더 심해진 듯. ㅠㅠ)


한국 상류층 이렇게든 저렇게든 미국에 연줄이 있다. 전부는 아니라도 상당수는 미국으로 도망갈 준비 했다고 나(필자)는 생각한다. IMF 위기 금모으기 할 때도 외화 밀반출 사건은 끊이지 않았다.  일부 기업인은 뼈 깎는 구조조정 외치면서 뒤로는 외국에 호화별장 마련해 두었다. 회사 부도 직전이라고 신문에 오르내리던 모 그룹 회장은 외국 출장 가면 특급 호텔 한 층을 빌리고, 헬기 동원해 골프치러 간다며 난리 피웠다. 과장이 아니다. 내(필자)가 직접 보았다. 명예훼손 문제만 아니면 이름 밝힐 수 있다. -----> (누굴까? 궁금하긴 하다.)


여성의 실질적 힘이 세다. 남자 대부분 월급 아내가 관리. 자식 교육 아내 담당. -----> (남자도 해라.)

아파트 배수 시설 제대로 안 한 건설사, 관리 감독해야 할 책임 피하고 하청업체 핑계. 

한국 생산 방음벽 일본 납품 50% 불량품. 철판 드릴 뚫은 뒤 쇳가루 깨끗이 제거 안 해. 방음 성능이 문제가 아니라 비 맞은 뒤 쇳가루에서 녹물 흘러 미관 해쳐. 생산자 편하자고 대충 하는 일처리.

외국 건설 현장은 외국 감리업체의 철저한 감독, 국내는 대충 넘어가는 공정. 결국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붕괴. 건설 중이던 신행주대교 올림픽대교 붕괴 사고.


변명 사회, 약속 늦은 뒤 '길이 막혀서...' 약속의 엄중함 모르는 사회, 김포공항 출발 일본행 비행기 종종 늦게 출발. 코리아 타임 ------> (이제는 대중교통의 이런 점 많이 개선된 듯. KTX 늦으면 현금 보상하니.)

중국 베이징 골프 클럽, 비매너 한국인 많아져 출입금지. 일본은 초콜릿 내기 정도인데 한국인들은 그날 경기 돈내기를 넘어서 도박 수준 판돈으로 커져. 결국 시시비비 따지다가 소리 높이고 비매너 노출.

갓길 통해 들어서는 새치기 차량, 일본이라면 절대 안 비켜 줘. 결국 교통경찰에게 단속되게 만들어.

재수 없어서 불법이 걸렸다고 생각. 어쩔 수 없는 경우라면 할 수도 있지만 단속됐다면 깔끔하게 벌금 내라.


서비스업은 제품 판매만이 아니라 감사함을 판다고 생각해야.

관광버스 안에서 춤판, 위험하고 황당. 노인에게 자리 양보, 젊은이에게 노인도 감사함을 표시해야, 당연한 듯 앉는 것은 무례. 육교 아래 무단횡단, 사고 나면 자신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불편하고 사회적 비용 발생.

일본도 '생계형 매춘'이 있었다. 1958년 4월 1일 매춘 금지령. 그런데 요즘 원조 교제 성행한다. 중고생들이 휴대폰 부모들이 안 사주자, 몰래 마련하고 매달 사용료 내기 위해 시작. 그런데 한국도 비슷하다. 외국여행 가려고, 비싼 명품 사려고, 등등.


폭탄주 문화, 술 못 먹는 상황이라도 무조건 먹게 만드는 문화. 일본은 친한 친구라도 횡설수설하면 인간 취급 안 하는 문화. 자기 절제 못하면 친구 가치 없다고 생각.

일제 자동차 폐차할 때까지 정비 공장 안 가고 수명 다해. 연비도 2천 cc급 한국차 1리터 16km 정도, 일제 차량은 31km 이상. ------> (요즘 현대 기아차 어느 정도일까? 전기차 시장으로 바뀌니 아예 기준이 달라졌나.)

선천성 과대망상 증후군이라고 말할 정도로 잘난 체한다. 중국인이 돈 많다고 으스대는 홍콩 사람 싫어하고 베트남 사람은 자신을 업신여기는 한국인 싫어한다.


몇 메가 D램 반도체 개발 신문기사 나오지만 수출할 때마다 미국 일본에 내는 특허료 기술료 이야기는 없어.

세계 최초 개발 성공한 신약이라는 기사는 많지만 약국에 한국 신약은 거의 없다. 실제 평가는 낮지만 스스로 높다고 착각한다. -------> (요즘은 그 반대일까?)

정치판에 왜 그리 전과자가 많은가? ----> (민주화 운동 시위 등은 제외해도)


한국 시장이 작으니 수출해야 한다. 자동차도 마찬가지. 기아차 가격도 품질도 안되고 경기도 나빠지니 망할 수밖에. 몇 달 전 나온 한보 사태에 이어 IMF 전주곡. ------> (당시 기아차는 국민기업이라는 광고로 여론을 호도했다. 삼성이 인수할 뻔했지만 버티다가 현대차가 인수했다)

현대차는 부채 탕감 조건으로 인수. 왜 국민 세금으로 재벌을 도와주나. 이런 비정상적인 기업 운영이 IMF 구제금융 신청하게 됐다.

최고위층 한국 관료가 IMF 구제금융 신청 직전 일본에 도움 요청. 그런데 일본 오자마자 "한국이 이렇게 된 데에는 일본의 책임도 있다" 설사 일본 때문이라 해도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누가 돈 빌려 주겠는가. 자존심 상하면 아예 빌리러 오질 말던가. 훗날 일본 정부 관계자들에게 비공식적으로 들은 말. 구제금융 신청해야 하는 상황까지 가는 걸 막아 줄 여력이 있었다. 일본 결론은 "일본이 직접 도우나 IMF를 통해 도우나 결국 한국을 돕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기껏 도와 주고도 고맙다는 소리 한마디 못 들을 거라면 굳이 무리할 필요가 있겠느냐."


한국사람끼리 통하는 변명은 외국 상대로는 안된다. 한 예로 일본에 제품 납품하기 위해 새 기계 도입. 생산 기계가 너무 커서 공장에 들어가지 못해. 공장 크기도 제대로 안 재보고 기계 도입했다는 게 황당. 공장 일부 부수고 기계 설치. 설치하니 전기 용량 모자라 한전 설비 증설 기다린다고. 겨우 기계 돌아가니 밤새워 작업 중이니 납기일 늦는 거 이해해 달라고. 누가 철야 하랬냐고... 처음 한 약속(계약)이 있는데 이게 말이 되는가. 안 될 것 같은 일도 한국인은 "할 수 있습니다. 틀림없이 하겠습니다."라고 큰소리 탕탕 친다. 그래 놓고 일이 안되면 무책임한 변명을 해서 한국 전체 이미지를 망친다.


제주도 상인들은 일본인보다 돈 잘 쓰는 한국 신혼부부 선호한다. 신혼부부들은 일생에 한 번뿐이니 추억 망치지 않으려 돈 쓰는 것이고 바가지요금 아는 일본 관광객은 요모조모 따진다. 일본인은 흡족한 서비스 기대하기보다 일본 국내여행보다 싸서 오는 거다. -------> (결국 신혼부부들도 코로나 19 발생 전에는 해외로 신혼여행 갔다. 제주도는 싸구려 중국 단체관광객이 오는 번잡한 시장판이 되었고.)


쓰레기 소각장 다이옥신 발생 문제 보도하는 언론, "청산가리보다 1만 배나 독성이 세다"느니 "인류가 만들어 낸 가장 위험한 화학 물질"이라느니 거침없이 표현한다. 물론 해로운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문제를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보도'라기보다 '선동'에 가깝다. ------> (지금도 그렇지 않나 싶은데, 게다가 정치 논리가 덧붙여져 더욱 악성이 된 부문도 보인다.)

1997년 5월 환경부 발표한 조사 결과. 한국에서 다이옥신 배출량이 가장 많은 부천 쓰레기 소각장 검출된 다이옥신 양이 23.12ng/m³였다. 이 나노그램(ng)이라는 단위는 10억 분의 1그램이라는 뜻이다. 결국 다이옥신 1g으로 2만 명이 죽을 수도 있다는 표현을 한 신문대로 되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계산이 되지 않는다. 과학적으로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해 소각장 주변 주민에게 나아가 국민에게 불필요한 공포심만 불러일으킨다. 실제로 다이옥신보다 더 심각한 것은 디젤 차량 배기가스다.

쓰레기 소각장 방식도 이제는 재가 30% 남는 스토커로(爐) 방식이 아닌 유동상 방식도 있다. 이 방식은 물기 많은 한국 쓰레기에 적합하고 재가 13퍼센트 정도밖에 안 나온다. 사실 이 보다 더 좋은 용융로(熔融爐) 방식은 재가 거의 남지 않아 다이옥신 함유된 재를 땅에 묻을 필요도 없고 배출량도 크게 줄일 수 있다.


머리 좋은 것도 문제. 1에서 10가지를 다 배우지 않고 중간쯤 배우고 나머지는 자신들 한다고 하지만 제대로 못한다. 일본이 다 가르쳐 주지 않는다는 말도 어찌 보면 다음 단계 배울 준비 안되었는데 어찌 가르칠 수 있느냐는 반론이 나온다. 머리 좋아 일 배우기는 빠르지만 익숙해지면 통제하기가 힘들다. 융통성 있어 빠를 수 있다지만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일본 대중문화는 현재 중고생이 어른이 된 뒤 중고생 자녀 둘 무렵인 30년 뒤에 수입해도 늦지 않다. 압도적 자본력과 기술력 앞세운 일본의 문화 상품으로 인해 한국 문화 관련 산업이 전멸할 수 있다. -    ----> (다행스럽게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의 대중문화가 일본을 압도했다.)


국민의 정부에 바라는 4가지. 1. 공직자 부정부패는 없애야 한다. 2. 기초 질서 회복에 국가적인 역량을 기울여야 한다. 3. 교육 제도를 과감하게 정비해야 한다. 지금 교육제도는 대학 합격 법만 가르친다. 그리고 대학은 예비 실업자 양성소로 전락했다. 한 시간 공부해 지식을 쌓고 한 시간 생각해 지혜를 쌓자. 4. 장기적인 안목을 갖추고 일을 추진해야 한다. 새해 한 달 앞두고 신정 연휴를 하루로 줄인다고 발표했다. 달력 업자 타격뿐만 아니고 방침에 따라 많은 사람이 피해 볼 수 있다. 

한국인은 인정이 많다지만 용서해서 안될 것을 용서하는 것은 진정한 인정이 아니다. 인정도 자신과 관계된 정해진 범주에서 효력 발생. 범주 벗어나면 냉정함 보여주는 이중적인 모습. 범주를 넓혀 갈 수 있다면 세계에서 존경받는 민족이 될 거다. 정확하게 하면서 빨리빨리 한다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라 더 좋은 것이 될 수 있다.

이케하라 마모루


저자인 이케하라 마모루는 1935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1958년 와세다 대학 제1정치경제학부 정치과를 졸업한 후 2년 남짓 야구 담당 기자로 활동했다. 그 후 한일회담 당시 한일협력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안도 가쿠 중의원의 보좌관으로 정계에 입문해 한동안 활동했다. 1963년부터 중의원 선거에 3번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72년 한국에 건너와 26년 동안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두 나라의 경제 협력에 힘쓰고 있다. 각계각층의 한국인들과 폭넓은 친분 관계를 유지해온 덕분에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을 잘 아는 일본인으로 통한다. 현재 오사카 라센 관공업의 고문으로 국내에서 활동하면서 일본의 쓰레기 소각로 관련 기술과 자본을 한국으로 유치하는 일에 적극 관여하고 있다. 일종의 로비스트라고 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그는 한국의 환경문제를 개선하는 데 여생을 바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에필로그

[내가 이 책을 쓴 진짜 이유]


얼마 전까지 나는 1년에 150회 이상 골프를 쳤다. 거의 이틀에 한 번 꼴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한국 골프장 회원권이 없다. 회원권도 없이 이틀에 한 번씩 골프를 친다고 하면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웃기는 일이지만 회원권을 몇 개씩이나 가진 일본 기업체의 한국 주재원들이 나한테 골프장 부킹을 부탁할 정도다. 일본 사람뿐만 아니라 내로라하는 한국의 기업체 임원들도 주말이나 연휴 때처럼 골프장이 붐벼서 부킹이 잘 되지 않을 때에는 어김없이 나한테 부탁을 해 온다. 왜냐하면 골프장 사장들과 친한 터라 내가 부탁하면 어지간해서는 거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워낙 골프를 좋아해서 자주 치다 보니 아마추어 치고는 제법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실력을 갖추게 되어 골프장 직원들 눈에 띄었는지 모르겠다. 또 내가 외국인이라는 사실도 특별 대우를 받는 이유인 것 같다.

나는 또 한국의 연예인, 특히 영화배우를 많이 알고 지낸다. 물론 지금은 나이 들어 '원로' 취급을 받고 활동이 뜸한 친구들이지만,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배우들하고 친하게 어울린다. 덕분에 영화인들의 연말 송년회나 대종상 시상식 같은 중요한 행사에도 초대받아 참석한다.

연예계 말고 경찰 등 정보 계통에도 친구가 많다. 그 때문에 난처한 부탁을 받는 적도 있다. 교통사고를 일으켰으니 해결해 달라며 전화를 걸어오는 것이다. 다른 부탁이라면 몰라도 이것만은 절대로 들어주지 않는다. 들어 주려야 들어줄 수가 없다. 아무리 다급한 상황이라 해도 일본 사람인 내가 교통사고 낸 친구를 돕는답시고 경찰서에 전화하면, 부탁할 데가 그렇게 없어서 일본 사람한테 부탁했냐며 오히려 내 친구를 우습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좋아하는 골프도 실컷 치고, 유명하고 능력 있는 친구도 많고... 내가 한국에서 분에 넘치는 호강을 누리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것이 내가 한국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히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내 아버지는 운명하기 직전 “부산에 가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 딱히 유언이라기보다는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혼자말처럼, 신음처럼 중얼거린 말씀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말씀이 내 가슴에 와 닿았다. 도대체 부산에 뭐가 있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일본 중의원의 안도 가쿠 의원의 비서로 들어갔다. 그분은 한일회담 당시 한일협력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는데 이때부터 한국과 나의 인연이 시작된 셈이다. 당시 한국을 몇 차례 오가기는 했지만 그때까지도 부산에는 못 가 보았다.

비서관 생활을 하다가 나는 정치계에 뛰어들기로 마음먹고 1963년부터 세 번이나 중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번번이 떨어지고 말았다. 딱세 번 떨어지고 나서 내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고 깨끗이 미련을 접어버렸다.

그 무렵 문득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가 남긴 말씀과 함께. 그래서 아무 생각도 계획도 없이 무작정 한국에 와서 부산으로 갔다. 아버지가 졸업한 부산상고 교정에도 가 보았다. 거기에 아버지의 흔적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그때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무언가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후 지금까지 나는 일본의 자금과 기술을 들여와 한국의 기간산업을 일으키는 일에 관련을 맺어 오고 있다.

한국에서 내 직업은 '로비스트'라고 할 수 있다. 요즈음에는 특히 한국의 지방자치단체에서 일본의 쓰레기 소각장 기술과 자본을 도입할 때 양쪽 입장을 조율하는 일을 많이 한다.

흔히 '로비스트’ 하면 뒷돈, 리베이트, 부정, 뇌물 따위의 부정적인 측면을 떠올린다. 많은 사람이 내가 한국에서 로비스트로 활동하면서 적지 않은 돈을 벌 거라고 짐작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한국땅에 붙어 있을 이유가 있겠는가 하면서.

한국 사람의 부탁을 받고 일본을 비롯한 전 세계를 오가며 일을 추진할 때 필요한 경비는 물론 부탁한 사람에게서 받아 쓴다. 나는 비행기를 탈 때 가급적 1등석을 이용한다. 밥을 먹을 때에도 고급 음식점을 즐겨 찾는다. 차라리 굶으면 굶었지 대충 배를 채우지는 않겠다는 것이 내 신념이다. 이틀 정도 굶는 일은 나한테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다 보니 경비로 받아 쓰는 돈이 많아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한국 사람에게서 부탁을 받아 일해 준 대가로 돈을 받아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아니, 딱 한 번 있다. 이 책을 쓰기로 하면서 출판사에서 받은 계약금, 그것이 내가 26년 동안 한국에서 어떤 일을 한 대가로 받은 돈의 전부다.

<KBS 일요 스페셜> 취재 팀이 나를 밀착 취재한 끝에 '나밖에 모르는 한국인'이라는 제목으로 방송이 나간 뒤였다. 방송국에서 취재에 협조해 준 대가로 사례를 하겠다며 은행 계좌번호를 가르쳐 달라는 연락이 왔다. 얼마냐고 했더니 10만 원을 주겠다는 것이다. 나는 그럴 필요 없다고, 오히려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해 주었으니 내가 사례를 해야 할 판이라고 극구 사양했다. 하지만 방송국에서는 규정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돈을 꼭 주어야 한다고 난처해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정 그렇다면 돈을 보내세요. 대신 그 10만 원에다 내가 지금 수중에 가지고 있는 20만 원을 보태서 30만 원을 도로 보낼 테니까 고아원이든 양로원이든 꼭 필요한 곳에 기부해 주세요."

10만 원이라는 액수가 적어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니다. 세상에는 내가 수고해서 어떤 일을 했을 때 대가를 받아야 할 일이 있고 받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 나흘씩이나 취재를 당한 것이 나로서는 여간 수고스러운 일이 아니었지만 내 돈을 써서라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공중파 방송에서, 그것도 일요일 황금 시간대에 내보내 주었으니 사례를 받아야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뿐이다.

이런 이야기까지 해도 내가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붙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의구심을 풀지 않는다. 그래서 가끔 이렇게 묻는다.

"대단히 죄송하지만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물어보아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물어보아도 된다. 대답할 수 있으니까. 내가 가진 재산은 제로다. 지금 살고 있는 성남시 아파트의 전세 보증금도 엄밀히 말하면 내 돈이 아니다. 그 돈이 누구 것인지까지 밝힐 계제는 아니지만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재산을 굳이 따지자면 몇 년 전에 한국을 아주 떠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본에 마련해 둔 전셋집 한 칸, 그 집의 보증금이 내 재산의 전부다.

글쎄, 이런 이야기까지 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돈이라는 걸 쟁여 놓고 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돈이 있다고 무덤까지 가지고 갈 것도 아니고, 유산을 물려줄 사람도 없다. 일본인 전처와의 사이에 자식이 있기는 하지만 유산을 물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내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독실한 불교 신자던 아버지는 살아생전에 기회 있을 때마다 장남인 나한테 유산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에게 아무런 불만이 없었고 지금까지도 마찬가지다. 물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재산을 전부 자선 단체에 기부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조금 서운한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어차피 아버지 돈은 아버지 돈이니까 내가 서운한 감정을 느낀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하나도 없었다.

어떤 사람은 노후에 대비해서 조금은 비축해 두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충고 아닌 충고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한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다. 내 나이 예순넷, 이미 살아야 할 나이가 훨씬 지났다. 새삼스럽게 노후니 뭐니 이야기하는 것이 우습다.

내가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신문 기자 생활에 한창 재미를 붙이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왔다. 당신이 내년에 세상을 떠날 테니까 집으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특별히 아픈 데도 없고 정정하기만 한 아버지가 내년에 돌아가신다니, 나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더욱이 프로 야구 담당 기자로 활동하며 매일같이 일류 스타들과 어울려 지내던 나는 그 생활을 포기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을 끝내 뿌리칠 수 없어 신문사에 사표를 던지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그로부터 석 달 후 아버지는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났다. 향년 60세였다.

그날 나는 한 가지 결심을 했다. 내 할아버지는 59세에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60세에 돌아가셨다. 그렇다면 나는 61세에 죽는다. 아니, 61세에 죽어야 한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소리지만, 그 후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나는 예순 하나가 정해진 내 수명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50대 후반부터는 몇 되지 않는 내 인생의 인연을 하나하나 정리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러나 예순 하나를 넘기고 예순두 번째 생일을 맞이하게 된 순간 나는 크게 실망했다. 그리고 당혹스러웠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아버지도 가셨는데 왜 나는 가지 못하는 걸까.

그런데 그때부터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사실을 처음 깨달은 것은 골프장에서였다. 힘찬 드라이브 샷을 날릴 때의 짜릿한 쾌감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공이 떨어졌을 거라고 생각한 곳에 가서 아무리 찾아봐도 공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헤맨 끝에 전혀 엉뚱한 곳에서 내가 친 공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뭐 그럴 수도 있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번번이 내가 의도한 곳으로 공이 날아가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평소 핸디 3으로 공인받던 골프 실력이었는데, 규정 타수에서 무려 20타 가까이 더 쳐야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아무래도 시력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서 안경을 맞추러 갔다. 시력검사를 하던 안경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한쪽 눈이 안 보이는 것 아닙니까?"

그제야 나는 깜짝 놀라서 안과를 찾아갔다. 검사 결과 왼쪽 눈이 실명 직전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백내장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요즈음에는 의학이 발달해서 백내장 정도는 얼마든지 치료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일본에 있는 유명한 안과를 찾아가 레이저 수술까지 받았는데도 백내장 중에서도 특별한 경우여서 근본적인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까짓것 어차피 눈은 두 개니까 한쪽 눈이 안 보인다 한들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사는 나머지 한쪽 눈도 언제 나빠질지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어쨌거나 아직까지 오른쪽 눈은 멀쩡하니 다행이다.

눈이 말썽을 일으킨 뒤부터 팔, 다리, 어깨, 허리…… 내 몸 어느 한구석 아프지 않은 데가 없었다. 몇 달 사이에 20킬로그램 가까이 체중이 빠지고 한밤중에 잠을 깰 정도로 통증이 심한데도 정작 검사를 받아보면 의사들은 하나같이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말했다.

"아니, 나는 아파서 죽을 지경인데 이상이 없다고 하면 어떡합니까?" “몇십 년 동안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도 많은데 그 정도 아픈 것 가지고 뭘 그러세요?”

최첨단 의료 시설을 갖춘 병원의 내로라하는 의사들과 그런 실랑이를 벌이는 것도 지칠 무렵이었다. 누군가 서양 의학으로 치료되지 않는 병을 동양 의학으로 고칠 수도 있다고 충고했다. 그때부터 중국, 일본, 한국에서 용하다는 기공사, 한의사, 물리치료사 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확실히 동양 의학이 서양 의학보다 효과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그 사람들을 찾아가 치료를 받으면 그 순간만은 통증을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뿐으로 또다시 통증에 시달려야 했다.

내가 여기저기 아프다고 했더니 친구들이 저마다 몸에 좋다는 보약을 지어서 찾아왔다. 성의를 무시할 수도 없는 데다 정말로 효과가 있을지 모른다는 한 가닥 기대를 품고 나는 그 약을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그랬더니 이제는 당뇨가 생겨서 음식도 마음대로 먹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결국 지금은 포기하고 아프면 아픈 대로 참고 산다.

나는 아파트 10층에 산다. 매일 저녁 불 꺼진 아파트를 찾아 들어가면서, 한밤중에 온몸을 파고드는 고통을 참지 못해 벌떡벌떡 몸을 일으키면서 저 베란다 문으로 곧장 걸어 나가면 한순간에 모든 것이 끝난다는 생각을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내가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이 책을 쓰는 것은 나름대로 계산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한국 사람들이 귀에 거슬리는 소리 좀 듣는다고 설마 나를 때려죽이기야 하겠나 하는 생각,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로 누군가에게 맞아 죽기라도 하면 차라리 좋겠다는 생각…….

이 책을 썼다는 이유로 불상사를 당한다면 어느 정도는 그런 사실이 세상에 알려질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한국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한 번 더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면 나에게는 어떤 미련도 후회도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시사 월간지에 내 기사가 실리고 난 뒤 집으로 날아온 편지 하나가 내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해 주었다. 현역 육군 장성이 보내온 편지를 여기에 소개하면서 그분께 고마운 마음을 함께 전한다.


안녕하십니까?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썼다는 선생의 글 <나라는 무법천지, 국민은 염치가 없다>를 잘 읽었습니다.

'일본은 망할 수 없는 나라'고 '한국은 내일이 없는 사회'라고 꼬집은 대목에서는 분노를, '예의와 염치를 모르고 교통 법규를 지키지 않는 민족'에서는 수치를, '자녀 교육을 잘 못하고 위선과 명분에 집착하고 있는 지식인들'에서는 책임을 통감하였고, 마지막 '21세기를 앞둔 한국인에 대한 충고'에서는 당신의 우정을 느꼈습니다.

저는 52세의 직업군인입니다.

선생께 이 글을 보내는 까닭은 저에게 자신과 주변을 돌이켜보는 반성의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고, 선생께는 죽을 각오까지 해야 할 만큼 한국 친구들이 몰상식하지 않다는 점을 알려 주기 위해서입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인에 대한 선생의 용기 있는 우정에 격려를 보내며, 건강을 기원합니다.


저자 인터뷰 기사.  https://news.joins.com/article/3744704

외국인이 본 한국인 관련 책들 소개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2001090103172132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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