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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아 Feb 15. 2016

그 기억에는 소리가 없다.

그걸 물려주고 싶지 않을 뿐이다.


엄마가 목걸이 열쇠를 처음 걸어준 건 내가 여덟 살 때였다.


무지개색의 예쁜 줄에 금빛 집 열쇠가 달랑 매달린 목걸이. 그 때까지 대문을 직접 열어본 일이 거의 없었던 나는 그 목걸이가 마냥 뿌듯했다. 여덟 살짜리에게 갑자기 집 열쇠가 주어졌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그 때는 짐작도 못 했다.


엄마는 그 무렵 보험회사에 취직했다. 아니 취직해야 했다.(당시 어른들의 표현에 의하면) 아빠가 사고를 친 탓이라고 했다.

급격하게 생활이 어려워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아빠의 퇴근시간이 조금 더 늦어졌고 엄마의 한숨이 잦아졌으며, 나는 혼자 혹은 동생과 둘이 오후를 보내는 일에 익숙해졌다. 목걸이 열쇠를 건 뿌듯함은 일주일도 못 가 사그라졌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상보에 덮인 밥상이 있었다. 혼자 가만히 앉아 밥알을 우물거리는 일이 못 견디게 지루하다는 걸 그 때 처음 알았다. 우울하지는 않았다. 어려서 뭘 몰랐던 탓도 있지만, 산만하고 장난 심했던 나와 동생은 우리 둘만 있다는 점에 딱히 설움을 느낄 새가 없었다. 둘이 싸우고 굴러다니며 놀다 보면 시간은 금방 흘렀다.


다만 지금 생각하면, 그 때의 기억에는 소리가 없다. 뭘 하고 놀았는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시절을 떠올리면 흑백 무성영화 같은 느낌으로 장면 장면만 스쳐지나갈 뿐 그 때 떠들었던 말도 불렀던 노래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둘만 있는 집이 유독 조용해서 그렇게 기억하게 된 것인지, 철없는 마음에도 어렴풋이 느꼈던 결핍이 그런 식으로 각인된 것인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빠는 나라보다 조금 일찍 사고를 친 것 뿐이었다. 2년이 지나 내가 초등학교 3학년에 올라갔을 즈음, IMF라는 말이 뉴스에 부쩍 자주 나오기 시작하면서 목걸이 열쇠를 걸고 다니는 아이는 우리 반의 절반 이상으로 늘어났다.


그 무렵 전학생도 늘었다. 그 때 나는 인천에 살았다. 서울 옆에 붙은 인천은 빚에 밀려난 사람들의 정류장 같은 도시였다. 서울에서 온 아이가 가장 많았고, 어느 날 말없이 지방으로 전학간 친구도 있었다. 반대로 지방에서 올라와 한 학기도 채우기 전에 다른 동네로 다시 이사가는 아이도 있었다.


5학년이 되면 부여로 가던 2박 3일짜리 수학여행은 우리가 5학년이 되던 때부터 1박 2일짜리 수련회로 변했다. 그마저 안 가는 애들도 적지 않았다. 내가 다니던 동네 속셈학원은 1년 새 학생이 절반으로 줄었다.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도, 갈 곳도 없어진 아이들은 수업이 끝나면 300원짜리 컵떡볶이를 들고 킬킬대며 해가 지도록 떼지어 몰려다녔다. 


누구도 자기 집이 가난하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전부 가난해지고 있다는 걸. 웃고 떠들고 싸우며 겉으로는 아무 문제 없는 학교 생활을 하면서도, 우리는 그렇게 궁핍에 익숙해져갔다. 


그 때로부터 15년도 넘는 시간이 흐른 지금, 그 때의 친구들과 만나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하면 어느 입에서나 비슷비슷한 사연이 흘러나온다. 과정도 똑같다. 엄마가 갑자기 일을 나가고 집이 줄어들고 아빠의 짜증이 늘고 집에서 큰소리가 나고. 어린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토막난 기억들이 이제야 얼추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된다. 


그 때의 부모들과 비슷한 나이에 이른 우리는 그 이야기들을 맞춰 보며 이제서야 그들의 심정을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겪어낸 고생에 대한 새삼스러운 감탄의 말이 오가고...그럼에도 다음 순간 나오는 말은 언제나 똑같다.


"야..나는 애는 못 낳겠다. 씨발."


부모를 원망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 때를 아이로 살았기 때문이다. 다 함께 어려워졌기 때문에 위화감이나 비참함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궁핍은 우리 모두를 어딘가 한 군데씩 부숴놓았다. 내게는 소리 없는 기억이 있고, 어떤 친구는 그 때가 아예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 아직도 전화벨 소리가 무서워 휴대폰을 무음으로 해 두고 사는 건 나를 포함해 여러 명이다. 


가난에 딸려오는 것들이 아이의 인생에 어떻게 각인되는지를 잘 알기 때문에 우리는 섣불리 아이를 낳겠다는 결심을 할 수가 없다. 세상이 별다르게 나아지지 않은 것처럼, 지금의 우리도 그 때의 부모와 크게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기에.


모르겠다. 언젠가 나이가 조금 더 들면,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에 대해 또 다른 확신이 들면 누군가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러고 싶지 않다. 그럴 자신이 없다고 하는 게 맞겠다. 대단한 철학이 있어서도 아니고 거창한 반항심이 들어 그런 것도 아니다. 


그냥, 목걸이 열쇠와 상보 덮인 밥상과 소리가 제거된 기억과 잃어버린 친구들...그런 걸 물려주고 싶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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