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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아 Jan 06. 2020

00. 이걸 왜 이제야 쓰냐고 물으신다면

첫째 이유는 게으름이요 둘째는,



여행기를 써 본 적이 없다. 숙소에서 흥청망청 맥주캔을 까며 손 가는대로 끄적여 둔 일기는 약간 있지만 그건 여행의 기록이라기보다 그냥 타지에서 쓴 글자 덩어리에 가깝고, 여행지에서 있었던 일들을 머릿속에서 문자로 출력해내 적어 두는 일은 여행 중에도 후에도 시도조차 해 보지 않았다.


자발적으로 진득하게 앉아 사진과 글을 보기 좋게 정리할 만큼 아기자기한 성격이 되지 못하기도 하고, 노는 일에 한해서는 쓸데없을 정도로 좋은 기억력 덕에 별다른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탓도 있었다. 아직도 내 머릿속에는 여러 여행에서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이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고, 누가 툭 치면 그 날의 이야기를 어제 일처럼 쏟아낼 수 있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얼마 전부터 오래된 여행을 차근차근 정리해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꿈처럼 둥둥 떠다니는 기억들을 눈에 보이는 실체로 만들어 다시 읽어보면 그 때의 감정들이 조금 더 선명해질 것 같았다.


어느 시점부터였는지는 딱히 떠올리기 어렵다. 남의 재미있는 여행기를 읽고 난 다음에도 그랬고, 동기들을 만날 때마다 꺼내 떠들던 물 빠진 껌 같은 대학 새내기 시절의 이야기가 살짝 가물가물해졌을 때도 그랬고, 사무실에서 남은 연차를 세어 보고 있을 때도 그랬고, 문득 예전에 보았던 풍경들이 떠오르고 그리워질 때도 그랬다.


그 변덕이 무르익어 마침내 돈 드는 것도 아니고 밑져야 본전인데 천천히 하나씩 써볼까, 하는 마음으로 뭉쳐졌지만 그 시점부터 이걸 쓰기까지도 또 적지 않은 시간이 들었다. 내가 이렇다.


마침 안 하던 짓의 제철인 1월이 돌아왔기에 그 기운으로, 그리고 대단히 충동적으로 우선 뚜껑 격인 이 글을 쓴다. 유일한 재료는 내 머릿 속의 기억과 휴대폰으로 찍어 둔 저화질 사진 몇 장이 다라서 글이 실제보다 너무 뽀얗게 미화되면 어떡하지, 살짝 걱정했지만 그건 그것대로 재미있을 것 같다. 가이드북 쓰는 것도 아니고, 발효돼야 제 맛이 나는 것도 있으니까. 괜...괜찮지 않을까?


언제까지 쓸지도 모르고 얼마나 쓸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시작해 본다. 처음부터 으어어 대단한 것을 쓰겠다! 하는 마음을 먹고 시작하면 분명히 이것이 마지막이 될 것이므로 일단은 작고 가볍게, 힘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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