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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Joo Lee Nov 07. 2016

문제들의 문제들의 문제들의 문제

떠돌이 홈리스처럼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차갑고 혼란스럽고 어지러웠다. 추웠다가 따뜻해졌다가 오락가락하는 가을날씨 덕에 도톰한 바람막이 집업을 입었는데 역시 해가 지고나니 그거 하나로는 부족했다. 옷마저 초라하기 그지 없달까.

개인전을 열고 만나게 되는 반가운 얼굴들은 하나 같이 나에게 아기낳고 이렇게 금방 정말 대단하다, 역시 너는 부지런하다, 하는 것 자체가 박수 받아야 할 일 등등 따뜻한 말들을 분에 넘치게 안겨줬다. 아, 물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약속되어 있던 전시였고 준비를 많이 못했지만 -준비를 잘 했다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했다- 전시를 갑작스럽게 안하는 것보다 어떻게든 약속을 지키서 하는 게 조금 더 나을 꺼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나는 결국 전시를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이 모양으로 전시를 하고 나니 왜 내가 이런 돈을 쓰면서 전시를 하는 선택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물감과 캔버스 등을 사고 부산에서 그림들을 가져오는 운송비와 새로 맞춘 액자 비용 그 외에 사람들을 대접하거나 하는 등 조금씩 새어나가는 부대비용. 더욱이 갤러리도 마찬가지다, 자기들도 내 전시를 초대해주면서 쓰게 되는 비용들이 분명 있을텐데 말이다. 쓰고보니 더욱더 의구심이 드네, 우리는 왜 이러고 있을까.

그림을 그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내가 감수해야 하는 일들은 정말 끝없이 펼쳐진다.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렇지 라며 슬며시 반박을 하던 사람들도 돈 애기를 하면 대부분 더이상 토를 달지 않고 입을 다문다. 그만큼 그림으로 돈을 벌기도 어렵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쓰는 돈은 많다. 그림 한 점을 그리기 위해서 얼마나 번거로운 일들을 해야 하는지 보통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조금 화가 난 듯 하다) 아이고, 그렇다고 이 어려운 일을 알아달라는 말은 아니고, 다만 예술이라는 장르적 특성 때문에 온갖 잡다한 비평을 모두 모두 듣고 웃음도 지어주고 적당히 말도 받아줘야 하는데 그런 상황에서 위에 언급된 것과 비스무리한 섭섭한 이야기들을 많게 듣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내 작업의 의미를 어디에 둘 것이냐의 문제로 한동안 깊은 고민을 하였다. 부러 고민을 하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고 새로 발표하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저절로 문제들에 당면하게 된다. 물론 조금? 아니 꽤 많이? 오락가락한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지만, 나는 항상 내 논리를 세우고 부수고 다시 세우는 내 태도를 사랑하기로 마음 먹었다. 사회참여적인 작가정신은 어느 정도까지 넣어야 하는지, 언제나 이미지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나 라는 작가에 대한 평이 달라졌다. 예를 들어 수 년전에 나는 철거지역 시리즈를 그렸다. 그 장면은 은평구 뉴타운이 처음 시작될 때 그 동네가 허물어지기 시작하였고 나는 그때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으며 너무나 강렬한 그 모습에 심각한 충격을 받고 수차례 사진을 찍으러 그 곳을 갔기 때문이었다. 그 철거지역을 찍은 시기는 내가 이십대 중반을 갓 넘겼을 때였고 서른이 넘어 부산에 와서야 그 이미지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 시리즈를 그리면서 내 이십대의 자화상이라 길게 설명하였고 사회적인 현상과 사적인 혹은 내적인 흐름들이 얼마나 촘촘하게 엮여 있는지 말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 시리즈 발표 후 철거지역을 그리는 작가가 되었다. 아니 그때 그 사회와 시대의 언어로 재개발 지역을 그리는 작가랄까?

더욱더 꾸준히 작업을 진행하였다면 달랐을까. 나는 사람들이 나를 구분하는 방식에 매우 금방 질리고 지쳐버렸다. 그래서 그 다음으로는 부산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봄에 부산은 벚꽃이 만개하여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벚꽃을 그렸더니 이제는 꽃 그리는 작가란다. 다음에는 부산의 낡은 구도심 풍경을 그렸더니 다시 철거지역, 아니 재개발지역을 그리는 작가가 되어 있었다. 우리 삶의, 우리 시간의, 우리 기억의 다양한 층들은 모두 어디로 가게 될까. 그 소외 받는 것들은 다 어디로 분리수거 되어 사라지게 될까. 예술은 이 모든 것들을 끌어안을 유일한 대안이 된다고 나는 믿는다. 세상의 대부분 쓰잘데기 없어 편집되는 것들을 예술은 아름답게 남길 포용력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그래서 결국 이 모양으로 아직까지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너는 왜 그렇게 이것저것 다 그리고 있니? 그렇게 그리면 안돼 라고 말했다. 시작부터 지금까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말이다.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진심으로.

이 이외에도 내 작업관과 그 간의 경험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길고 길게 펼쳐진다. 여기서 부터 시작해서 지금 현재까지 오려면 사흘 밤낮을 세며 글을 써도 모자랄 판이다. 우리 아기가 잠에서 깨어나 이제부터 놀아주고 우유도 먹여야 한다. 아쉽지만 다음에 다시 이어 쓰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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