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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Joo Lee Nov 18. 2016

정체성에 대한 웃긴 이야기

고개를 들어보니 한강을 지나고 있었다. 언제나 한강을 지나는 짧은 순간은 무언가 내 주변의 공기가 달라지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한강을 잊을 수 없다.

전시가 시작되었고 아무도 오지 않는 곳이지만 어서 빨리 가서 문을 열어야 했다. 아주 혹시나 누군가가 무심히 스칠지도 모를 일이기에. 이런 상황이 바로 작가로서 나의 현실이고 내 소중한 그림들의 위치였다. 분명 화도 나고 괜시리 슬프기도 했지만 <하리>와 3일을 쉬고 나니 내적 동요는 많이 진정되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보니 모든 건 다 내 잘못이었다, 준비되지 못한 작가는 이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무슨 대접받자고 작업하는 건 결코 아니지만.

뜬금없이 어떤 기억이 떠오른다.

우리나라에는 미술 잡지가 몇 개 있는데 대부분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 폐간되는 일들이 많았다. 아무래도 사람들의 패턴이 많이 변하고 있기에 그렇지 않을까, 그러나 이 와중에 미술인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오래된 잡지가 여전히 발행되고 있는데 잡지사의 사정으로 여러 부침은 많았던 걸로 알고 있다. 시스템이 바뀌고 사람들도 바뀌고 위상도 달라지고... 매달 발행되고 있기는 하지만 확실히 예전만은 못했다. 몇년 전에 이 잡지사에서 연간기획으로 잘나가는 젊은 작가들을 몇 명 뽑아서 소개한 적이 있었다. 우습게도 나는 영문도 모른채 내 주변의 선생님들의 추천으로 이 대단한 그룹에 들게 되었는데 이 기사를 담당하는 기자조차도 나의 존재를 영 못마땅하게 보는게 내 눈에도 보일 지경이었다. 이 기자는 나중에 편집장이 된다. 단 한 컷의 사진과 5분짜리 인터뷰(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호구조사) 를 위해 나는 부산에서 비싼 기차를 타고 인사동으로 갔으며, 다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하루만에. 그 달에 잡지가 나오고 나는 잡지사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내가 잡지에 나온 것을 축하한다며 잡지를 구독하라는 내용이었다. 얼떨결에 일년치 잡지를 구독하였고 그 다음해 같은 시기에 또 구독하라며 전화가 왔었다. 사실 잡지를 보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고 나에게는 너무나 짐이 되었기에 구독할 마음이 전혀 없었지만 왠지 거절을 하기가 어려워 이런저런 변명으로 구독을 좀 미루게 되었다. 이 애매한 태도가 잘못되었던 것일까, 그 뒤부터 잊을 만하면 잡지사로부터 독촉 전화를 받게 되었는데 결국 몇 개월 뒤에 또 구독을 하게 되었다. 정말 뜯지도 않았고, 당연히 읽지도 않은 잡지만 쌓여갔다. 다시 일년이 끝났을 때 역시나 구독하라는 전화가 왔고 나는 고민하다 종이책은 잘 안보게 된다며 전자책으로 구독을 하던지 좀 생각해보겠다고 용감하게 말을 했다. 하지만 전화는 그 뒤로 몇번 더 왔고 안받으면 또 하고 또 하였다. 마침내 그 지독한 잡지사 영업담당자에게 전화 좀 그만해달라고 말을 하니 자기가 되려 엄청 화를 내면서 이 번호 지우겠다고 쏘아붙이고 전화를 끊더라. 사실 어느 시점부터 그 잡지는 연간기획이 아니라 매달 젊은 작가들을 수두룩하게 소개하던데 나는 그들을 볼 때마다 구독자일까 아닐까 하는 의문만 떠올랐다. 나와 같이 그런 독촉 전화를 받을까? 청년작가의 활동은 대체로 이런 식이다. 미술계에서 재수없기로 꽤 유명한 젊은 비평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재능없는 청년작가들 말이다. 이미 판가름이 났으니 작품 그만두고 행복하게 살라며 이런 속도의 시대에 젊어서 주목받지 못하면 앞으로도 소용이 없다나 뭐래나. 그런 우리들은 말뿐인 작가 지위로 차라리 미술계의 소비자에 가깝다. 아니 소비자일 뿐이었다. 분명히 나는 생산하고 있는데 그걸 몰랐던 사람은 나뿐만이었을까.

재능도 별로 없는데 심지어 소비까지 하지 못하는 내가 문제겠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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