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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먼지잼 Jul 13. 2023

100% 확률의 비

2023-07-13

비가 오는 날은 글을 써보자.


어떤 의도나 목적, 감상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글을 써야지, 써야지만 하는 나에게 동기부여를 하기 위함이었다. 비오는 날 느낀 걸 그냥 아무 생각없이 쌓아올리다보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아지겠지, 라는 안일한 결단.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다가 장마철이 되었다.


장마는 아니잖아, 장마는...


그렇게 변명을 하며, 장마가 지나가고 난 뒤에 글을 쓰려고 했다.

이 장마가 지난 뒤에 어떤 날은, 우연찮게 내가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가득할 때, 우연찮게 때마침 비가 내려서 글을 쓰게 되는 운명같은 영감의 순간에 기대보려고 했다.


하고 싶은 말이 없었던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반대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늘 넘쳐 흘렀다.

다만 글로 남길 용기가 없었다. 이 감정들을 글로 다 토해내고 난 뒤에, 이 글을 다시 읽을 자신이 없었다.

내 마음은 폭풍우 치는 바다 한 가운데 떠있는 부표와 같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울렁, 출렁 도무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정리가 안된 글을 쓰는 나도 괴로운데, 이 글을 누가 읽어 주겠어.

이제는 그만 읽히는 글을 쓰고 싶었다. 


그리고 그 욕심이, 글을 쓰고 싶은 내 마음을 돌덩이처럼 무겁게 짓눌렀다.

닻을 내린 욕심이 나를 항구에 정박시켰고, 더이상 무모한 바다에 뛰어드는 일을 시도조차 하지 못하게 했다. 바다는 여전히 출렁였고, 반짝였고, 불완전이 쌓아올린 숱한 가능성으로 이리저리 일렁였다. 

나는 그런 바다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항구를 떠난 배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들의 목적지가 어딜까, 그곳은 여기보다 나을까 이리저리 재보면서. 생각이 많아지는 동안 나의 모험심은 비례하여 점점 줄어들었다. 이제는 무얼 써야 할지, 아니 내가 쓰는 걸 좋아하기나 했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신기하게도 쓰지 않는 동안 읽는 일도 줄어들었다. 도무지 책을 읽고 싶지가 않았다. 읽어야 할 책들을 사들이고, 쌓아두고, 글을 쓰지 않고 버티는 것처럼 책들을 노려보기만 했다. 어떤 날은 홀린 듯이 책 하나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운 뒤, 글을 쓰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 시달렸다. 그런 날은 SNS에 사진 한 장과 짧은 소회를 남기며 욕망의 불길을 불완전연소시켰다. 가슴 속에 욕구불만의 찌꺼기만 지독하게 쌓여, 독소를 내뿜었다. 그것은 스트레스가 되어 폭식을 불렀고, 둔해진 몸이 악순환의 모양새로 굴러대더니 뾰족한 마음과 달리 땡글땡글한 얼굴을 만들어주었다.


오늘은 비가 왔다.

아니, 전국이 호우주의보라고 했다. 

회사 사람은 강남 일대가 잠길까봐 걱정이라며, 조기 퇴근을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회사에서도 무료함에 시달렸다. 비가 와서 착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나만 집중할 일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부유했다. 점심으로 싸온 천도복숭아와 키위, 그리고 건강 스무디를 들이켜놓고는 오후에 간식으로 컵라면과 시리얼을 한 사발했다. 입이 달다. 배가 불러왔다. 중력을 이길 마음이 없는 눈꺼풀과 턱이 자꾸만 위 아래로 끄닥거렸다. 아 그래, 이참에 밀린 글이나 쓰자. 그리고 쓰고 있는 것이 지금 이 글이다. 마침 비가 오기도 하고, 잘 됐네 뭐! 근데 뭐부터 써야 하나.


읽어주지 않아도, 주목받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말은 내 오랜 거짓말이다.

나는 누군가 읽어주는 책이 되고 싶다. 이제는 그런 욕망을 숨기기도 지쳤다.


오늘 일기예보에 100% 확률의 비 모양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내가 오늘 글을 쓸 확률도 100%였을 것이다. 오늘은 내가 그렇게나 갈망했던 그런 날이었던 것이다. 우연찮게 내가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가득할 때, 우연찮게 때마침 비가 내려서 글을 쓰게 되는 운명같은 영감의 순간! 100% 확률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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