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를 마치고 귀국한 캄보디아 코이카 36기 선배 단원 중 친하게 지내던 혜정 언니가 한국대학사회봉사협의회(이하 대사협) 인턴으로 캄보디아에 다시 돌아왔다. 볼일이 있어 프놈펜에 올라가면 종종 만나곤 했다. 하루 종일 뜨거운 태양아래 달구어진 몸을 식혀줄 시원한 맥주와 함께 저녁을 먹던 어느 날이었다.
“우리 애들 오면 현지 적응 교육할 때 강의 하나 해줄래?”
“그래~.”
함께 밥을 먹던 어느 날, 언니가 지나가는 말로 가볍게 제안했다. 술기운 때문이었나? 평소라면 절대 하겠다고 했을 리가 없는데, 뭐에 씌였던 건지 아무 생각 없이 승낙해 버렸다. 그렇게 나는 대사협 중기 봉사단 현지 적응 교육 일정 중 건강관리에 관한 강의를 맡게 되었다.
내가 왜 덥석 하겠다고 그랬을까? 도와주겠다고 나섰다가 오히려 민폐만 끼치는 거 아닐까? 막상 강의 주제와 내용 등 세부 사항들을 의논하다 보니 부담감이 점점 커졌다.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오가고, 후회에 후회를 거듭했다. 이왕 하는 거 도와주고 욕먹지 말자! 생각하며 몇 날 며칠을 머리 싸매고 고심했다. 강의 전날까지 밤을 지새워 준비해 갔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이 강의는 내게 중대한 사건이었다. 학창 시절부터 발표란 내게 앉아서 듣는 것이었다. 그런 내가! 사람들 앞에 서면 벌벌 떨며 말 한마디 못 했던 내가! 코이카 봉사단에 합격 후 국내 교육 받을 때도 강사가 갑작스레 내민 마이크에 온몸을 쪼그리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해 동기들한테 임기 내내 놀림을 받았던 내가!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 강의라니!!! 처음 캄보디아 초등학생들 앞에 섰을 때도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식은땀으로 온몸을 적시며 수업했었다. 코이카 사무소 강의실에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 그리고 수업과 강의라는 단어들이 주는 어감 차이. 아이들을 가르칠 때랑은 느낌이 사뭇 달랐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게 내 인생 첫 강의는 후딱 지나가 버렸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피로가 쓰나미로 몰려왔다. 그보다 더 크게 지나간 한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이 밀려들었다. 그런 나를 위로 해줄 메시지를 받았다.혜정 언니였다.
“애들이 오늘 강의 너무 좋았대. 그 내용을 다른 국가에도 공유해주면 좋겠다고 하더라!”
그리고 내가 만든 자료가 계속해서 쓰일 것 같다고도 전해줬다. 정말 기뻤다. 내 안에 있던 모든 피로가 말끔히 제거된듯했다. 뿌듯했고 또 뿌듯했다. 아무런 경험도 없는 내게 선뜻 이런 제안을 해준 언니한테 참 고마웠다. 적절한 타이밍에 힘이 되는 메시지를 보내준 것도 정말 고마웠다. 역시 난 인복이 많다! 잘했건 못했건 간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았다는 것 자체가 내겐 놀랄만한 변화였다.
대학생들의 파릇파릇한 에너지와 날 바라보는 반짝이는 눈빛이 정말 좋았다. 이후로는 들어오는 강의는 마다하지 않고 다 나갔다. 발표나 강의 경험이 부족한 나를 믿어준 혜정 언니 덕분에 그날 이후로 내 인생이 180도 바뀌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