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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성프리맨 Jun 22. 2024

강약약강 - 부끄러운 기록도 기록이라면

48 걸음

갑자기 캐나다 삼촌 가게에서 일했을 때가 생각났다.


"@#$@#$@#$ 살몬?"


'또또 시작이구나 또‼️ 살몬이 아니라 새먼이라니까!'


같이 일하는 웨이트리스 누나가 하는 발음을 보며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경력도 오래됐으면서 왜 안 고치는 거야?'


이외에도 수 없이 많은 발음지적을 했다. 그래서 누나가 해야 할 일을 못했냐고? 아니. 단 한 번도 실수한 적은 없다. 그런데 왜 그렇게 발음에 꽂혀서 누나를 못 살게 굴고 싶어 졌을까?


"영어 잘하나 봐요?"


사실.. 내 발음도 엉망진창이다. 그저 몇 단어 정도 원어민 발음처럼 한다는 걸 제외하곤.


"대단한 인성이네요?"


별 거 아닌 것에도 예민하고 남한테 엄격한 걸 봐선 인성은 영~ 위에 쓴 일화만 해도 그렇다. 발음을 떠나 맡은 일을 잘 수행한다면 충분히 잘하고 있는 건데 참..




오전에 파트타이머로 일하는 대학생도 있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캐나다로 유학 왔고 그래서인지 영어만큼은 확실했다.


일에 대한 경험이 적은 것과 별개로 언어의 숙련도가 다르다 보니 그녀가 손님을 대하는 영어를 어깨너머로 지켜보면서 부럽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다.


여하튼 그녀 앞에서 영어를 할 때면 작아졌다. 오후에 일하러 오는 누나 앞에서는 그렇게 당당했으면서 반대의 상황이 되자 의식하기 시작했다. 딱히 그녀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스스로 눈치 보곤 했다.


전형적인 강약약강..




돌이켜보니 벌써 10년도 전의 일이다. 시간 참 빠르네. 물론 당시 같이 일하던 그녀들과는 따로 연락을 취하지 않는다. 카톡 친추가 되어 있긴 하다 보니 간혹 프사가 바뀔 때 그걸 통해 안부를 보는 정도다.


몇 년 전이던가. 내가 뭐라고 하던 누나도 짝을 찾아 결혼을 하셨고 프사에 웨딩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사진을 보는 순간 갑작스럽게 미안한 마음이 크게 생겼다. 철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충분히 사리분별이 가능한 나이였는데 내가 뭐라고 그렇게 못되게 굴었을까.


누나는 단 한 번도 내게 직접적인 화를 내지 않았었다. 어쩌면 삼촌 가게에서 일하는 낙하산 조카였기 때문에 아무 소리도 못하고 참았을 것이다.


언제고 아내한테는 털어놨었다. 양심은 있어서인지 누군가한테라도 털어놓고 싶었나 보다.


"너무 후회돼. 난 왜 그랬을까.."

"그러게 왜 그랬대. 아주 재수가 없었구먼."

"으응. 그렇지?"

"어. 사회에서 만났으면 아주 치를 떨었을 타입이야."

"아니.. 그래도.."

"맞아. 그 정도야. 그 정도라고!!!!"


괜히 꺼냈다. 아내의 역린을 건들기라도 한 것일까? 아내도 직장에서 받았던 상사로부터의 스트레스가 떠올랐음이 분명하다. 그래도 털어놓고 나니 조금은 홀가분해졌다.


'이래서 고해성사를 하는 거려나?'


결혼한 누나의 행복해 보이는 표정을 보며 닿지는 않겠지만 미안함과 축하를 동시에 전했다. 물론 나 편하자고 한 짓이다.


이렇게 쓰고 나니 마치 큰 죄를 저지른 것 같네. 아니다. 큰 죄가 맞다.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준다는 건 그 자체로 큰 죄가 맞지.


"그런 글 쓸 거면 나한테나 잘하라고. 나한테는 맨날 막말하면서. 남한테는 착해 보이려고 쯧!"

"아니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아내를 피해 다른 곳으로 옮겨서 다시 노트북을 켰다. 이제야 좀 조용하네.




원래 사람은 가진 거 없고 불안할 때 스트레스가 쌓인다. 누구나에게 해당되는 건 아니겠지만 내 경우가 그랬다.


내게 있어 캐나다 생활은 장단점이 확실했던 경험이다. 당시의 난 어떻게든 정착하고 싶어 했고 결과는 실패했다. 그래서였을까? 스트레스를 받는 만큼 배출할 곳이 필요했고 하필이면 주변 사람을 그중에서도 나보다 약해 보이는 사람을 타깃으로 삼은 거였다.


"그렇게 해보니 어떻게 스트레스는 사라지던가요?"


오히려 스트레스가 더 극심해졌었다. 기술은 쓰고 익힐수록 늘듯 성격도 마찬가지인 거 같다. 나쁜 의도로 못되게 굴면 굴수록 내면이 무너져 내리는 속도는 가속이 붙었다.


늘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꼬투리 잡아 스트레스 풀려하면 할수록 망가지는 건 내쪽이었다. 부정은 더 강한 부정을 불러올 뿐이었다.


이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것도 가장 바닥 치며 한국으로 돌아와 이리저리 구르다 보니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나 완전 잘못 살았었어. 이제부터라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자.'


'기회가 닿는다면 누나한테 진심으로 그때 미안했다고 전해볼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식인 거 같으니까. 그래! 이미 엎질러진 물은 담기엔 늦었어. 대신 앞으로의 삶에서는 절대로 같은 실수는 하지 말자.


그래도 어딘가에는 남겨놓고 싶었다. 부끄러운 기록도 기록이라고 어딘가에는 남겨놓고 두고두고 셀프 조리돌림이라도 해야지.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그러다 보면 나도 조금은 성숙해져 있지 않을까?'라고 40대 아저씨의 부끄러운 소회는 여기까지 써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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