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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성프리맨 Jul 13. 2024

너도 그대로네?

그냥 써 보는 이야기 12

상담사 그리고 수리원. 우리의 첫 만남은 사무적이었다.


[3번 방 PC 고장. 성훈 씨 확인 부탁해요.]

[네. 팀장님.]


'내가 컴퓨터 수리하려고 입사한 것도 아니고 진짜..'


회사 사무실 입구를 나와 건너편 건물로 이동하면 상담사들이 일하는 공간이 나타난다. 그들이 무슨 일을 하고 어떤 대우를 받는지 애초에 나와는 무관한 일이다. 가뜩이나 해야 될 일은 많은데 자꾸 허드렛일을 시켜서 짜증 나 죽겠다.


파트타이머나 외주로 돌리자고 선임이 얘기했건만 위에서는 절레절레할 뿐이다.


"야! 어디 땅 파서 돈나와? 성훈이 놀잖아. 걔가 뭐 하는 게 있어? 수리라도 시켜."


들리지라도 않게 말하던가. 나한테 직접 말하지 않았다 뿐이지 그냥 대놓고 얘기한 거랑 뭐가 다르냐. 여하튼 그렇게 된 일이다. 놀면서 돈 받는 줄 아는 윗대가리 하나 때문에 막내인 이 몸이 이렇게 굴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부모님은 아시려나.




- 띵동

- 예? 아아. 잠시만요~


뭐라고 말도 안 꺼냈는데 기다리란다. 우리 회사의 상담실 구조는 다소 독특하다. 넓은 공간을 일부러 나눠서 방처럼 만든 후 각각의 방에 상담사가 한 명씩 들어가 있다. 한 회사 직원이라고는 하나 애당초 하는 일이 명확히 나뉘어 있어서 볼일은 없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난 예외. 이곳의 PC 수리도 도맡아 한다.


"어머~ 오셨서 성훈 씨? 아유 미안해. 자꾸 불러서. 우리가 컴퓨터를 몰라서 그래. 자꾸만 안 되는 걸 어째."

"안녕하세요 팀장님."


이름은 모르겠다. 하지만 상담사 전체 관리를 하고 있는 분이라서 팀장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거 하나 마셔~ 덥지? 오느라 고생했네."


크게 반갑지도 않은데 내 등을 아무렇지 않게 팡팡 두들기며 눈웃음을 흘린다. 그래도 말이라도 다정하게 해주는 게 어딘가 싶다.


"3번 방이죠?"

"응. 가서 똑똑 두드리면 열어줄 거야. 아! 나 콜 와서 간다. 부탁해 성훈 씨!"


황급히 뛰어가는 팀장의 인형이 이내 사라졌다. 이해하긴 힘들겠지만 우리는 각자의 일을 하느라 바쁘다. 접점은 딱히 없지만 언제나 바쁘고 정해진 시간 동안 일을 할 뿐이다. 들고 있던 음료수는 나중에 마실 요량으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불뚝 튀어나온 모습이 영 아닌 거 같아 다시 손에 집었다.


똑똑-


"예! 들어오세요."


낯선 손이 쑥 바깥으로 나오더니 갑자기 내 팔목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터치에 내 동공이 커졌다.


"어..?"

"쉿! 성훈 씨죠? 야. 거봐 온다고 했잖아."

"뭐.. 하시는 건가요들?"


땀이 삐질삐질 난다. 당연히 상담사 혼자 있을 거라 생각한 작은 공간엔 총 세명의 여자가 자리 잡고 앉아 있었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서로 쿡쿡 거리며 웃음을 주고받았다.


"야! 잘되면 나중에 한턱 쏴라."

"아 짜증 나니까 어서 가아! 뭐 해. 불편해하잖아!"

"자리 만들어줬더니 흥! 성훈 씨?"


엉겁결에 대답이 나왔다.


"에..?"


대답이라기엔 다소 어리숙해 보이는데.


"나중에 따로 인사 나눠요. 저기 쟤 이름은 희선. 신희선이예요. 꺄하하."

"아씨! 하지 말라니까! 빨리 가!"


희선 씨. 희선이라는 여자는 얼굴이 새빨개져선 나머지 두 명의 상담사를 바깥으로 밀어냈다. 당황한 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쾅-


"아후 저것들 진짜. 미안해요. 제 PC가 상태가 좀 이상해서요. 이것저것 해봤는데 느려지기만 하고 잠깐 멈추는가 싶더니 그대로 꺼져버려요. 저 이상한 건 안 했어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들어오는 콜만 받다 보면 하루가 금방 끝나거든요."


물어보지도 않은 것까지 시시콜콜하게 할 필욘 없는데. 그래도 시끄러웠던 사람들이 사라져서 그런가 조금씩 정신이 돌아온다.


"잠시 봐볼게요. 아마 PC가 오래돼서 그런 것도 있긴 해요. 바이러스 걸렸을 수도 있고요."


아까의 어색함과 부끄러움은 어느새 사라지고 본업에 집중했다. 본업? 하아.. 이제는 그냥 당연하게 본업으로 생각하게 됐구나.


"오늘 날씨 덥죠?"

"예? 예."

"저기.. 아까 전엔 진짜 미안해요. 애들이 좀 짓궂어서. 사실 우린 고등학교 동창 사이거든요."

"예예."


'빨리 수리하고 일하러 가야 하는데 왜 자꾸 말 걸지.'


아니나 다를까 선임의 전화가 걸려왔다.


"저. 잠시만요. 여보세요."

"@#$@#$@#$@#$!"

"아. 이제 보고 있는데요. 조금 더 걸릴 거.."

"@#$@#$@#$!!!!!! !!!!!! !!!!!"

"빨리 고치고 가겠습니다."


나가서 받을 걸. 전화를 끊고 나니 희선이라는 여자가 상당히 불쌍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뭐라 변명할 필욘 없으니 얼른 고치기나 하자.


"힘들겠어요. 그쵸? 괜히 불렀네요. 미안하게."

"괜찮습니다. 어차피 지금 아니어도 고치러 왔어야 했어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그래도.. 아! 혹시 몇 살이세요? 저 23살인데."


'갑자기 나이는 왜?'


"동갑이네요."


속마음과 달리 순순히 나이를 알려줬다. 나이 정도야 뭐.


"와! 동생일 줄 알았는데. 어려 보여요. 아 하긴 군대도 갔다 오고 해야 하니까 동생일리가 없나? 하하. 잘됐다. 연락처 좀 알려줄래요?"

"예??"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아니 잘못 들은 척했다. 갑자기 알지도 못하던 여자가 연락처를 알려달라니.


"어.."

"아 이상한 거 아니고요. 가끔 수다나 떨자고요. 애들도 다 좋아할 거예요. 동갑 친구 만나기 힘들잖아요. 여기 다니는 동안 가끔 커피나 마시고 뒷담화도 하고 해요."




우리는 부쩍 친해졌다. 동갑이라는 단어가 묶어주는 유대감 덕에 희선 말고도 다른 애들과도 같이 어울렸다. 내가 끝나는 시간까지 기다렸다 같이 술 마시자며 이동했고 우린 또래의 여느 청춘들이 누릴 법한 평범한 일상을 보냈다.


웃고 떠들고 장난치고.

회사 밖에서의 만남은 확실히 달랐다.


컴퓨터 수리에 대한 요청은 번갈아가며 들어왔다. 가령 다른 애가 고장 났다고 호출하면 그 안에 희선이 있고 그런 식. 일부러 나와 희선이 사이를 가깝게 만들어 주려는 듯 그들은 적극적으로 우리 둘이 있는 시간을 마련해 줬다.


솔직히 말하자면 싫지는 않았다. 보다 보니 예쁘기도 했고 대화도 잘 통하고. 그렇다고 해서 좋아하는 사이로 발전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성훈 씨. 3번 방 수리 좀 하고 와줘요. 3번 방.. PC 왜 이렇게 자주 고장 나?]

[아. 거기 PC 상태가 많이 안 좋아서 오늘 내일 하더라고요. 임시적으로 버텨내고는 있는데 아예 새 PC로 교체해야 하지 않을까요?]

[야. 성훈 씨. 그렇게 해줄 거라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그냥 쓸 수만 있게 해 놓고 빨리 와요. 오래 질질 끌지 말고.]


싫은 소리는 좀 들었지만 그래도 희선이 만날 생각에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다. 뭐 딱히 할 얘기가 있어서는 아닌데 그래도 얼굴 보면 좋긴 하다.


"왔어?"

"고장 안 났지?"

"어."

"오늘 퇴근하고 술 마시러 갈래?"

"음. 글쎄."

"왜? 약속 있어?"

"그건 아닌데. 아니. 약속 있어."

"어.. 알았어. 그럼 나 갈게?"

"잠깐만."


왜?라고 물어보려 했는데 희선이가 갑자기 와락 껴안았다. 영문도 모른 채 난 눈만 끔뻑였다. 허공에 어정쩡하게 손을 든 채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잃었다.


"이럴 땐.. 안아줘야 하는 거야."


희선이 공중에서 멈춰 있는 내 양손을 자신의 등으로 이끌어 안착시켰다. 그제야 비로소 내 양팔은 평온함을 얻었다. 따뜻하다.


쿵- 쿵- 쿵-


"야.. 너 심장 소리 되게 크게 울리네?"

"어..? 그래?"


밀어내지도 그렇다고 안지도 못하겠어서 잠시 동안 굳어 있었다. 마침내 길게만 느껴졌던 시간이 끝나고 우리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잘살아. 직장도 좋은 데 옮기고. 돈도 많이 벌고. 아니 많이 모으라고 해야 하나? 하하. 나 같은 애 말고 좋은 여자 만나서 데이트도 좀 하고."

"갑자기 무슨 말이야?"

"잘 지내라고 성훈아. 아마.. 우리 이제 못 볼 거야. 오늘이 마지막 날이거든."

"뭐? 아.. 그래."

"바보."


인사는 어색하게 끝났다. 마지막으로 들은 바보라는 말이 우리 사이에서 나눈 공식적인 마지막 말이었다.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자리로 돌아와 앉았는데 아무 생각이 들지 않고 멍해졌다.


'마지막 날이라.. 그래. 잘 살아.'


바보라고 불렀던 마지막 말은 무슨 의미였을까? 의미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한 채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세상 속으로 흩어졌다.




[3년 후]


"야! 소개팅 잘해라!"

"아.. 나 이런 거 안 한다니까."

"괜찮은 사람이래. 잘해봐. 너 근데 어째서 정보를 하나도 안 물어보냐?"

"나 원래 소개팅 체질이 아니야. 자만추. 그래. 난 자연스러운 게 좋다니까."

"미친. 그래서 니가 연애를 못하는 거야."


친구 대신 소개팅 자리에 나오게 되다니. 이것 참. 밥이나 먹고 적당히 인사하고 돌려보내면 되겠지 뭐.


"어서 오세요. 혹시 예약하셨을까요?"

"아. 네네. 그게.. 제가 이니셜만 알고 있는데 혹시 OOO로 예약된 좌석이 어디 있나요?"

"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여자분께서 일찍 오셔서 대기 중이세요."


종업원의 인도를 받아 도착한 테이블에 가까워지자 앉아 있던 소개팅녀가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어딘가 낯이 익은 느낌인데.'


"어?"

"어머! 야!  너 성훈이야?"

"희선이?"


살다 보면 세상이 넓다지만 좁게 느껴질 때도 있다. 내겐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 솔직히 삼류 소설에서나 있을 법한 진부한 설정도 이것보단 낫겠다.


"메뉴 고르신 후 불러주세요. 좋은 시간 되십시오."


종업원이 사라지고 우리는 입을 반쯤 벌린 채 서로를 쳐다봤다.


"너. 그대로다?"

"야 너도."


우리는 어떻게 될까. 특별한 사이도 아니고 잠시 스쳐 지나갔던 사람 중 하나일 뿐이었는데.


"나 맛있는 거 먹는다?"

"어. 맘대로."


모르겠다. 오늘은 오늘의 기분대로 우연은 우연대로 즐겨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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